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영의 주위론 가벼운 공기가 맴도는 듯했다.
스스로 무던하고 단순하다고 말하지만, 자기 앞에 놓인 책임에 대해 말할 땐 직선으로 선명하게 입을 뗀다. 초여름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쩐지 수영과 나란히 포개지는 듯하고, 바로 이 초여름에 그녀가 사랑스러운 애주가로 변신한 드라마 <금주를 부탁해>가 세상에 나온다.

<W Korea> 최근 다도에 푹 빠졌다 들었어요.
최수영 재미있더라고요. 어떤 마음으로 차를 끓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게 참 오묘해요.
재미 붙인 계기가 있었어요?
<금주를 부탁해>를 촬영하면서 들인 습관이에요. 잠을 많이 못 잤거든요. 아무래도 부담이 컸나 봐요.
데뷔 후 첫 타이틀롤 작품이죠?
맞아요. 촬영 마치고 집에 오면 스위치가 한 번에 안 꺼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별의별 걸 다 해봤어요.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ASMR을 듣고, 잠들기 2시간 전에는 대본을 보지 않고. 일종의 취침 전 루틴을 만든 건데 다도도 그중 하나였어요. 한 잔을 굉장히 귀하게 마실 때 몸도 마음도 평온해지더라고요.
보통은 차가 우러나는 동안 일상에서 미뤄둔 고민을 떠올리는데, 수영은 반대로 생각을 비우는 시간을 가진 셈이네요?
맞아요. 오히려 그때만큼은 생각을 좀 안 하려 했어요. 저는 늘 멀티를 해온 사람이잖아요. 성격상 항상 생산적인 걸 하려는 버릇도 있고요. 그런데 다도를 하면서는 의미 없게 보내는 시간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금주를 부탁해>는 애주가로 소문난 주인공 ‘금주’가 술을 증오하는 첫사랑과 재회하며 일어나는 로맨스를 그려요. 참으로 술 냄새 풍기는 작품이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 <혼술남녀>를 집필한 명수현 작가가 극본을 맡았더라고요.
명수현 작가님 글에는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잖아요. 이번 작품 역시 그래요. 쉽게 만나지 못하는 대본이 저에게 온 기분이었어요. ‘이렇게까지 한 인물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글이 있었나?’ 했을 때 적어도 저는 없다고 느끼거든요. ‘금주’가 자동차 정비사로 열심히 일하며 느끼는 애환이 있고, 술에 의존하며 맞닥뜨리는 자기 회피가 있고, 그렇게 도망친 곳에서 내면을 직시하는 순간이 있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주변 사람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요. 얼핏 ‘금주’란 사람의 우당탕 소동극처럼 보일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금주’의 아주 디테일하고 느린 성장이 있고요. 행운이죠, 이런 글을 만났다는 게.
‘금주’란 캐릭터에 접근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우선 대본에 지문이 굉장히 많았어요. 소리를 지른다, 활짝 웃는다, 크게 표정을 짓는다 등등. 사실 ‘금주’를 체화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저는 평상시 아주 ‘캄’하거든요. 개구쟁이나 하이 텐션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대사가 입에 붙기까지 좀 헤매는 과정이 있었어요. 배우마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데, 저는 우선 인물의 직업을 생각해요. 꽤 많은 정보를 직업에서 얻을 수 있거든요. ‘금주’는 자동차 정비사기 때문에 일단 엉덩이가 가볍고 궂은일 마다하는 법 없고,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한 사람일 거라 상상했어요. 그렇다고 우악스럽게 타이어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거나, 아무 데나 털썩 앉고 팔자로 걸을 것 같진 않았고요. 무척 섬세한 사람이라 자동차 부품 하나하나를 악기 다루듯 정비하는 친구면 어떨까, 남자 정비사가 많은 업계에서 여자인 ‘금주’는 어떻게 달랐을까, 이런 것들을 마구 떠올리는 거죠.
마치 악기 다루듯 자동차를 정비하는 사람, 이걸 들으니 캐릭터가 순간 입체적으로 보이는데요?
그렇죠. 사실 ‘금주’는 의사가 됐어도, 예술가가 됐어도 잘했을 애예요. 진짜 기계가 좋아서, 부품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원리가 좋아서 정비 일을 하는 친구라고 상상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니까 이 캐릭터가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겠더라고요. 평소 기계를 다루니 무척이나 예민할 테고, 사회생활을 위해 남자들 사이에서 술까지 잘 마시는 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달려왔을 테고. 정말 술 없이는 못 살았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어느 정도 캐릭터의 윤곽이 잡히더라고요. 또 제가 글만 보며 상상한 ‘금주’는 왠지 퇴근하고 집에 갈 땐 ‘아니 쟤가 평소엔 저런 옷을 입는다고?’ 싶을 정도로 개성 있는 옷을 입을 것만 같았어요.

이번 작품 속 ‘금주’도 그렇지만 2020년 JTBC <런 온>의 ‘서단아’, 2023년 ENA <남남>의 ‘김진희’ 모두 아주 주체적인 여성이었어요. 돌이켰을 때, 왜 이런 역할이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그런 것만 선택하니까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죠. 그런데 캐릭터가 단순 도구로 활용되는 작품엔 아무래도 손이 잘 가지 않아요. ‘서단아’는 잘나가는 스포츠 에이전시의 대표로 일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인물이고, ‘김진희’는 할 말은 하고 보는 파출소 순찰 팀장이에요. 다들 자기 삶을 책임지려는 인물이죠. 그리고 제가 좀… 성격상 일 못하는 사람을 안 좋아해요(웃음). 일 못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일 못하는 사람을 연기하기는 싫잖아요. 물론 처음엔 서툴더라도 성장하면 괜찮아요.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확고함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에요.
그 캐릭터들은 또한 좋고 싫은 게 명확한 인물이잖아요. 수영 역시 자신의 목소리에 솔직하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인가요?
오, 전혀 아니었어요. 그걸 30대 초반에야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건가?’ 하는 질문을 서른 넘어서야 하기 시작했어요. 하다못해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별 의견이 없었고 일을 하다가도 ‘괜찮아요’ 하고 넘길 때가 많았어요. 예전 소녀시대 활동으로 단체 생활을 오래 해서인 듯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는 걸 몰랐을 수 있고요. 그러다 어느 날 멤버 티파니가 커피 주문을 할 건데 뭘 마실 거냐는 질문에 “아무거나”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벌컥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니. 따뜻한 거, 차가운 거? 차갑다면 얼음은 얼마나? 시럽은 몇 번? 우유를 원해? 그냥 우유, 아니면 락토프리 우유? 오트 밀크? 아몬드 밀크?” 저로선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나 싶었거든요. 그때 티파니가 해준 말이 있어요. 자신이 원하는 걸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 늘 옵션이 있고 내가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
이 커피 주문 사건이 수영을 변화시켰고요?
네, 바로 이 사소한 커피 주문 사건이(웃음). 그때부터 좀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요즘엔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려 해요. 이를테면 그냥 ‘마실 것’ 대신 ‘오렌지 주스에 얼음 좀 넣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죠.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편인가요?
맞아요. 늘 ‘저 사람이 맞을 수 있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자기 확신은 있어요. 그런데 그 확신은 한 번에 생긴 게 아니라 많은 경험에 의해 생겼고요. 작년 첫 일본 솔로 음반을 발매했는데 타이틀곡 ‘Unstoppable’을 작사하며 이런 가사를 썼어요. ‘실패와 성공의 데이터. 그려가는 최고의 포물선. 추구하자 이상을.’ 오랜 시간 활동해오며 여러 실패와 성공을 거쳤고, 제 안에도 어떤 데이터가 쌓였죠. 그런데 그게 고집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주는 듯하더라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은 강해지되, 언제든 사뿐히 기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Unstoppable>은 데뷔 22년 만에 발매하는 첫 솔로 음반이었어요. 그 당시 SNS에 이런 말을 남겼고요.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적당히 프로인 척할 수 있는 지금, 굳이 지금 또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게 아프기도 하더라고요. 그만큼 두려웠지만 너무 행복했어요.’ 이건 어떤 마음일까요?
사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면 안 들킬 수 있어요. 시도하는 순간 들켜요. 그래서 옛날엔 내가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겁이 많은 거죠. 솔로 앨범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주변에선 ‘아니, 지금 연기 잘하고 있는데 왜 이 타이밍에, 그것도 일본에서 솔로 앨범을 내?’라고 하는 시선이 있었어요. 사실 저라고 그 생각을 안 했을까요. 이 기회가 왜 지금 온 걸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굳이 들키면 내가 얻는 것은 뭘까. 그런 고민의 기로에서 든 생각이 ‘내가 하고 싶은데 왜 주저해야 하지?’였어요. 그리고 단순히 ‘해봤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평가를 받아봤다’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결과를 떠나서 얻은 게 참 많았다고 생각해요. 앨범을 내고 문자를 참 많이 받았거든요. ‘도전 멋있다, 그냥 네가 어떤 마음에서 한지 알겠어’라는 말이 가장 감동으로 다가왔고요. 그거 하나로 다 된 것 같아요.
<Unstoppable>이 수영에게 남긴 건 무엇일까요?
‘선택’에 대한 생각을 많이, 또 진지하게 하게 된 것. 사실 이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나이가 됐잖아요. 그래서 무엇이 가장 나다운 선택일지 고민해요. 물론 ‘Unstoppable’의 가사에는 멋지게 ‘내가 고르는 스토리’라고 적어놓곤 여전히 두려운 게 많고 용감하지 않은 사람이라 느낄 때도 많지만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이것 또한 앨범을 내며 느꼈고 이 에너지로 <금주를 부탁해>를 촬영할 수 있었어요. 첫 타이틀롤이라는 것에는 이 용기가 꼭 필요했거든요.

그렇다면 <금주를 부탁해>에서 발휘해본 용기는 무엇일까요?
‘하는’ 연기를 해보자, 다 전달하는 연기를 해보자. 이런 마음이 있었어요. 이건 성격과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저는 뭐랄까 열심히 하는 걸 늘 경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성실하되 열심히 하진 말자’라고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모니터 너머 너무 열심히 연기하는 제 모습이 거북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고요. 물론 제 취향 탓에 뭔가를 ‘안 하는’ 연기를 더 선호한 지점도 있어요. 그런데 <금주를 부탁해>를 촬영하면서는 사람들이 내 표정을 보고 바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연기를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내가 봐도 채널을 돌리고 싶지 않게 만드는 사람의 연기는 표정을 하나라도 더 짓고, 뭔가를 조금 더 표현하는 연기니까요. 진짜 ‘발악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촬영했어요. 이걸 한 번 하고 나니까, 두려움이 조금 없어진 것도 같아요.
최근 수영에게 빅 뉴스가 있죠?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스핀 오프 작품 <발레리나>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어요. 6월 북미 개봉을 시작으로 전 세계 공개를 앞두고 있는데, 우선 어떻게 이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는지 묻지 않을 수 없어요.
그렇죠. 사실 캐스팅 확정 소식을 듣고 저 또한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출연을 주저하는 마음도 컸거든요. 어쩌면 커 보이기도, 작아 보이기도 한 도전인데 제가 그 앞에서 너무 많은 걱정과 고민을 하고 있더라고요. ‘거기 발 앞에서 치는 파도 무서워서 가지도 못한다.’ 제가 딱 이 꼴이었어요. 이 영화가 나오고 받을 피드백을 고민하던 찰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해외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 딱 하나였어요. 맨몸으로 혼자 부딪치는 것, 그게 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사실 배우라는 직업은 늘 주위의 케어를 받잖아요. 집 밖으로 나가면 나를 기다리는 차가 있고, 나 대신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사람인지 까먹어요. 소위 까불게 돼요. 그런데 배우는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정작 내 삶을 살아볼 기회가 적죠. 사람처럼 사는 시간이 저에게 꼭 필요했어요.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이 작품에 뛰어든 것도 있어요.
그렇게 나 홀로 뛰어든 촬영 현장은 어땠나요?
저 울었잖아요(웃음).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도 엄마가 싸준 김치며 반찬, 라면을 호텔 냉장고에 하나하나 넣으며 다짐했어요. ‘수영아, 이제 진짜 누구의 도움 없이 여기서 사는 거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생활에 또 익숙해지더라고요.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던 강변에서 혼자 와인 한 병 끼고 노을 지는 것도 보고. 제가 은근히 단순해요. 막상 용기는 없어도 한번 환경이 주어지면 거기서 또 행복해하는, 참으로 단순하고 나약한 동물이에요(웃음).

<발레리나>를 통해 어쩌면 여태 만나지 못한 관객을 마주하게 된 셈이잖아요. 그들이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궁금증은 없을까요?
글쎄요, 궁금증을 갖기보다 우선 제가 작품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쟤 누구야?’라는 한마디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래서 사실 굳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염색을 하고 촬영장에 갔고요. 비주얼 시안을 주고받을 때 배우가 아이디어를 내도 좋다는 말에 덥석 오렌지색 머리는 어떠냐 제안했는데 너무나 쿨하게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어요. 또 그 당시 저에게 어떤 기세가 좀 있었거든요.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어!’ 이런 느낌이어서 가능한 현장을 눈에 많이 담으려고,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 구석에 앉아 있곤 했어요. 정작 팀에선 절 좀 부담스러워하며 ‘응, 들어가 있어도 돼’라고 했지만(웃음).
하하. 서로 다른 결의 두 작품이 공개를 앞둔 요즘, 설렘 속에서 지내고 있을 듯해요. 그렇다면 바로 지금의 수영을 설명하는 문장이 있나요?
저를 표현하는 말이 딱 있어요. 명랑한 염세주의자. 저는 늘 현장에서 ‘공주의 규칙’을 듣거든요. 한창 SNS에서 밈으로 퍼진 노래죠. 그래 인생은 원래 빡센 거야, 오늘도 공주답게 살자, 이게 뭐가 힘들어, 공주답게 하면 돼, 나는 귀한 존재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귀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공주다!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늘 되뇝니다(웃음). 그럼 어떤 현장도, 어떤 일도 웃으며 버틸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수영의 비밀 세 가지를 알려주세요.
첫째, 정리를 잘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 다 들어간다고?’ 싶은 양의 짐을 캐리어에 다 넣을 수 있는 장기를 가졌어요. 둘째, 생각보다 엄청 무던해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꼬아서 생각하지도 않아요. 셋째, 생각보다 친구가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이 너무 바빠요. 집 청소하고, 그러다 종종 일을 하고, 자주 쿠팡 배달 온 것 뜯느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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