FENDI 2026 FW 컬렉션
1989년, 24세의 나이로 펜디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합류해 바게트 백 탄생에 기여하며 하우스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던 ‘그녀’가 37년 만에 금의환향했다. 26 FW 펜디 컬렉션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데뷔로 화제를 모았다. 치우리는 펜디의 100년 역사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호출했다. 1985년 로마 국립 근현대미술관(GNAM)에서 열린 전시 <펜디–칼 라거펠트: 작업의 여정(FENDI–KARL LAGERFELD: Un Percorso di Lavoro)>을 오마주해, 칼 라거펠트의 드로잉과 그가 80년대에 디자인한 모피 코트, 자수 드레스, 테일러드 재킷 등을 담은 아크릴 박스를 베뉴에 설치한 것.
마치 박물관 같았던 베뉴의 분위기는 런웨이로 차분하게 이어졌다. 쇼는 차분한 블랙 룩으로 시작했다. 젠더 구분을 흐리는 테일러드 수트와 더블브레스트 재킷, 크로스 스트랩 재킷이 약 17벌에 걸쳐 남녀 모델의 몸을 오가며 등장했다. 화려한 색과 과시적인 로고 플레이는 절제하고, 정교한 재단과 구조적 실루엣, 소재의 미묘한 변주에 집중했다. 코튼 셔츠와 울 재킷, 레이스 스커트, 양털 장식, 퍼 재킷, 시폰 톱, 아스트라칸 코트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질감의 레이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치우리가 일관되게 구축해온 여성적 코드는 펜디의 장인정신과 결합해 새로운 시너지를 냈다. 칼 라거펠트의 시그니처를 떠올리게 하는 턱시도 칼라 초커가 포인트로 더해졌고, 킴 존스 시기의 크로스 스트랩 재킷을 다시 무대 위로 올리며 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대한 경의도 드러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우스 밖으로 확장되었다. 치우리는 디올에서 꾸준히 이어온 ‘여성 예술가와의 연대’를 이어가며 이번 시즌 펜디 컬렉션의 주제인 ‘우리’를 동시대 예술 커뮤니티로 넓혔다. 1960년대 이탈리아 구체시(Concrete Poetry)를 대표하는 시인 미렐라 벤티볼리오(Mirella Bentivoglio)의 아카이브와 협업해 알파벳과 단어를 모티프로 한 주얼리와 그래픽 티셔츠를 제작했다. 이탈리아어로 ‘그리고’를 뜻하는 ‘E’, 벤티볼리오가 평생 탐구한 ‘A’, 책을 의미하는 ‘LIBRO’, 물음표와 느낌표 같은 문장 부호가 패턴과 프린트로 변환됐다. 또 다른 협업 파트너는 나폴리 출신 현대미술가이자 프로 궁수 SAGG 나폴리(SAGG Napoli). ‘뿌리 내리되 갇히지 않은(Rooted but not stuck)’, ‘충실하되 복종하지 않는(Loyal but not obedient)’ 같은 문구를 담은 모피 풋볼 스카프와 티셔츠를 통해 팀워크와 소속감이라는 메시지를 시각화했다.
하우스를 상징하는 코드는 어떻게 재해석됐을까. 우선 모피는 빈티지를 해체하고 재조합한 업사이클링 방식으로 제시됐다. 서로 다른 질감과 컬러의 모피 조각을 정교하게 잇는 길레(Gilet)와 처비(Chubby) 재킷에는 펜디의 정체성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이어가려는 의지가 담겼다. 실제로 펜디는 2025년 말부터 전 세계 일부 매장에서 ‘퍼 리스타일링’ 프로그램을 시작해 모피를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존재로 재정의하고 있다. 또한 모피 코트를 드레스에만 매치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데님 팬츠나 플라이트 수트 같은 워크웨어와 믹스해 ‘입을 수 있는 럭셔리’를 제안한 점도 눈에 띈다. 바게트 백의 변화 역시 같은 맥락에 놓였다. 1997년 탄생 당시 펜디 디자인 팀의 일원으로 제작에 참여했던 치우리는 이번 시즌, SAGG 나폴리가 화살통을 메는 방식에서 착안한 크로스보디 스트랩을 더했다. 바게트 백은 손에 들거나 어깨에 끼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두 손이 자유로운 데일리 백으로 확장한 것이다. 펜디 가죽 공예의 뿌리인 셀러리아(Selleria) 기법을 적용해 굵은 스티칭을 더한 버전, 미렐라 벤티볼리오 아카이브와의 협업으로 ‘E’나 ‘A’ 그래픽을 입힌 패브릭 바게트도 함께 제시됐다.
피날레는 1920년대의 화려함과 1990년대의 미니멀리즘이 교차하는 슬립 드레스로 마무리됐다. 얇은 실크 새틴과 레이스가 신체의 곡선을 유려하게 드러내고, 펜디 아틀리에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새긴 비딩과 크리스털 장식이 빛에 따라 은은하게 반짝였다. 여기에 칼 라거펠트의 80년대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은 턱시도 요소를 드레스에 접목하고 여성의 몸에 맞춰 정교하게 재단해, 이브닝웨어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안했다.
각자도생의 시대. 치우리는 젠더와 세대,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협업을 통해 펜디를 ‘공유된 기억의 아카이브’로 재구성했다. 펜디를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여성들의 연대와 삶을 지지하는 플랫폼으로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충분히 지켜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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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of Fend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