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수혁이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관찰한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단단한 그의 진심이 빛처럼 투명하게 통과한다.
오랜만의 화보 촬영이다. 그동안 어떤 리듬으로 일상을 보냈나?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최근 한 달 동안은 새로운 영화에 캐스팅되어 촬영 준비를 하며 지냈다. 잠깐의 공백기를 지나오면서 오히려 연기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더 커졌다. 빨리 영화 현장에 나가고 싶었다. 운이 좋게 유하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에 합류하게 되어 행복하게 일을 하고 있다.
유하 감독은 대중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배우들에게서 낯선 면면을 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다. 우선 슬픈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감독님께서 캐스팅 오디션 전까지 나에 대해 잘 모르셨다 (웃음). 나름 모델부터 시작해서 10여 년 동안 일을 해왔기에 잠깐 충격을 받았으나 감독님과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작품 수도 많아지면서 점점 대중에 다양한 얼굴을 보여드리고 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꼭 좋은 배우로 각인되고 싶다.
영화 <파이프라인>은 지하 땅굴에 숨겨진 기름을 훔쳐 인생 역전을 꿈꾸는 도유범들 이야기다. 서인국이 맡은 핀돌이 역에 대적하는 ‘건우’역으로 등장한다고? 건우는 개인적인 아픔도 있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고교처세왕>으로 함께 호흡을 맞춘 (서)인국이 형과 오랜만에 현장에서 다시 만나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다. 형이 먼저 캐스팅되었는데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줘서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입고 있는 흰 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영화 첫 대본 리딩 사진에 서도 본 것 같다. 같은 옷이 집에 다섯 벌 정도 있다.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많이 사두는 편이다. 이제 트렌드보다는 클래식한 것이 좋아지는 나이니까.
옷장에 딱 세 벌만 남겨야 한다면 어떤 아이템을 두고 싶은가? 청바지, 흰 셔츠, 추리닝?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웃음)?
모델 출신의 배우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순간을 지나 한결 편안하고 단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2년 동안 굉장히 평범하고 조용 한 삶을 살았다. 조금 쉬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화해 나를 바라본 시간을 가진 셈이다. 17세에 데뷔해서 바쁘게 일하다 보니까 스스로에 대해 생각 할 시간이 부족했다. 사실 자신을 3인칭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오그라들기도 하는데 (웃음) ‘이수혁이라는 사람은 뭘까?’ 고민하며 새롭게 정체성을 탐구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나를 왜 좋아해줄까? 이런 원초적인 생각도 들더라. 팬들에게는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만큼 더 성장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초반에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를 주로 맡았다. 해파리 유령과 소통했던 서퍼(<이파네마 소년 >), 우주에서 온 뱀파이어(<뱀파이어 아이돌>), 비밀스러운 남자 귀(<밤을 걷는 선비>) 등등. 그러다 <운빨로맨스>의 최건욱, <우리집에 사는 남자> 권덕봉처럼 동네 어디에선가 만날 법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했는데 연기 스펙트럼에 대한 고민과 변화의 과정이 있었나? 특이한 성향의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던 시절에는 평범한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또한 내게 있는 좋은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일리 있는 사랑> <고교처세왕>을 기점으로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한편으로는 배우로서 조급함도 느끼고 있다. 다양한 역할을 통해 대중에게 괜찮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5년째 말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이 있다. 청춘물을 이제는 좀 찍어야 하는데, 곧 찍을 수 없는 나이로 넘어가서. 모든 감독님들께 간곡히 요청합니다(웃음).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20~30대 청춘의 이야기를 한 번은 꼭 찍고 넘어가고 싶다.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을 해왔는데 그 가운데 배우로서 고민이 가장 컸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작품이 있나? 드라마 <일리 있는 사랑>을 찍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한지승 감독님은 드라마와 영화 둘 다 연출하신 분인데, 당시 서로 대화를 많이 하며 촬영했다. 미묘한 손 떨림과 눈빛까지도 섬세하게 잡아내는 분이셨다.
이수혁만의 고유의 이미지를 파괴하거나 전복시키고 싶은 갈망도 있는 편인가? 변화에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유하 감독님께서도 내 출연작 가운데 <동네의 영웅>이라는 드라마를 좋게 봐주셨다. 거기서 내가 엄청 망가지고 편하게 연기하는 모습으로 나오거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배우로서는 가장 좋은 것 같다.
모델 시절과 비교해서 몸의 변화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모델 일을 할 때는 마른 이미지의 대표 주자였다. 일을 잘하려다 보니 그렇게 마른 몸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장점인 시기였고. 그러다 어느 순간 캐릭터의 폭을 넓히고 싶어서 살도 찌우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몸이 늘 그렇게 완성된 상태는 아닌데…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은 것 같아서 그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한다. 나도 평소에 맛있는 음식 먹는 것 좋아한다(웃음).
일상과 현실을 살아가는 이수혁이란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 예를 들면 저축을 열심히 한다든지 청소나 빨래와 같은 집안일을 살뜰히 한다든지 요리를 즐겨 한다든지. 지금 언급한 모든 것을 다 하며 산다. 저축은 조금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웃음).
로봇, 무선조종차, 프라모델 비행기처럼 뭔가 조립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조금 의외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뭔가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레고 조립도 즐겨 하고. 옛날에 잠깐 화실 다닐 때는 조각도 좋아했다.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친한 어느 동료 배우가 말하길 “머리가 좋다, 아이큐가 아주 높은 것 같다. 정리정돈 잘하고, 생각보다 차갑지 않고 되게 정이 있다. 얘기할 때도 안 듣는 척하면서 다 기억한다. 진짜 비상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계획도 잘 짜고 혈액형이 AB형인데 A형처럼 계획을 짜는 스타일이다”라고 이수혁을 평가하더라. 여기서 반박하고 싶은 내용도 있나? 영광이 형 계좌 번호가 뭐였지(웃음)? 아마 형이 인터뷰 때 한 말 같은데 오랜만에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다. 너무 감사하다. 반박은 안 하겠다.
두 사람은 평소 자주 만나는 편인가? 영광이 형과는 모델 시작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만나서 운동도 자주 하고 게임도 한다. 얼마 전에도 형 손에 이끌려 억지로 농구를 했다(웃음). 한 살 많은데 말만 형이라고 하고 친구처럼 지낸다. 형도 지금 한창 영화 촬영 준비 중인데 최근 2년 동안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영광이 형은 평생 좋은 친구이자 동료다.
비공개 인스타그램 계정을 따로 운영하던데 올라와 있는 17개의 사진이 궁금하다. 별거 없다(웃음). 지금 보여드릴 수 있다. 원래 사진을 잘 안 찍는 편이다. 날씨 사진을 올렸다 지우기도 하고. 영화, 패션, 뉴스 등 1천여 개 계정을 팔로하고 있는데 새로운 소식을 보고 공부하기 위한 용도 정도다.
평소 영화를 공부하듯 부지런히 집요하게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엠디비 사이트를 애용한다.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의 약자로 알고 있는데 사이트에 들어가면 전 세계 모든 영화, 감독, 배우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거기 순위에 있는 건 다 봤다고 봐도 된다. 원래 영화를 볼 때 감독의 필모그래피 위주로 찾아보는 편인데 누군가에게 꽂히면 그 사람의 작품을 쭉 다 찾아서 보곤 한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요즘에는 넷플릭스에 촬영 기법이 뛰어난 훌륭한 다큐멘터리도 많이 올라와서 그런 작품도 즐겨 본다. 영화를 볼 때 촬영 기법이나 색감을 눈여겨 보는 편이다.
유튜브에 이수혁을 검색하면 ‘설레는 영상’이라는 키워드가 자동 완성된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거나 꿀 떨어지는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영상이더라. 본인이 누군가에게서 설렘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자기 일을 잘 해낼 때가 제일 멋지지 않나? 혹은 자기 가족이나 지인을 잘 챙기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남자든 여자든 어떤 사람이 가장 멋져 보일 때는 주변을 잘 챙기고 일 역시 잘할 때인 것 같다.
김윤석, 문소리, 하정우, 이정재 등 연출 혹은 제작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배우들이 있다. 언젠가 연기 너머의 영역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 연출을 해보고 싶다고 했던 건 어릴 때 뭣도 모르고 했던 말이다(웃음). 연기도 뭘 모르고 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어렵다. 알면 알수록 힘든 작업이다. 그래도 하는 까닭은 현장에 가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사랑했다. 꼭 내가 배우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좋은 영화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자 인생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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