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있고, 악기가 빚어내는 소리가 있고, 춤이 그리는 풍경이 있던 밤. 그 밤을 꿈이라 불러도 좋았다.
일상이 버석거릴 때, 우린 가끔 춤추고 노래하는 법을 잊는다. 새로운 계절에 들어설 때마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의 중요한 일과는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법을 잊어버린 임직원들을 다독여, 자신이 직접 섭외부터 진행까지 도맡은 콘서트로 잡아 이끄는 일이다. 가족, 친구, 연인을 데리고 두산웨이홀로 향할 임직원들을 위해선, 아주 가깝고도 낮은 무대를 마련해두었다. “무대와 관객석이 가까운 공연장은 가끔 있어요. 그런데 무대와 관객석의 눈높이가 이렇게 같은 공연장은 거의 없죠. 무대가 높거나, 아니면 관객석이 높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저 역시 적응할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독일에서 활동하는 소프라노 임선혜가 리허설 중인 무대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녀는 이번 여름을 위한 콘서트 <Nocturne by 3 Artists>의 세 주인공 중 한 명이다. 그 곁에선 발레리나 김주원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비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토슈즈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다. 아까부터 나긋나긋한 음성과 조곤조곤한 말투로 음악부터, 조명, 그리고 박용만 회장이 연습 중인 진행 멘트까지 꼼꼼히 체크하고 있는 노영심은 오늘 공연의 예술감독 역할을 맡아 누구보다 분주했다.
그리고 7시 반, 막 퇴근을 마치고 미처 양복을 벗을 새가 없었던 관객이자 직원도, 마치 극장에 가듯 편한 차림을 한 관객이자 직원도 웅성웅성 공연장으로 들어선다. 무대에선 세 명의 아티스트가 벌써부터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분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저희가 준비하는 모습부터 보여드릴게요.” 노영심은 뚱땅뚱땅 피아노 건반을 치고, 임선혜는 피아노 곁에서 목을 풀고, 김주원은 피아노에 기대 스트레칭을 한다. 그렇게 아티스트와 관객이 함께 준비를 마친 무대 위로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걸어 들어온다. 오직 그의 숨을 통해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울려 퍼지는 순간, 이번엔 관객의 숨소리만이 공간을 가득채운다. 아, 휴대폰 카메라로 이 순간을 기록하는 ‘찰칵’ 소리만 제외한다면. 그 무대를 이어받아 드라마틱한 음성으로 조지 거쉰의 ‘Summertime’을 노래하던 임선혜가, 후렴구가 두 번쯤 반복되었을 즈음 살짝살짝 피아노 곁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리고 그 사연은 노래가 끝난 후에야 노영심에 의해 탄로가 났다. “아까 선혜가 저에게 와서 소곤대는 거예요. ‘한 번 더’라고요.”
소리로 충만했던 무대를 이어받은 건 아름다운 몸이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 ‘Primavera Portena’를 배경으로 김주원과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영수 이영철이 선보인 무대가 한여름의 태풍 같았다면, 김주원이 국립무용단의 수석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이정윤과 호흡을 맞춘 한국적 창작 발레 ‘The One’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깊고, 또 깊었다.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프로그램을 아쉽게 짚어 나갈 때, 노영심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프로그램에 없는 깜짝 연주가 있어요. 오늘이 제덕이 생일이거든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던 정재일이 피아노 건반 앞에 앉고, 피아노를 떠난 노영심이 멜로디온 호스를 입에 물고 시작된 오늘의 축가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루이 암스트롱은 초록 나무와 빨간 장미,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어 이 세상이 참으로 멋지다고 노래했지만, 오늘 밤을 이토록 멋진 세계로 만든 건 춤과 음악, 그리고 사람과 마음일 터였다.
그리고 기어코 마지막 무대. “음악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고른 곡이에요.” 포레의 ‘시실리아’와 김광진의 ‘편지’로 그림을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전제덕을 향해 ‘생일 축하합니다’를 노래하고, 그리고 아주 긴 박수가 그 노래를 이을 때, 이제 그만 한바탕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 대신 버석거리는 일상 속에서도 춤추고 노래하는 법을 잊지 않을 수 있는 추억을 얻었으므로.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슬기
- 포토그래퍼
- 엄삼철, LEE HYUN SE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