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서 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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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원했던 만큼 두려운 도전이기도 했던 <위키드>를 거치는 동안 옥주현은 뮤지컬 배우로서 한 계단 더 올라선 듯 보인다. 초록색 마녀로서 반년간 비행을 한 뒤 이제는 현실로의 착륙을 준비 중인 그에게 무대 위에서 경험한 매혹과 마술에 대해 물었다.

<겨울왕국>에 ‘Let It Go’가 있었다면 뮤지컬 <위키드>에는 ‘Defying Gravity(중력을 넘어서)’가 있다. <오즈의 마법사>를 초록색 마녀의 시점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다름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차별에 맞선 투쟁이라는 날카롭고 무거운 이야기를 화사한 판타지 동화의 포장 안에 담아낸다. 동경하던 마법사가 위선적인 정치가였음을 알게 된 엘파바는 차라리 그의 적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이 노래를 부른다. 빗자루를 탄 채 공중으로 솟구치면서 불덩이 같은 감정을 쏟아내던 옥주현은 과연 기억할 만한 장면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노력과 실력으로 극복해온 그녀 덕분에 지난 반년간 이 캐릭터는 특별한 설득력을 얻었다. 두꺼운 분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꼼꼼하게 얼굴을 가렸지만 관객들은 무대 위의 배우에게서 벌거벗은 것처럼 솔직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5월 초에 환상적이었던 여정을 일단락하게 될 옥주현이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록색 물감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했다.

가죽 소재의 튜브톱 미니 드레스는 펜디, 스웨이드 소재의 샌들은 구찌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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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 <위키드> 공연을 마친 뒤 촬영장에 온 것으로 안다. 오늘의 무대는 어땠나?
좋았다. 매번 감동적이다.

그래도 무대마다 편차는 느껴지지 않을까? 오늘은 특별히 잘한 것 같다거나 혹은 아쉽다거나.
물론 늘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좋았다는 게 내가 잘했다는 뜻은 아니다. 무사히 끝나기만 해도 그냥 감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좋았다는 이야기다. 공연은 곧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함께 모여 감정을 공유하는 사건 자체가 기적 같다고 생각한다.

이틀 뒤 <위키드> 한국 공연의 100회째 무대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5월 초에는 반년간 이어진 출연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 작품은 어떤 경험이었나?
이 이야기에 들어와서 사는 것 자체가 꿈 같았다. 작품의 분위기 때문인지 매번 환상의 세계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연습은 정말 힘들고 고됐는데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지나가버렸다. 기다려주지 않는 순간들을 떠나보내고 나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순간 한 순간 매듭을 잘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공연이 결정되기 한참 전부터 공공연하게 주인공 엘파바 역할에 욕심을 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키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일단 굉장히 재미있다. 하는 사람은 진짜 힘든데 관객은 그걸 모를 정도다. 완전히 그 안에 빠져서 보게 되니까. 다름과 차별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접근하기 쉽게 판타지풍으로 다룬 것도 매력적이다. 결과적으로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가 된 듯하다. 음악이 훌륭한 건 물론이다.

관객으로 <위키드>를 처음 본 건 언제였나?
약 8년 전이다.

보자마자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던가?
아니다. 내가 활동을 하는 동안에 혹시라도 한국 공연이 성사된다면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 그 정도였다. 내 거라고는 감히 생각 못했다.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놀랐다. 옥주현 정도의 이름값이라면 그런 절차는 생략할 줄 알았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에게 제작사가 미리 귀띔은 해준다. “이런 작품을 들여올 건데 관심 있으시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게 결국 오디션에 지원하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위키드> 캐스팅이 진행되던 당시 내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너무 만나고 싶었던 사람 앞이라 오히려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지 않나?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겁이 나서 포기할까 하다가 아무튼 감기까지 걸린 상태로 오디션장을 찾긴 했다. 그러고는 연출을 맡은 리사 리구일로 앞에서 실망만 안겨줄까 봐 걱정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시간 정도를 함께 보냈는데 편한 자세로 목을 풀 듯 노래를 하도록 하거나 가볍게 대사를 읊으라고 주문하시더라. 그분이 신기한 게 다른 나라 언어를 듣고도 발음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전달력은 충분한지 등등을 다 간파하신다. 터프하고 예리하고 무섭고 여우 같기도, 한편으로는 호랑이 같기도 한 분이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엘파바를 갖고 있어.” 그렇게 합류하게 된 거다. 개인적인 자존심과 상관없이 한국판 <위키드>의 주연이라는 부담감이 컸다. 한국 배우가 오리지널보다 한참 못하다는 말을 들으면 속이 많이 상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욕심을 냈는데도 막상 그 앞까지 닿으니까 오히려 한발 물러서게 되더라.

물론 배우에게는 매 작품이 중요한 의미일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키드>가 각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면?
많은 작품을 거친 뒤에 이 이야기를 만난 게 다행스럽다. 경험이 쌓이고 무대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작품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고 또 마음이 짠하다.

섬세한 비즈 장식의 보디수트는 맥&로건, 검정 테일러드 재킷은 올세인츠 제품. 샌들은 옥주현 본인 소장품.

섬세한 비즈 장식의 보디수트는 맥&로건, 검정 테일러드 재킷은 올세인츠 제품. 샌들은 옥주현 본인 소장품.

핑클 시절부터 옥주현은 정해진 동작에 맞춰 예쁘게 노래하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표현하고 싶은 감정과 발산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남들보다 많은 사람 같았다고 할까? 그래서 지금 서 있는 뮤지컬 배우로서의 자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몇 시간이나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그 사람의 감정을 또 다른 배우나 관객과 주고받는 묘미가 엄청나다. 그런 드라마틱한 경험이 감동적이고 또 매력적인 것 같다. 가수로서 앨범을 냈을 때도 내 노래를 사람들이 차나 집, 혹은 그 밖의 공간에서 듣는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그런데 심지어 짧지 않은 시간과 큰돈을 들여 한자리에 모이고 나와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려 한다면? 기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2005년에 <아이다>로 데뷔를 했을 때만 해도 아이돌 가수 출신의 뮤지컬 진출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감수해야 했던 시선이 있었을 거다.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력이 쌓일수록 당시의 우려를 이해하게 된다. 같은 직업군처럼 보이지만 가수와 뮤지컬 배우는 굉장히 다르다.

어떤 점이 그렇게 다른가?
맞춰야 하는 호흡의 규모부터가 그렇다. 아무리 내가 한때 그룹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르다. 오케스트라 60명에 배우도 30명 이상이고 그 외의 스태프가 또 30명쯤 된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대 위 혹은 뒤에서 뭉쳐야 하는 거다. 혼자 컨디션이 좋다고 공연이 잘되는 것도 아니어서 서로 아귀를 잘 맞춰야 한다. 함께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어내는 일 같다. 나도 예전에는 음악 방송이나 뮤지컬 무대나 별 차이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겪으면 겪을수록 다르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조심스러워졌다. 무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시간이 필요하고 거기서 오는 깨달음도 있어야 한다. 방송 출연을 병행하는 아이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연습에 불참하는 경우가 생긴다. 당사자들도 안타까워하지만 진짜 속이 타는 건 같이 극을 만들어야 하는 동료들이다. 연습을 거르고도 문득 나타나 척척 잘할 수 있는 천재란 없으니까. 아무튼 뮤지컬을 할 때는 시간을 들여 사람들을 겪고, 깎여 나가고, 털어낼 건 털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게 무대는 알수록 더 무섭고 무서울수록 더 소중해지는 무언가다.

아역 배우나 아이돌에게는 잘 나이를 먹고 제 나이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숙제다. 옥주현 역시 새로운 커리어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정을 겪었을 거다. 삶에서 방향 전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
어떤 위치까지 올라서고 싶다는 식의 목표 의식은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알려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부담인 동시에 자극이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해서 그걸 책임감 있게 해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그래서 고민과 갈등이 따랐던 것 같다. 솔로 활동 때도 마찬가지였고 뮤지컬 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야 가수로서 단련해온 가창력 덕분에 연기자로서의 경험 부족은 어느 정도 용서를 받았다. 하지만 이내 ‘노래는 잘하네’를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가수는 노래를, 배우는 연기를, 그리고 뮤지컬 배우는 노래와 연기를 모두 잘해야 한다. 칭찬받을 내용이라기보다는 응당 갖춰야 하는 자질인 셈이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결과물에 대해서만큼은 만족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런 책임감은 부담인 동시에 강한 동기 부여도 된다.

<위키드>의 엘파바를 오래 바랐던 것처럼 그 외에 또 목표로 삼고 있는 역할은 없나?
없다. 꿈을 이뤘으니까 이제 끝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엘파바처럼 한 캐릭터를 오래 기다리는 건 이례적인 경우다.

워낙 자기 관리에 철저한 배우로 알려졌다. 작품에 돌입하게 되면 생활 습관부터가 평소 때와는 달라지나?
기술적인 부분이나 무대 장치야 그렇다 치고, 무대에 매일 올라가는 사람으로서 내 컨디션이 위험 요소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상태라는 게 정확한 예측이 어렵지만 최대한 안정적인 평균은 유지하려는 거다. 일단 음식 조절은 기본이다. 맵거나 체질에 안 맞는 건 절대 못 먹는다. 그랬다가는 감기가 와서 결국 노래를 못하게 된다.

몸이 예민한 편인가 보다.
맞다. 공연할 때는 더 예민해진다. 어렵지만 수면 시간도 적절히 유지하려고 하고 운동도 꾸준히 한다. 물론 공연할 때만 열심히 하는 건 아니다. 그전부터 계속 상태를 만들고 준비를 해둬야 한다. 한번 쓰고 말 게 아니라 그 체력을 꾸준히 사용해야 하니까. 바짝 쏟아내고 탈진해버린다면 제대로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다. 세포와 근육에 활동을 감당할 만한 에너지를 충전해둬야 한다. 집에서 가만히 쉬기만 해서는 안 되고 힘쓰는 법을 운동을 통해 익혀둬야 공연을 길게 이어갈 수 있다.

필라테스와 발레 스트레칭에 대한 책을 쓴 적이 있고, 곧 관련 DVD도 내놓을 예정이다. 애초에 시작하게 된 계기도 무대를 위한 준비였던 걸까?
처음에는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다 연결되는 내용이다. 내 몸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뺄 수도 찌울 수도, 그리고 유지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한때 요가를 하면서 운동이 삶의 질을 얼마나 좌우하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근육량을 좀 더 늘릴 수 있는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필라테스가 발레리노에 의해 고안된 재활 운동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발레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됐다. 운동은 평생 해야 하는 거고 그래야 생활에 지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얻은 큰 깨달음인데 혼자만 알기보다는 모두와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옥주현 하면 다이어트, 요가, 운동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지식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낀다. 실제로 내게 관련된 내용을 물어오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단시간 안에 ‘꼼수’로 이뤄지는 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예전에 꼼수를 많이 써봤기 때문에 잘 안다(웃음).

살을 빼거나 체력을 키운 것 외에 또 운동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물론 세밀하게 몸을 가다듬는 과정은 힘들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마라톤 같았던 <위키드> 공연 일정을 끝내고 나면 약간의 여유를 얻을 거다. 휴식을 위한 계획은 없나?
예전에는 공연만 끝나면 당장 여행갈 궁리를 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다. 뭐랄까, 작품이 진행 중일 때는 딴 계획에 기대감을 낭비하는 게 아깝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굳이 하고 싶지가 않다. 일단 일정부터 마무리 지은 뒤 그때 가서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해보고 또 가보려고 한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윤명섭
스탭
헤어 / 명원(보보리스), 메이크업 / 임혜경, 스타일링 / 임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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