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며 마무리하는 한 해. 시인, 소설가 13인이 자신이 아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보내왔다. 어떤 여운이 1년의 마지막에 짙게 고인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란 항상 그런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에 의해서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 <미성년>, 도스토예프스키, 이상룡 역, 열린책들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성년>은 젊음처럼 낯설다. 젊음이라는 것 자체가 낯서니까 이야기도 이야기의 방식도 낯설다고 이해하자. 어떤 해체와 어떤 무질서를 이해하자. 미성숙해서 방황하고, 혼란해서 방황하고, 산만해서 방황하고. 그런 방황하는 젊음에 의해서 새로운 시대가 창조된다는 것. 이르지 못한 사람이 이르는 시대가 된다는 것. 시행착오를 응원하는 이유가 아닐까. 나의, 너의, 우리의, 과정을, 서로, 서로서로, 응원하였으면 한다. 그러니까 그랬으면 한다. – 권박(시인)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 <시핑 뉴스>, 애니 프루, 민승남 역, 문학동네
<시핑 뉴스>라는 소설은 그 자체로 이 단 한 줄의 문장에 대한 부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왜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척박한 뉴펀들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일구려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왜 아내를 처참한 교통사고로 잃고, 동반 자살로 부모를 떠나보내고, 거기에 직장에서 해고까지 당한 한 사람의 불행담을 굳이 읽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500쪽에 달하는 장대한 이야기를 통해서야 비로소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동시에 그 불가능한 일의 희박한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단 하나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긴 이야기를 읽고, 길고 긴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 정영수(소설가)
“창을 높이 들고 달리다 창을 든 팔을 몸 뒤쪽으로 쭉 당기고, 이어 그 팔을 앞으로 쑥 내밀며 어깨 위 높은 곳에서 창을 놓을 때- 뭔가 폭발하는 것처럼 창을 놓을 때- 그는 우리에게 무적으로 보였다. ”- <네메시스>, 필립 로스, 정영목 역, 문학동네
1944년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 정확한 감염 경로를 알 수 없지만 주로 어린아이들 사이에 전염되며 소아마비를 일으키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질병 ‘폴리오’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어떤 아이가 죽고 어떤 아이가 불행을 피할지 알 수 없는 불합리한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캔터’ 선생이 있다. 그는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놀이터 아이들을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무작위로 떨어지는 신의 천벌 앞에 속수무책인 채 괴로워한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 그 역시 폴리오에 걸려 팔과 다리가 마비되고 만다. 복수의 여신이자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분배하는 네메시스 앞에 그는 패배자인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세계에 맞서 지키고 싶은 이들 앞에 선 그의 뒷모습은 어떠한가? 언제가 스러지고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 그는 우리에게 무적으로 보인다. – 우다영(소설가)
“훌,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 <훌>, 배수아, 문학동네
배수아 소설집 <훌>에 수록된 ‘훌’이라는 소설. 1판은 2006년에 나왔고, 최근 판본은 2021년의 것이며, 최근 판본을 최근에 읽었는데, ‘훌’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훌훌훌 여럿 등장한다. 훌이라는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이며 또 직장 동료이고 그 당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여럿인 것 같은데, 그 훌과의 일화들은 그러니까 15년쯤 전인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이불을 덮은 채 소설을 읽었는데, 그 15년 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듯하여, 당시의 방 구조가, 침대와 거실과 식탁이, 거기서 지내며 동거하는 훌 둘이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 그럼에도 직장에 가야 하므로 가는데, 거기서는 또 다른 훌들이 있어서 그 훌들과 겪는 그 사무실의 정경이 잘 모르지만 떠오르는 듯하여 너무나 좋았다. 마지막 문장은 공교롭게도, “훌,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이다. 나는 15년 전에 무엇을 했을까. 대학교를 막 들어갔거나 들어가기 직전. 어떤 설렘과 좌절의 풍경을 동시에 겪은 것 같았나. 그리고 나는 그때의 배수아를 자주 떠올린다. – 안태운(시인)
“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었다.” – <법 앞에서> 중 ‘굴’, 카프카, 전영애 역, 민음사
불안의 연료는 상상이다. 카프카의 ‘굴’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1923년 겨울에 창작된 유고다. 주인공 ‘나’는 오지 않은 미래와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실수를 상상한다. 이 상상은 너무나 힘이 세서, ‘나’와 굴에 영향을 미친다. 흔히 힘들 때 우리는 ‘굴을 판다’고 비유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안에서 머무른다. 거기는 불안하지만 안락하다. 두 손이나 이마로 우리는 자신의 굴을 판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괴롭힌다는 말이 있듯이, 역설적으로 굴 파기를 통해 나를 살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다. 불안에 대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산다. 그렇기에 ‘굴’의 마지막 문장을 이따금 꺼내 다시 읽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었다.” – 김복희(시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김남주 역, 문학동네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삶의 결말이 죽음이라면, 이야기의 결말은 연신 몰아치는 파도가 아닐까. ‘새들’이 굳이 해안까지 가서 죽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는 누구의 입으로도 설명되지 못한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는 마지막 문장처럼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린다. 모래 위에 새긴 글씨, 새의 깃털, 한 사람의 발자국이 파도 한 번에 해변 백지가 되어버리는 일. 하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어도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론 세상의 끝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발 딛는 모든 곳이 세상의 끝일 수 있다. 세상의 끝에서도 우리는 기어이 살아 돌아가고 만다. 행복해지리란 기대나 더한 불행이 찾아오리란 두려움과 무관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우리를 살게 한다. – 구현우(시인)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 송은주 역, 민음사
이 책은 9·11 테러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그날의 시간을 뒤로 돌릴 수 있다면’이라고 상상하며 끝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시간을 뒤로 돌리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으로 그날의 시간을 영상을 거꾸로 돌려보는 것처럼 상상한다. 그 상상 속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지하철로 거꾸로 걸어가고, 지하철은 후진하면서 터널을 지나 아이의 집 앞 정거장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면도기로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 침대로 되돌아가고, 알람이 거꾸로 울리고 꿈도 거꾸로 꾼다. 그런 다음 아이에게 와서 휘파람으로 ‘나는 바다코끼리라네’를 거꾸로 부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아이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별을 받아들이며 이별하지 않는 세계를 가정하는 아이의 목소리.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 최은영(소설가)
“로버트의 와인을 마시면서, 거기 어둠 속에 앉아, 결국은, 어쩌면 몇 시간 동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김이선 역, 문학동네
최근에 첫 번째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를 냈다. 순수하게 장편을 집필한 시간만 꼬박 2년 가까이 된다. 그 기간 동안 단편소설이나 에세이 등 다른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원고 청탁이 오더라도 장편소설 발간 이후로 미루기 일쑤였다. 결국 빚처럼 남은 단편소설 원고를 집필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고, 요즘 노트북 앞에 앉은 나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책을 내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다른 많은 소설가들처럼) 단편소설 위주의 창작 활동을 해왔는데 어떻게 이토록 생소할 수가 있을까?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단편소설 좀 추천해달라고 수소문하고 다녔고,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만났다. 그리고 이 책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단숨에 인생 소설로 등극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백수린 작가의 “앞으로 나는 도대체 무얼 쓸 수 있을까. 이 한 권의 소설집 안에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다 들어 있는데”라는 추천사가 이해됐다. 기나긴 인생의 파고를 한 문장에 압축하는 파괴력이 있는 소설이었고, 나는 조금 더 단편소설을 쓰기 힘들어졌다. – 박상영(소설가)
“그 둘은 그리고 잠시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 <북해에서>, 우다영, 현대문학
우다영의 소설 <북해에서>는 각기 다른 화자의 목소리가 유기체처럼 연결된 단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과하고 있는 주인공의 이름 ‘나선’처럼 모든 인물은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를 그린다. 북해는 그런 곳이다. 중위의 입에서 전해진 ‘오경’의 말, 그리고 ‘미림’이 낳고 기르다 죽어버린 ‘슬픈 북해의 왕’을 보며 나는 아득하지만 도처에 도사린 전쟁의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둘은 잠시 선 채 다음의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선은 계속해서 북해의 바깥을 생각했으므로. ‘한 사람을 영원히 재우기 위한 길고 부드럽게 반복되는 자장가’를 듣고 있는 나는, 여성의 이름으로 각기 다른, 전쟁의 태도를 짐작해본다. 무엇도 다 옳다. 사실 어쩌면 그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대신 이 말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고 있었다’고. – 이소호(시인)
“눈 위에 은(銀)처럼 깔려 있던 것이 그 밤의 마법이었는지 새벽빛이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채………” – <계피색 가게들>, 브루노 슐츠, 정보라 역, 길
당신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면, 그것은 살고자 함이었을 거다. 환상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흉측한 삶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만 하겠다고, 침대 위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법원에서 싸운다. 진실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면, 환상은 우리를 자꾸 달아나게 한다. 알지 못한 채로 간직하게 된 사실들은 나의 현재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까, 계피색 가게들로 즐비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진 상점 거리를 빠져나와 우리는 서로에게 겨우 라이터를 빌리고, 화면 밝기가 가장 어두운 배터리 부족한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게 삶이다. 그게 우리가 어둠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면, 나는 환상을 구원하기 위해 쓰고, 싸우는 듯하다. 그 반짝거림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내 눈부신 착각이었을지라도. – 서윤후(시인)
“유정은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 <눈으로 만든 사람> 中 ‘내게 내가 나일 그때’, 최은미, 문학동네
어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것에 이미 내포된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약도 담보해주지 않는다. 그녀가 핸들을 잡았을 때, 그것이 어떤 파국으로 이어질지 모른 채, 독자는 그저 함께 내달리게 된다. 독자의 인신을 낚아채는 이 결말을 맞을 때, 왜 그녀는 그토록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을 감당해내며 일상 속으로 투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가만히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내가 나일 그때를 짐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 박민정(소설가)
“들어오시죠, 000 00.” 그녀가 말한다. “준비 다 됐습니다.” – <디 아워스>, 마이클 커닝햄, 정명진 역, 비채
아무리 숨기려 해보아도 글에는 쓴 사람의 인성과 인격이 반영되기 마련. 그래서 어떤 종류의 소설은 무척 써보고 싶지만 나라는 인간은 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 시도조차 않는다. <디 아워스>는 그런 종류의 소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는 작품이다. 처음 읽었을 때, 좋은 부분에 밑줄을 긋다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긋는 바람에 한 권 더 사야 했을 정도로. 특히 낮은 배음(背音)으로 각기 잔잔하게만 흐르던 물줄기가 한순간에 합치되는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의 백미인데, 달리 말하자면 강력한 스포일러이므로 부득불 문장의 일부를 ‘0’표로 처리한다. 꼭 책으로 확인해보시기를. – 이현석(소설가)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이덕형 역, 문예출판사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남겼던 일기가 선명히 떠오른다. ‘화자가 뭔가를 그리워하면서 끝난다. 뻔뻔하게.’ 뻔뻔한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린드는 싫은 게 많기 때문에다. 그는 학교가 싫고, 뉴욕이 싫고, 버스가 싫고, 자동차가 싫고 사람이 싫은 16세 소년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워한다고? 여태껏 욕을 해놓고? 바로 이 점이 독자들이 홀든 콜린드에게 빠져드는 부분이다. 애당초 그는 그렇게까지 뭔가를 증오할 수 있는 캐릭터가 못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조차 홀든 콜린드답다. 그리고 이 소심한 마지막 문장으로 인해,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언젠가, 내가 미워했던 것들을 조금은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문보영(시인)
-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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