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의 위대한 유산

이예지

스위스 산속 작은 마을에 위치한 브레게 로리앙 매뉴팩처를 찾았다. 그곳에서 천재 워치메이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의 발자취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스위스 제네바 근교 쥐라산맥 자락의 발레드주에는 호수를 끼고 유명한 시계 브랜드의 매뉴팩처나 아틀리에가 포진하고 있다. 시계사에 방대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고급 시계 제조사 브레게도 그중 하나인데, <더블유 코리아>에 브레게 매뉴팩처 방문 기회가 주어졌다. 제네바 시내에 위치한 브레게 부티크에서 차로 달려 1시간여,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 쌓인 들판이 펼쳐지기 시작하면 스위스의 이름난 워치메이커의 마을에 근접했다는 증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속의 작은 마을 로리앙(L’Orient)에 위치한 브레게 로리앙 매뉴팩처가 눈앞에 나타났다.

브레게 매뉴팩처 전경.


브레게 하우스의 창립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는 스위스 뇌샤텔에서 태어났지만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터라 그의 위대한 족적은 두 국가에 걸쳐 있다. 선대로부터 시계 수리에 관한 기본기를 익힌 후 10대의 나이에 혈혈단신 파리로 진출한 그는 1775년 시테섬에 첫 공방 겸 매장을 열어 전설의 시작을 알린다. 워치메이커로 그가 남긴 업적이 대단한 이유는 수백 년 전 이미 현대 시계의 공식 대부분을 정립했다는 사실이다. 세련된 서체와 디자인, 반복되는 패턴으로 장식한 엔진 터닝 다이얼 등 일찌감치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으며, 그에 걸맞게 고객 리스트도 무척 화려하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조세핀 황후, 마리 루이즈 황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조반니 파이시엘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3세, 영국의 조지 3세와 빅토리아 여왕, 브라질의 이사벨 황후 등 이름을 전부 열거하기 힘들 만큼 전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귀족과 인사들이 브레게의 열혈 팬을 자처했다.

기요세 워크숍에서 작업 중인 장인.


1780년 세계 최초로 퍼페추얼이라고 불리는 셀프와인딩을, 1783년 미닛 리피터를 위한 공 스프링을, 같은 해 ‘브레게 핸즈’로 통하는 오픈 팁 핸즈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한 브레게 인덱스 디자인을 도입했고, 1786년 브레게 하우스의 상징과도 같은 기요셰 패턴 장식 다이얼을, 1790년 독자적인 충격 흡수 장치인 파라슈트를 발명했다.

정밀한 무브먼트 조립 과정.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고 걸출한 업적을 남긴 그는 1801년 기계식 워치의 심미성을 끌어올린 투르비용을 개발해 10년간의 특허를 취득했고, 1812년에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나폴리 여왕이 된 카롤린 뮤라를 위해 최초의 여성용 손목시계를 만들어 전달했다. 이 시계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레인 드 네이플 컬렉션의 원형으로 하우스의 빛나는 유산 중 하나다. 또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여행용 클락인 심퍼티크(Sympathi-que)인데, 시간 표시뿐만 아니라 퍼페추얼 캘린더, 문페이즈 기능을 함께 탑재해 당시 파격적인 기술적 성취로 인정받았고, 이집트 원정을 떠나는 나폴레옹에게 팔린 최초의 여행용 시계다. 이렇듯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인류 역사의 전설 같은 이들과 가깝게 지낸 천재 워치메이커이자 마케터였음이 틀림없다. 사업이 성공 궤도에 오르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아들인 앙투안 루이 브레게를 파트너로 영입하고, 이어 손자인 루이 클레망 프랑수아 브레게가 가업을 잇는다. 그 이후부터 직계 패밀리 비즈니스는 끝나지만, 공방의 총 책임자였던 에드워드 브라운이 사업을 물려받은 후, 1999년 스와치 그룹의 창립자 니콜라스 G. 하이예크가 브레게를 완전히 인수하며 브레게는 스와치 그룹 소속으로 남게 됐다. 브레게는 위대한 창립자의 유산을 전승하는 데 안주하지 않고, 현대적 변모를 꾀하며 매뉴팩처를 인수 합병해 오늘날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 업계의 중심에 서게 됐다.

라로리앙 매뉴팩처 리셉션 전경.

이제 브레게의 심장부를 본격적으로 탐방해볼 시간. 브레게 로리앙 매뉴팩처는 크게 4파트로 나뉘는데, 첫 번째 파트에서는 케이스와 부품을 다듬는 머시닝, 공예 정신이 강조되는 기요셰(Guilloché), 에나멜링(Enameling), 인그레이빙 (Engraving) 등이 이뤄지고, 두 번째 파트에서는 무브먼트 조립, 세 번째 파트에서는 케이징 및 다이얼의 핸즈 피팅, 네 번째 파트에서는 스트랩 또는 브레이슬릿 조립, 자체 검수와 패키징 과정이 이뤄진다. 머시닝은 얇게 뽑아낸 강철 플레이트를 이용해 무브먼트의 주요 부품을 커팅하는 과정이다. 깨알보다 작은 미세한 부품들이 CNC머신을 통해 정교하게 가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어 방문한 곳은 핸드 기요셰 작업 공간인데, 브레게는 시계 산업에서 가장 큰 기요셰 워크숍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기요셰 패턴을 가지고 있다. 특히 로즈 엔진 터닝 선반을 이용한 전통 방식 그대로 작업하는 특유의 클래식한 디자인은 브레게의 상징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핸드 베벨링, 불어로는 앙글라주(Anglage)를 위한 워크숍으로 평범했던 무브먼트가 부품의 윤곽과 각도를 파일링하는 기술을 통해 하이엔드 무브먼트 특유의 고급스러운 미감을 갖게 되는 작업을 지켜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브먼트 어셈블리가 이뤄지는 워크숍으로 향했다. 어셈블리는 총 3단계에 걸쳐 조립되는데, 주요 휠과 휠 브리지, 래칫 휠, 캐넌 피니언 등을 세팅한다. 이어 세팅과 타이밍(Timing)으로 불리는 다음 단계에서는 레귤레이팅 부품이나 파라슈트, 밸런스 브리지와 같은 부품을 배치하고, 파이널 어셈블리 단계에서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충격 흡수 장치, 아워 및 미닛 핸드, 다이얼까지 케이징 전 단계의 무브먼트 및 다이얼 조립을 완료한다. 수백여 개에 달하는 무브먼트 부품을 매우 체계적으로 다루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레게 하우스의 전설적인 마스터피스들이 새 생명을 얻는 복원 워크숍으로 이동했다. 보통 고객의 워치나 박물관 전시품을 수리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곳인데, 옛 시계를 예전 기술로 작업하기 때문에 이곳의 장인들은 기술 보존 차원에서 역사학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이어 하우스를 상징하는 몇 가지 마스터피스도 보여주었는데, 앞서 언급한 나폴레옹의 심퍼티크 클락의 오리지널 복원 모델을 비롯해 1801년과 1817년에 제작된 초창기 오리지널 투르비용 포켓워치,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포켓워치의 복원 시계 No.1160 등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진귀한 워치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워치 역사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브레게의 진심이 느껴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브레게 하우스의 풍부한 기술력과 이를 전승하는 수십 년 경력의 장인들, 그리고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타임피스까지. 전통을 고수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해준 브레게 하우스의 가치를 두 눈으로 목도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숙달된 솜씨로 작업 중인 장인.

작지만 거대한 세상

작은 다이얼 위에 섬세한 툴로 구현되는 시계 공예 예술의 묘미. 브레게가 자랑하는 기요셰, 에나멜링, 인그레이빙 워크숍의 장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손끝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메티에다르(Metierd’Art) 예술을 목격했다.

기요셰 Guilloché

기요셰 기법이 쓰인 브레게 마린 5517 무브먼트 브릿지.

기요셰는 하우스의 중요한 시그너처다. 주로 가구를 장식하는 데 쓰이던 기법을 1786년, 창립자가 시계 다이얼에 최초로 도입했으며, 금, 플래티넘, 마더오브펄 등의 표면에 직선 혹은 곡선을 정교하게 새기는 기법과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입체적인 텍스처를 폭넓게 일컫는 장식 용어다. 기요셰는 다이얼의 빛 반사를 줄이며, 스몰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카운터의 가독성을 높이기도 한다. 브레게는 현재 기요셰 공정만 전담하는 워크숍을 운영하는데, 단일 브랜드 중 이 정도 전문 인력을 확보한 곳은 유일무이하다. 기요셰 장인은 테이블에 앉아 왼손으로 로즈 엔진 머신(기요셰 작업을 하는 테이블 형태 기기)의 휠을 돌리고, 오른손으로는 캐리지에 고정된 끌을 섬세하게 조정한다. 특히 기요셰 공정이 우아한 ‘브레게 스타일’에 기여한 것은 다이얼 위에서의 입체적인 대비 덕분에 전형적인 바로크 스타일 대신 섬세한 핸즈를 사용할 수 있었다.

브레게 스타일의 클래식한 기요셰 기법이 다양하게 적용된 브레게 포켓 워치 No. 4691.

에나멜링 Enameling

에나멜을 굽는 가마.

‘그랑 푀(Grand Feu)’, 큰 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는 전통적인 에나멜 기법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말이다. 다이얼이 될 플레
이트 위에 실리카와 산화물의 혼합물을 발라 불에 구워내는 기법으로 투명하고 뽀얗게 광택이 도는 에나멜 다이얼은 그 뜨거
움을 견뎌낸 만큼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단, 에나멜 기법의 단점이라면 초벌도 800°C가량의 고온에서 구워야 하
며, 단색의 경우라도 2~4회 덧바르고 굽기를 반복해야 한다. 특히 매번 가마에 들어갈 때마다 금이 갈 수 있는 위험을 감수
해야 하기에 색을 내는 기법인 래커보다 생산량이 크게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고급 워치에만 쓰이는 이 기법은 스
위스 소수 장인을 통해 계승되며, 온도와 굽는 시간은 마스터만이 알고 있다. 브레게 워치 중에서는 단순하고 우아한 브레
게 클래식 5177 그랑 푀 블루 에나멜, 클래식 문페이즈 7787 같은 모델을 통해 에나멜 미학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었으며, 다이얼에 ‘Swiss Emaille Grand Feu’라고 표기하기도 해 그 기법의 자랑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한다.

에나멜 기법으로 구워낸 뽀얀 광택의 다이얼.

인그레이빙 Engraving

장엄한 인그레이빙 기술이 적용된 마린 투르비용 에콰시옹 마샹 5887

앙글라주 워크숍에서 진행되는 인그레이빙은 아주 얇은 끌로 금속을 ‘음각화’해 깊이를 섬세하게 조절하고 길고 가는 선을 새겨 패턴을 만드는 작업으로 극도로 세밀함을 요하는 장인 기술이다. 다양한 팁의 조각칼을 이용해 시각적 깊이를 더한 특별한 시계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워크숍에서 만난 한 장인은 무려 30년 경력의 소유자로 놀라움을 안겼는데, 그가 작업한 마린 투르비용 에콰시옹 마샹 5887, 클래식 더블 투르비용 5345 퀘드올로지 등 각 컬렉션의 최상위 마스터피스의 아름다운 인그레이빙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클래식 더블 투르비용 5345 퀘드올로지.
끌로 인그레이빙을 새기는 과정

여왕의 시계 레인 드 네이플 Reine de Naples

나폴리의 여왕 카롤린 뮤라를 위해 브레게가 제작한 세계 최초 여성용 손목시계에서 영감을 받은 레인 드 네이플 컬렉션.

레인 드 네이플 8918
한 줄 평 그랑 푀 에나멜 기법으로 완성한 부드럽고 우아한 그레이 컬러 다이얼.
얼굴 평 18K 로즈 골드 오벌형 케이스, 다이아몬드 118개를 세팅한 베젤, 플랜지와 크라운, 아라비아숫자 인덱스 등 간결하고 모던한 인상.
스펙 36.5 x 28.45mm, 두께 10.05mm,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 537/3 탑재, 30m 생활 방수, 카프스킨 스트랩.

레인 드 네이플 8918 민트
한 줄 평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공개된 레인 드 네이플 컬렉션의 2024년 신작. 컬렉션 최초로 도입한 민트 컬러.
얼굴 평 18K 화이트 골드 오벌형 케이스, 다이아몬드 117개를 세팅한 베젤과 플랜지, 브리올레트 컷 다이아몬드 크라운 세팅. 다이아몬드 121개를 스노 세팅한 마더오브펄 다이얼, 민트 컬러 아라비아숫자 등 전체적으로 여성스럽고 화려한 인상.
스펙 36.5 x 28.45mm, 두께 10.05mm,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 537/3 탑재, 30m 생활 방수, 악어가죽 스트랩.

레인 드 네이플 8918 라이트 핑크
한 줄 평
그랑 푀 에나멜 기법으로 구운 오묘한 라이트 핑크 컬러가 인상적인 다이얼.
얼굴 평 18K 로즈 골드 오벌형 케이스, 다이아몬드 118개를 세팅한 베젤, 플랜지와 크라운, 골드 컬러 아라비아숫자 등 소녀미 담뿍한 핑크톤 워치.
스펙 36.5 x 28.45mm, 두께 10.05mm,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 537/3 탑재, 30m 생활 방수, 카프스킨 스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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