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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신작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원작 소설 <액스>가 새 옷을 갈아입고 출간됐다. 이제 영화를 보기 전 완벽하게 예습할 차례다.

1997년 첫 출간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2025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원작 소설 <액스>(오픈하우스)가 새 옷을 갈아입고 재출간됐다. “필생의 프로젝트였다”라며 영화화를 선언한 박찬욱은 이 책을 두고 “무릇 월급쟁이라면 다 읽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피비린내 가득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박찬욱이 다소 잔혹한 농담을 건넸다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산업 자동화에 따른 대규모 정리해고가 속출하던 현실과, 2025년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드리운 불황의 그림자를 함께 떠올려보면, 중산층의 삶을 지키기 위해 직업을 붙잡고 안정과 나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일은 시대를 초월한 잔혹극이 아닐까 생각하며 입안에 도는 씁쓸함을 삼키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어쩔 수 없는’ 굴레를 박찬욱은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오랜 세월 제지회사에서 일한 평범한 중산층 가장이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으며 실직자가 된 그는 2년 넘게 구직 활동을 이어가지만 아무런 진전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막힌 계획을 세운다. “나는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치 체호프의 총처럼, 그의 살인은 결국 발사되고 만다. 그것도 연쇄살인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그는 잡지에 자신이 세운 가상의 제지회사를 내세워 허위 구인 공고를 싣고, 사서함으로 도착한 이력서를 단서 삼아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회사가 내린 정리 해고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삶이 저당 잡힌 그에게 살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300쪽이 넘는 내내 이어지는 지극히 담담하고 무감정한 하드보일드 문체는 그의 선택을 더욱 잔혹한 필연으로 각인시킨다. 그리고 어딘가 원상 복구가 불가능한 붕괴된 삶을 억지로 제자리에 되돌리려 분투하던 박찬욱의 영화 속 인물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벼린 눈빛으로 제 손에 피를 묻히던 그 얼굴들 말이다. 단순히 서사를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냉혹하지만, 그간 박찬욱이 펼쳐온 세계와 겹쳐 읽을 때 이 소설은 한층 더 깊은 파문을 남긴다.
에디터 | 전여울
지금의 독서법
교환일기 대신 교환독서를, 도서관 대신 테크노 클럽에서 책을 읽는다. 신비하고 기묘한 요즘의 독서 트렌드.

‘텍스트힙’의 시대는 팡 터졌다가 금세 사그라드는 불꽃놀이에 불과할 것이라 짐작했다. 독서를 통해 도파민을 충족한다는 뜻의 ‘독파민’이 신조어로 떠오를 때도, 과연 젠지들이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면 그만인 ‘숏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맞물려 폭풍 같은 독서 붐이 지나간 후, 여과되고 남은 것이 있었다.
올해도 지속 가능성이 소비 트렌드로 떠오른 가운데, 이와 맞닿은 독서 흐름이 감지됐다. 첫째는 뷰티 브랜드 이솝이 8월부터 선보이는 ‘북 익스체인지 프로그램’. 다 읽은 책을 들고 매장을 방문하면, 이솝이 큐레이션한 동시대 여성 작가 10인의 도서로 교환해주는 것으로, 지식을 나누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준비한 책이 다 소진되고 나면, 고객이 추천글과 함께 두고 간 책으로 바꿔주는 순환 구조다. 공병을 재활용하는 ‘린스 앤 리턴 캠페인’처럼, 이솝이 꾸준히 이야기해온 지속 가능성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브랜드가 나서서 책을 교환해주는가 하면, 직접 지인들과 책을 나눠 읽으며 새로운 독서 문화를 형성하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인스타그램에 ‘#교환독서’라고 검색하면, 짤막한 메모가 적힌 책 사진들이 피드를 장식한다. 방식은 간단하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감상, 질문 등을 댓글처럼 적고 전하면 끝이다. 여러 사람의 책장을 탐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지만, 이렇게 많은 손을 거친 책 한 권은 한 편의 일기가 된다. 혼자만의 내밀한 경험으로 여겨졌던 독서는 공동의 경험이 되고, 커뮤니티가 된다. 경험을 중시하는 세대답게 단순히 독서 토론 모임, 야외 독서회를 넘어서 이들의 독서 커뮤니티는 다양한 변주를 거친다. 그중 최종 진화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리딩 파티’. 기원은 뉴욕의 ‘리딩 리듬’에서 찾는다. “북클럽이 아닌, 리딩 파티(Not a book club, a reading party)”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파티를 연다. 평범해 보이는 독서 모임이 특별한 이유는 베뉴 때문. 일출이 보이는 맨해튼 빌딩 ‘더 엣지’의 100층 전망대나 허드슨 야드 광장, 혹은 뉴욕 지하철 한 칸이 이들의 접선지다. 이 문화가 한국에도 흘러 들어왔는데, 대표 사례는 독서모임 커뮤니티 ‘트레바리’의 ‘리딩시티’를 꼽는다. 성수에 위치한 ‘언더시티’에서 열리는 리딩 파티로, 독서와 전자음악을 결합한 것이 특징.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DJ가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흥을 못 이겨 춤을 춰도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다. 붉은 조명 아래 테크노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게 그려지지 않지만, 앰비언트 음악이 몰입을 돕는 배경음악 역할을 해 의외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혼자서 고요히, 정적인 이미지로 표상되는 독서가 지금 세대에게는 즐거운 경험으로 읽히고 있다. 분명 질 높은 독서가 되겠느냐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뒤따르겠지만, 목적이 무엇이든 책을 매개로 한 여러 시도가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다. 짧은 유행이라 단정할 수도, 하나로 정의할 수도 없는 지금의 독서는 방향이야 어쨌든 여전히 흐르고 있다.
프리랜스 에디터 | 홍수정
- 포토그래퍼
- 이창민
- 프리랜스 에디터
- 홍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