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휴양지, 자메이카 포트 안토니오

이채민

가능한 한 자주, 멀리, 오래 여행하는 건 여행가만의 특권일까? 미니멀리즘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여권을 채우는 스탬프 수만큼은 차고 넘쳐야 행복할 것이다. 발목을 잡는 현실을 겨우 벗어나서 맞닥뜨린 세상이 관광객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또 다른 현실이 되고 만다. 이제 소개할 여행지는 현실보다 꿈에 가깝다. 시간이 느긋하게 흐르며 인심도 넉넉한 자메이카의 포트 안토니오. 낯설어서 더 그리운 장소를 꿈꾸는 일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며, 낯선 곳의 일부가 되어 그 세상을 흠뻑 누리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정수다.

이스트 윈드 코브의 모든 객실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다.

이스트 윈드 코브의 모든 객실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다.

달이 거의 차올랐다. 머리 위에서 개똥벌레가 반짝이며 날아다니다가 이내 별빛과 섞였다. 가까운 산호 해변에서는 파도가 쓸려왔고, 조각품처럼 생긴 맹그로브나무의 밑둥을 덮었다. 나는 포트 안토니오(Port Antonio)의 호텔 이스트 윈 드코브(East Winds Cove)에서 주인장인 로니 앨머스트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자메이카인이다. 나는 야한 농담을 유쾌하게 잘하는 앨머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뉴욕에 살던 그녀는 1950년대에 지어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지금의 건물에 자리 잡기까지의 여정을 들려줬다. 사무실로 쓴다는 대형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뉴욕에서 가져온 짐이 가득했다. “사실은 아일랜드 레코드사의 설립자인 크리스 블랙웰이 1991년에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우리는 짧게 사귄 사이인데, 그가 새해맞이로 날 이리 초대했죠. 그때 한 친구가 ‘프랑스인의 만’이라고 불리던 데에 함께 가자고 해서 가봤는데… 이럴 수가!” 여기서 프랑스인의 만이란 이곳에 있던 호텔 이름이다.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동네 주민.

여유롭게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동네 주민.

물론 포트 안토니오에 홀딱 반한 방문객이 그녀가 처음은 아니다. 수도인 킹스턴에서 북동쪽으로 3시간 거리에 있는 포트 안토니오는 바나나 무역이 왕성하 던 19세기에 생겼다. 지금은 양철 지붕을 얹은 가게와 황폐한 판잣집, 유독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맨션 사이로 비포장도로의 먼지 바람이 부는 동네다. 고요한 판잣집 마을, 숲으로 둘러싸인 물이 깨끗한 내포, 쓰러져가는 해변 바,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등이 항구 주변에 있다. 유명 호텔과 서구화된 자메이카 문화가 섞인 다른 도시보다는 훨씬 느긋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어느 마을 주민은 평생 문을 한 번도 잠근 적이 없으며, TV는 늘 베란다에 놔두었다고 말했다. 이 색다르게 편안하고 나름 시크한 분위기 때문에 포트 안토니오는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칵테일>이나 1945년 작 <클럽 파라다이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클럽 파라다이스>의 주연 배우 에롤 플린은 이 동네를 일컬어 ‘지금껏 만나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1940년대에 폭풍을 피해 요트를 정박했다가 이 섬에 반해 땅을 구입했다. 아직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땅은 여전히 그의 가족 소유다. 비록 미망인이 2014년에 사망해 미래가 확실 치는 않지만. 이후 다른 스타들도 이 섬을 방문했고, 포트 안토니오는 곧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등의 스타가 조용히 숨어서 쉴 수 있는 곳이 됐다. 1957년,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곳도 바로 포트 안토니오다. 영국 여왕은 1968년에 이곳을 방문했다. 당시에도 해변에서는 화려한 하우스 파티와 요트 파티가 자주 열리곤 했다. 그 시절 셀렙들은 아름다운 모래사장과 정글이 우거진 해변을 품은 블루 마운틴 군도를 따라 느리게 요트를 타며 행복한 휴양을 즐겼다. 그리고 좀 특이하게도, 이곳은 아마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무는 동안 호텔 안에서 누리는 요금 일체가 숙박 비용에 포함되는 호텔이 생긴 지역일 것이다. 그게 일반적인 숙소와 다른 ‘프랑스인의 만’의 매력 중 하나였다. 숙박 비용만 내면 추가 지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독채 빌라의 집합.

포트 안토니오를 찾는 여행객이 배를 타고 나가면 마주치는 몽키 아일랜드. 물론 섬에 원숭이는 살지 않는다.

포트 안토니오를 찾는 여행객이 배를 타고 나가면 마주치는 몽키 아일랜드. 물론 섬에 원숭이는 살지 않는다.

196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기사에 따르면, 로버트 코란은 단 한 푼도 더 쓸 필요 없이 모든 것을 소비하는 것의 재미에 관해 썼다. 그는 묘사하길, 샴페인을 상자째 마시고, 그의 아내는 독일산 수입 맥주로 머리를 감고, 뉴욕에 남아 있는 아이들과 깨끗한 통화 품질로 장거리 통화를 한다거나, 두꺼운 스테이크를 드라이 마티니와 함께 즐긴다고 적었다. 그런 생활을 누리던 작가는 점점 고요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단순한 리듬을 즐기기 위해 최상급의 서비스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매일 샴페인을 마시며 축제 같은 시간을 보내기보다 비오는 날이면 집 안에 앉아 책을 읽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듣거나 하는 일상으로 옮겨갔다.

 위니프레드(Winnifred) 해변에 놓인 서프보드.

위니프레드(Winnifred) 해변에 놓인 서프보드.

앨머스트의 가족은 이 동네에 연고가 있었다. 엄마는 포트 안토니오에 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지역 병원을 지었다. 그녀 역시 이곳을 더욱 자주 방문하기 시작했다. “포트 안토니오의 어딘가를 사고 싶었죠. 나는 이 동네의 자유를 사랑했어요.” 오랜 조사 끝에 그녀는 결국 이스트 윈드 코브를 찾아냈다. 약 25년 동안 버려진 해변가의 호텔이었다. “처음에는 집으로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무례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녀 는 호텔이면서 동시에 호텔이 아닌 곳을 만들고자 했고, 윤리적인 마음가짐, 지역 주민 고용하기, 친절한 손님 접대, 자메이카 문화 홍보 등 자신만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묘사된 그 느낌을 이스트 윈드 코브 스타일에 녹이고자 했다. “저는 뉴욕의 보워리, 자메이카의 스트로베리 힐, 빅서의 포스트 랜치 여인숙처럼 제가 사랑한 공간을 모델로 삼았어요. 매우 직관적으로 내 집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나름 영리하게 움직였죠.”

나는 라임나무와 삼나무가 있는 해변으로 향했다. 망가진 채로 복원되지 않은 더블룸에는 보헤미안식으로 꾸민 응접실과 지역 고유의 식물을 키우는 식물원, 염소 헛간이 있었다. 해안선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객실에는 각각 작은 프라이빗 정원이 딸려 있다. 침대에서 과일을 딸 수 있게끔 디자인한 객실도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통유리로 된 창을 통해 바다코끼리와 돌고래와 별을 볼 수 있다면 환상적이지 않은가? 단순하고 비교적 저렴하게 누리는 즐거움, 푸른 하늘과 바다, 아늑하게 불어오는 바람, 반달이 걸려 있는 야자수와 흰 백사장… 이러한 것을 경험하면 물욕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밥 말리의 노래 가사에 영감을 받아 ‘사랑의 오두막’이라는 콘셉트를 부여한 이스트 윈드 코브의 객실.

밥 말리의 노래 가사에 영감을 받아 ‘사랑의 오두막’이라는 콘셉트를 부여한 이스트 윈드 코브의 객실.

자메이카의 레게 리듬이 호텔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는 밥 말리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우리는 내 싱글 침대를 보금자리로 함께 쓰게 될거야’라는 가사를 생각하면 항상 많은 것이 떠올라요. 그게 바로 사랑의 오두막(Love Shack)이라고이름 붙인 객실의 비하인드 스토리죠. 정부에서 지원한 함석 지붕에 나무를 재활용해서 지었어요.” 이 객실 디자인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머물던 정착촌의 한 임시 가옥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 그 점에 대해 그녀는 다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고생하는 이들의 일상을 로맨틱하게 받아들이는 게 나쁘다는 점은 알아요. 하지만 이건 굉장히 급진적인 일이기도 해요.” 호텔에서는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빈티지 물건과 나폴레옹 시대 재봉사의 마네킹, 모코로산 러그, 쳇 베이커와 브루스 웨버의 오래된 사진, 골동품 야전용 소파 등을 마주칠 수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아델의 사운드 믹싱을 담당하기도 했던 앨머스트는 ‘음악 산업에서 일했던 호텔리어들의 모임’에도 들었다. 음반 제작자인 존 베이커가 디자인한 레코딩 스튜디오 ‘지잠(Geejam)’은 이 모임 소유의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고릴라즈는 지잠에서 데뷔 앨범을 녹음했고, 미아는 내가 방문하기 직전에 스튜디오를 떠났다고 한다. 존 베이커 역시 그의 스승이자 앨머스트의 옛 남자친구였던 블랙웰로부터 이 섬을 소개받았다. “산으로 둘러싸인 포트 안토니오는 자메이카의 다른 지역보다 방문하기 까다로운 편이에요. 하지만 수풀이 우거진 작은 언덕과 아름다운 카리브해를 보고 있으면, 여긴 정말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죠.” 존 베이커는 큰 도시에 있다가도 포트 안토니오에 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음악 일을 한다. 이곳은 뉴욕이나 마이애미와 비교적 가깝기 때문이다.

동네의 끝자락에 가면 드디어 자연이 펼쳐진다. 주도로를 벗어나 열대 우림 속으로 들어가자, 나무 위에 판자로 지은 건물 네 채가 전부인 캐노피 하우스라는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포도나무에 둘러싸인 초록색 건물은 홀로 안락하게 숨기 좋은 디자인이다. 인테리어는 식민지 시대풍이라, 천천히 돌아가는 빈티지 천장 팬에 그 지방의 나무로 만든 네 기둥이 달린 침대가 놓여 있는 식이다. 객실 을 본 순간, 당장이라도 이사를 감행하고 싶었다. 캐노피 하우스에서 일하는 뱃사공은 전직 권투선수였다고 한다. 나는 그와 함께 호텔 아래쪽에 있는 한적한 해안가에서 에메랄드색으로 덮인 작은 섬 사이를 돌아다녔다. 리오그란데의 여울을 타고 다녔는데, 정글의 덩굴이 꽃과 어우러져 있거나 주민들이 여유롭게 숭어 낚시를 하고, 둑 위로는 까마득한 산이 솟아 있는 등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광경이 이어졌다. 얼음장 같은 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한참 헤엄치다 보니 둑 위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뗏목을 타며 일하는 배고픈 사람을 위해 산에 있는 집에서부터 닭고기 스튜와 제철 채소를 챙겨서 매일 성지 순례하듯 이곳에 온다고. 스치는 사람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는 이야기조차 포트 안토니오의 아름다움에 기여했다. 최근 이 지역의 저택을 사들인 한 사람은 호텔은 고사하고 두 번째 집을 사겠다고 생각해본 일이 전혀 없는 이였다. 그러나 그 역시 저택을 호텔로 개조하고 있다. 놀러 왔다가 반해 호텔 주인으로 자리 잡은 앨머스트와 닮은꼴 이야기. 그가 남긴 마지 막 말이 바로 내가 하고픈 말이다. “당신은 이곳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곧 당신의 모두를 이곳에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Ondine Cohane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JULIEN CAPMEIL

More Like Thi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