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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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긋지긋한 팬데믹 시절이 밤과 음악과 춤이 있는 황금시대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댄스 음악에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밤의 문지기들은 어떤 회상으로 버텼는지, 클럽과 스포티파이 관계자, 그리고 전설적인 트랜스젠더 등이 말한다. 

사진가 안드레아 거스키는 수평과 수직의 구도 안에 숨 막힐 정도의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유명하다. 1995년, 파티 관중을 담은 이 사진 ‘Union Rave’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6만 파운드에 낙찰된 적 있다. ANDREAS GURSKY / COURTESY SPRÜTH MAGERS / SACK, SEOUL – 2021.

2020년 3월. DJ이자 ‘나이트 라이프 프로듀서’인 프랭키 샤프(Frankie Sharp)는 뉴욕 맨해튼의 헬스 키친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임대 계약서에 서명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이 건물을 게이 클럽 ‘Q’로 개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일 뒤, 뉴욕은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나만의 클럽을 열겠다던 평생의 꿈이 무너졌습니다. 지인들 모두가 실직했고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야 하는 특성을 지닌 우리 업계도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고통스러운 시기 속에서도 돌파구를 찾으려는 숱한 움직임을 따라, 샤프 역시 차분한 ‘평화의 씨앗’을 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파트너, 반려견과 함께 숲속 오두막에서 휴식을 취하고, 온라인 검술 수업을 수강하며, 긍정의 기운을 전해주는 TV쇼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조크 스트랩을 걸친 채 춤을 추는 고고보이들, 화려한 평행봉 묘기와 백플립을 선보이는 드래그 퀸에게 둘러싸여 뜨거운 밤을 보내던 사람에게는 여러모로 생소한 취미다. 샤프는 SNS에 집에서 만든 바나나 브레드 사진을 올린 적도 있다. 그 사진을 다시 보면서 그는 ‘확신컨대 내 팔로워 2천 명이 사라지게 된 계기’라고 웃으며 말했다.

실내에 틀어박힌 채 카타르시스를 갈구하던 샤프는 웨스트웨이(Westway)와 러브건(Lovegun) 같은 클럽에 갈 수 있었던 옛 시절, 자신의 DJ 장비 속에서 심장을 울릴 만큼 강렬한 비트를 자랑하던 테크노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샤프는 도자캣(Doja Cat)의 ‘Say So’ 같은 곡을 들으며 예측할 수 없는 리듬으로 음악을 끌어가는 데서 기운을 얻었고, 빌리 아일리시의 ‘My Future’를 들으면서는 ‘팬데믹 라이프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가사가 인상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1990년대 클럽 신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디 라이트(Deee-Lite)의 1994년 앨범 <Dewdrops in the Garden>의 수록곡 선율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기기도 한다. 갈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 때, 퓨처 디스코의 리듬이 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 같아서다.

플러그 뽑힌 전 세계 나이트클럽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건 정적뿐이었지만, 당연히 음악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각자의 귀에 꽂힌 에어팟이나 홈 사운드 시스템에서는 리듬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댄스 플로어가 사람 없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해도 클럽 문화의 혁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브라질 출신 그룹 피자니냐(Pisadinha)와 1970년대 인도네시아의 가요 장르인 당둣(Dangdut)처럼 스포티파이와 틱톡 등의 플랫폼을 장악한 서브 컬처 음악의 물결도 있다. 스포티파이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부의 뮤직 디렉터를 담당하고 있는 피오나 오쿠마는 말했다. “주로 밖에서, 파티에서, 혹은 군중 속에서 울려 퍼지는 댄스 음악 시장이 팬데믹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2020년에 처음으로 했죠. 하지만 그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더군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죠.”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사태는 역설적으로 독창적인 댄스 플로어 운영의 탄탄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독일의 밤을 밝히던 화려한 불빛이 꺼지자, 선택된 자들만 만끽할 수 있다는 지상 최고의 테크노 클럽 베르크하인(Berghain)은 거대 전시관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벌거벗은 클럽 악동들과 광란의 레이브 파티 시절을 떠올려보라. 작년 11월 베르크하인은 베를린 최고의 프라이빗 아트 컬렉션을 관리하는 보로스 재단과 협력하여 1,500여 명의 클러버를 수용하던 그 공간에 예술가 117명의 작품을 전시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사람들이 몸을 흔들어대던 무대는 조각품을 빛내줄 단상이 됐으며, 세계 최고의 스피커 브랜드인 펑션원(Funktion-One)의 스피커는 설치 미술가가 만든 플라스틱 버블로 뒤덮였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모든 것이 천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런던의 클럽 패브릭(Fabric)은 영국 봉쇄 조치 기간 동안에는 ‘London Unlocked’라는 제목으로 디제잉 스트리밍 시리즈를 이어갔고, 올여름부터 금요일과 주말이면 디제잉 파티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런던의 나이트클럽인 프리지에서 즐기는 클러버들, 1989년. A NIGHT AT THE FRIDGE, LONDON, 1989.
PHOTOGRAPH BY DAVE SWINDELLS

클럽들이 문을 닫은 동안 사운드 클라우드를 차지하던 불법 음원과 리믹스 음악은 코로나19가 그러하듯 매우 빠른 속도로 전과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틱톡 역시 마찬가지다. 하우스 음악을 더욱 강렬하고 격렬하게 해석한 슬랩 하우스가 틱톡을 강타했는데, 이만벡(Imanbek)의 ‘Roses’ 리믹스 버전이 한 해 동안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다시금 주목받은 게 하나의 예다. 이 노래는 2020년 4월 한 달 동안에만 45억 번 이상 재생된 데다 곧장 프록 하우스(Prock House)라고 불리는 격렬한 록 하우스 장르를 탄생시켰다. 슬랩 하우스의 선구자로 알려진 독일의 프로덕션 듀오 비제(Vize)가 고안한 장르 이름이다. 비제는 최근 낸 싱글에 ‘End of Slaphouse’라는 제목을 붙였다.

삶에 제약이 생긴 현실이 댄스 음악에만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다. 스페인 출신 힙합 인사들은 영국의 힙합 장르인 UK 드릴을 새롭게 해석해 선보이기도 했다. 모로코 이민 1세대와 스페인에서의 삶을 녹인 가사에 허무주의적 태도를 지닌 트랩으로. ‘좀비 아포칼립스’가 현실화될 것만 같은 분위기속에서, 이미 운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몇몇 과거 트렌드가 다시 고개를 들기도 했다. 복고 경향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동유럽의 거칠고 강렬한 레이브 문화에서 파생한 빠른 템포의 테크노 스타일 음악, 하드베이스가 Z세대 오디오 애호가들의 호응 속에 뜨겁게 부활했다. 그 인기가 거대하게 치솟자 슬로바키아의 한 EDM 프로듀서는 2017년에 낸 히트곡 ‘Gopnik’의 뮤직비디오를 2020년에 만들었다.

“록다운 시기 후, 마침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안도감과 댄스 플로어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교감의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감정이 뒤얽혀 수많은 음악 속에 나타나고 있어요.” 뉴욕의 전설적인 트랜스젠더, 코니 플레밍(Connie Fleming)이 설명했다. 그녀는 ‘이벤트의 여제’로 불리는 라디파그(Ladyfag)와 더불어 한껏 달아오른 클럽의 밤을 춤 공연으로 지킨 문지기로서, 환상적인 외출을 몽땅 잃어버린 기분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디스코와 테크노의 베이스 선율은 심장 박동에 기반한 것이라 하더군요. 아기들이 엄마 품에서 잠드는 이유도 엄마의 심장 고동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디스코 박자와 심장 박동 사이에는 서로를 잇는 끈끈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휴머니즘의 일부죠.”

LGBTQ와 하위문화를 아우르는 드래그 볼 문화는 1920년대 뉴욕에서 시작됐다. A DRAG BALL IN NEW YORK CITY, 1988. CATHERINE MCGANN/GETTY IMAGES.

댄스 음악과 광범위한 공공의 위기 사이의 연결 고리는 1918년에 발병해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과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 번영과 방탕의 시기인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자동차, 싸구려 술, 짧은 스커트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플래퍼 아가씨들이 거리를 점령한 시기다. 언더그라운드 드래그 볼 문화가 나타나고, 이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 동성애자들의 나이트 라이프 부흥을 뜻하는 ‘팬시 크레이즈(Pansy Craze)’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이 밴드 리더로 공연하던 할렘의 코튼 클럽 같은 명소에서는 해가 뜰 때까지 음악과 춤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나이트 라이프의 명소에서는 1920년~30년대를 주름잡은 블랙 재즈 명곡이 울려 퍼졌다. ‘파티’라는 단어는 미국의 시인 E.E. 커밍스가 1922년에 쓴 어느 편지에 파리에서 어떻게 ‘먹고 즐겼는지’를 설명할 때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 후, 에이즈가 유행한 초기 시절 댄스 음악은 급진적이고 사회 정치적 운동 성향을 띠었다.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의 ‘Relax’ 같은 퀴어 댄스 팝과 브론스키 비트의 ‘Smalltown Boy’가 골목마다 울려 퍼지고, 샌프란시스코, 런던, 뉴욕의 나이트클럽은 동성애 혐오에 시달리거나 인종 차별적 의료 시설에서 무시를 받았던 게이, 마약 중독자, 트랜스젠더를 위한 임시 보건 대응국이 됐다. 그 시절 코니 플레밍은 선구적인 트랜스젠더 모델이자 다운타운 뉴욕 클럽의 셀렙이었다. “공동체와 공동체를 잇는 문제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네요.” 플레밍이 회상하며 말했다.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댄스 클럽은 사람들을 만나고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었어요.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 열매를 맺는 곳이었죠.”

무대에서 브레이크 댄스 중인 인물, 1986년. BREAKDANCING AT LEGENDS, LONDON, 1986. PHOTOGRAPH BY DAVE SWINDELLS.

스포티파이의 뮤직 디렉터 피오나 오쿠마가 말하길,코로나19 시대의 댄스 문화는 ‘도피주의와 낙관주의’ 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남아프리카 하우스 뮤직 리듬과 재즈 악기가 산뜻한 조화를 이룬 스타일을 일컫는 아마피아노(Amapiano)의 현대적 사운드에서 그는 과거 남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장르인 크와이토(Kwaito)를 떠올린다. 크와이토는 시카고 하우스 장르 개척자들이 연주할 법한 하우스 뮤직에 아프리카 특유의 분위기를 불어넣은 음악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언더그라운드 레이브 문화가 퀴어와 흑인 하위문화를 연결하고, 남아프리카의 잔혹한 국민 정권을 향한 젊은이들의 저항심이 들끓던 1990년대에 남아공 흑인 거주 구역에서 발달했다. “댄스 음악은 힘든 시간 속에 피어난 긍정주의나 소망과 뗄 수 없는 관계죠.” 오쿠마가 덧붙였다.

댄스 플로어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찰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만, 음악은 이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신 접종과 사회적 거리 두기가 종료되고 광란의 1920년대와 같은 쾌락주의 시대가 다시 온다면, 프랭키 샤프와 그의 플래퍼 군단은 새 시대를 버선발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클럽 ‘Q’는 보건 당국의 주의를 받은 직후 어쨌든 문을 열었다. 샤프가 말한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던 팬데믹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축하해야 마땅한 일이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날, 그 승전 행사는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열려야 합니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ALEX HAW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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