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재단된 슈트 한 벌의 힘은 어떤 패션 아이템보다 강력하다.
모든 패션 매거진이 ‘놈코어’를 대서특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음으로 ‘유스 컬처’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꽤 오래 데님 팬츠와 스니커즈, 티셔츠와 스웨트셔츠를 비롯한 베이식한 아이템과 스포츠웨어가 가지각색으로 변형되며 런웨이를,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그리고 일상을 지배해왔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이번 시즌에도 쉬이 수그러들지 않을 기세다. ‘STAFF’ 티셔츠와 데님 팬츠가 기가 막히게 잘 팔리고 있는 베트멍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 슈프림과 루이 비통의 협업 제품은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품절되었으며, 재치 있는 믹스 매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화두니까.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신선한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 ‘주체적인 여성’과 ‘여성의 힘’이 화두가 된 세계적인 조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패션 월드에서도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가운데, 디자이너들이 다시금 ‘파워 우먼’이 각광받던 1980년대 말~1990년대의 시절처럼 ‘여성의 슈트’에 촉각을 곤두세운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 2017 F/W 패션위크가 끝나자마자 미국 를 비롯한 유수의 해외 매체들이 빅 트렌드 중 하나로 ‘팬츠 슈트’를 꼽은 것만 봐도, 이는 자명한 사실이다.
이의 선봉에 선 디자이너는 역시나 동시대 여성의 욕구를 늘 한발 먼저 대변해온 셀린의 피비 파일로다. 실용적인 동시에 모던하고 멋진 테일러드 착장이 장기인 이 디자이너가 최근 1년간 선보인 네 차례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다양한 팬츠 슈트, 재킷을 변형한 셔츠 등 상의와 팬츠를 앙상블로 매치한 룩들이 빠짐없이, 그것도 꽤 높은 비율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셀린의 이번 F/W 런웨이에 등장한 살짝 낙낙한 실루엣의 베이식한 슈트는 빅토리아 베컴과 라프 시몬스의 캘빈 클라인 런웨이에 등장한 슈트와도 맥락을 같이하는데, 1990년대가 연상되는 이러한 무드는 이번 슈트 트렌드의 가장 큰 축인 동시에, 데일리 오피스 웨어로도 활용도가 높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넓은 선택의 가짓수도 존재한다. 프라다의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번 시즌 1970년대 디스코풍 슈트를,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는 빈티지 무드가 묻어나는 체크 패턴의 구조적인 슈트를,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오리엔탈풍 자카드 슈트를, 포츠 1961의 나타샤 차갈리는 아방가르드한 절개가 도드라지는 슈트를 내놓은 것.
그러나 막상 슈트를 입고자 마음먹어봐도 상하의가 세트로 이루어진 포멀한 테일러드 룩이 트렌드 전방에 등장한 시절은 꽤나 오래전이기 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 성인이 된 세대에게 이는 적잖이 어려운 아이템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땐 슈트의 상하의를 각각 따로 활용해 이에 익숙해져 보면 어떨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에디터가 그러했듯 재킷은 익숙한 데님 팬츠와 셔츠의 조합에, 팬츠는 편안한 스웨트셔츠와 스니커즈의 조합에 활용하다 보면, ‘슈트’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이를 제대로 갖춰 입고 늘 10, 20대 초반의 청춘과 별다르지 않은 옷차림으로 마주한 거울 앞에 선 순간, 깨닫게 될 것이다. 엄연한 사회인인 스스로가 이제까지 힙합, 스트리트 코드, 그리고 유스 컬처로 이어지 는 유행에 젖어 놓치고 있었던 ‘성숙한 차려입기’의 힘과 즐거움에 관해.

1920년대 가르손 룩 무드의 헤드밴드는 미우미우 제품. 가격 미정. 소매 끝부분의 긴 스트링 장식이 특징인 재킷은 닐 바렛 제품. 가격 미정. 배기팬츠는 셀린 제품. 가격 미정.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이경은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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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 하현재
- 헤어
- 이선영
- 메이크업
- 오가영
- 어시스턴트
- 이지언, 최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