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해 팬덤을 넓혀가는 노르딕 누아르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가장 차가운 색, 노르딕 누아르

2018-11-22T12:27:09+00:002018.11.24|FEATURE, 컬처|

고요한 순백의 설원. 거기에 똑똑 떨어지는 새빨간 피. 스칸디나비아에서 건너온 스릴러, ‘노르딕 누아르’에 빠져들 계절이 왔다. 한 달 동안 북유럽 지역을 취재하며 이 지역 콘텐츠를 은밀하게 탐색한 한 남자가 당신을 그 차가운 세계로 안내한다.

nordic

얼음 바다에서 떠오른 괴이한 시체 한 구에 아이슬란드의 작은 마을이 공포에 휩싸인다. 피오르에 배를 띄운 어부의 그물에 우연히 걸린 이것은 꽁꽁 얼어붙은 누군가의 투박한 몸통. 머리는 톱으로 잘려 없다. 사색이 된 어부의 얼굴 뒤 원경으로 항구에 정박하려는 크루즈 한 척이 보인다. 덴마크 히르트스할스항에서 출발한 배. 몸통은 필시 저기서 떠내려왔으리라. 마을 경찰은 선박 탑승자 전원을 작은 체육관으로 이동시키고 용의선상을 좁혀간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날씨가 안 도와준다. 아이슬란드 전역에 몰아닥친 심각한 눈 폭풍 탓이다. 항공편 결항으로 수도 레이캬비크의 경찰청에서 인력 지원은 당분간 불가. 마을은 하얀 눈보라 속에 점점 더 고립돼간다.

아이슬란드 드라마 시리즈 <트랩트>의 도입부다. 북유럽 범죄물, 일명 노르딕 누아르가 세계를 향해 팬덤을 넓혀간다. 누아르(Noir)는 프랑스어로 검정이지만 북유럽 누아르는 하양에 가깝다. 12월, 우리가 멀리 스칸디나비아의 스릴러에 매혹되는 이유다. 고요한 순백의 설원. 거기에 똑똑 떨어지는 새빨간 혈액. ‘빨갛게 물든 눈을 보니 왕의 어깨에 두르는 망토가 떠올랐다. (…) 엄마가 읽어주곤 했던 노르웨이 민담집 속의 삽화에서처럼.’(요 네스뵈, 〈블러드 온 스노우> 중) ‘그녀는 뒤뜰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눈의 천사처럼. (…) 눈은 그런 붉은 빛으로 물들어서는 안 된다.’(라그나르 요나손, <스노우 블라인드>’ 중)

여기서 잠깐 블랙. 얼마 전 방문한 스웨덴 스톡홀름은 커피의 천국이었다. 특히 쇠데르말름 지구의 ‘드롭 커피’와 ‘요한 & 니스트룀’은 못 견디게 좋은 원두 향으로 행인을 유혹했다. 수많은 카페 중에서 유독 커피향보다 진한 피비린내로 발길을 잡아끄는 곳이 있었으니, 쇠데르말름 북부의 ‘카페바’다.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가장 아끼는 카페. 작가 스티그 라르손(1954~2004)이 실제로 매일 <밀레니엄>의 원고를 집필하던 장소다. 국내에 노르딕 누아르 붐의 불씨가 지펴진 것은 2011년과 2012년이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소개말이다. 소설 1편이 번역 출간되고 스웨덴판과 미국판 영화가 그 무렵 개봉했다. 라르손 사후, <밀레니엄> 시리즈의 집필은 끊기지 않았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라게르크란츠는 라르손처럼 기자 출신이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로 <밀레니엄>의 불길을 이은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 역시 기자 출신이다. 노르딕 누아르 특유의 건조하지만 치밀하게 숨통을 죄어오는 하드보일드식 접근법에 퍽 어울리는 전직이다.

그러나 또 다른 스웨덴 소설가 제니 롱느뷔를 직접 만났을 때, 나는 그를 북유럽식 하드보일드의 느낌과 바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여성 수사관 레오나> 시리즈의 작가이자 라게르크란츠가 극찬하는 신예. 늘씬한 몸에 조막만 한 얼굴, 해사한 미소. 그는 10대 때 스웨덴 인기 걸그룹 멤버였다. 가수 활동과 병행해 스톡홀름 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했다. 스톡홀름의 화려한 미관, 정비된 시스템 이면에 공존하는 어둠의 뿌리가 궁금해서다. 끝내 가수를 그만두고 스톡홀름 경찰청에 강력범죄 전담 수사관으로 취업했다. 7년간 살인, 강도, 강간, 조직폭력 사건을 다뤘다. 증거 수집부터 피의자 심문까지 두루. 스웨덴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아동 포르노 사건을 수사했고, 스웨덴 TV의 생방송 공개수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직접 피의자를 심문하고 사건 증거를 수집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디테일이 있어요. 그것이 내가 다른 노르딕 누아르 작가와 차별되는 점이죠.” 제니가 말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레오나는 겉보기에는 유능한 수사관이지만 가정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도박에 손댔다가 범죄에까지 연루된다.

롱느뷔처럼 독특한 상상력의 작가가 넘쳐나는 북유럽 출판가는 범죄물의 천국이다. 스톡홀름과 오슬로 시내 곳곳의 서점을 갈 때마다 나는 베스트셀러 순위부터 둘러봤다. 범죄물이 거의 열 편 중 아홉 편꼴. 스웨덴에서는 페르 발뢰, 마이 셰발의 공저 소설인 <마르틴 베크 형사> 시리즈(1965〜1975년)가 일찍이 전편 영화화되면서 이곳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노르딕 누아르 특유의 독특한 설정과 치밀한 묘사는 영상물로 각색되기 좋은 특징을 지녔다.

일조량만큼이나 낮은 인구밀도 때문일까. 노르딕 누아르에서 단골 소재는 가족 문제다. 경찰인 동생의 범죄를 덮으려 형이 분투하고(노르웨이 드라마 <보더 라이너〉), 기이한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는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린 아들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 한다(노르웨이 영화 〈베이비콜〉). 북유럽 환상동화의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거기에 누아르의 불길한 그늘을 덧칠한 듯하다. 국경을 둘러싼 이야기도 유달리 많다. 이웃 나라와 언어, 문화가 비슷하며 교류가 많아서일까. 드라마 시리즈 〈더 브리지〉는 스웨덴 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잇는 외레순 대교 한가운데, 국경선을 깔고 누운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한다. 〈더 브리지>는 영국과 미국에서 리메이크되며 노르딕 누아르의 저력을 알린 작품. 핀란드 드라마 <보더타운〉은 러시아와 접경지대가 배경이다. 노르딕 누아르에서 용의자들은 자주 스톡홀름이나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가는 배를 타거나 덴마크, 핀란드의 국경을 넘으려 애쓴다. 부패하거나 무능한 수사관은 주로 북쪽의 눈 많은 산간 오지로 발령 나는데, 이 역시 보통 접경지대 쪽이다. 이런 노르딕 누아르의 클리셰들을 아예 중심 소재로 택한 ‘블랙코미디 누아르’도 나온다. 스웨덴 드라마〈팔렛〉에서는 영국에서 무능으로 좌천된 수사관이 스톡홀름에서 파견된 천방지축 수사관과 짝을 이뤄 스웨덴 북부의 소도시에서 사건을 파헤친다. 첫 장면은 용의자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의 3중 접경에서 우왕좌왕하는 신이다. 노르웨이 드라마 〈릴리해머〉는 미국 뉴욕의 갱 두목이 노르웨이 릴레함메르로 몸을 숨기면서 펼쳐지는 요절복통 블랙코미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오역했던가. 숲과 눈과 호수와 어둠. 북유럽은 확실히 숨을 곳이 많은 곳, 무언가 숨긴 것이 많은 곳이다.

 

내 생에 가장 스산한 음악

노르딕 누아르 드라마 특유의 비감은 대개 음악에서 먼저 나온다. 세계 최고 수준의 클래식 공교육 시스템을 자랑하듯 현악기가 주도하는 단조의 아르페지오 선율이 이곳 OST의 비공인 공식이다. <트랩트>의 음악은 영화 <시카리오> <콘택트>로도 유명한 아이슬란드 음악가 요한 요한손의 작품. OST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숲과 호수처럼 독특한 공간감을 조성하는 음악들, 노르딕 누아르를 읽을 때 틀어둘 만한 음반을 소개한다.

01

Ólafur Arnalds <For Now I Am Winter>
아이슬란드의 올라뷔르 아르날즈(Ólafur Arnalds)는 브라이언 이노의 21세기 노르딕 버전이다. 노르딕 누아르의 영향권 아래 있는 영국 범죄물 <브로드처치>의 음악감독도 맡았다. 그가 아이슬란드 곳곳을 돌며 녹음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 <Island Songs>도 추천한다. <트랩트>의 여러 에피소드를 연출한 발드빈 Z(본명 발드빈 조포니아손)가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다.

 

02

Wardruna <Runaljod Ragnarok>
노르딕 누아르의 그늘과 잔인성이 토르와 바이킹에서 내려왔다 믿는다면 노르웨이 그룹 ‘바르드루나’의 음악을 만날 때다. 드라마 시리즈 <바이킹스>의 공동 음악감독인 에이나르 셀비크가 이끄는 팀. 염소뿔 피리, 크라비크리라, 고대 하프 등 갖가지 악기를 동원해 노르웨이의 검은 숲속에서 녹음한 이 불길하고 장엄한 노래들은 차라리 종교적 의식에 가깝다. 내가 본 올해 최고의 음악 명장면은 바이킹의 옛 출정지였던 베르겐 요새에서 본 바르드루나의 콘서트다.

 

03

 

Myrkur <Mareridt>
덴마크의 뮈르쿠르는 헤비메탈의 하위 장르에서도 가장 극악하다는 북유럽산 블랙 메탈계에서조차 그 독특한 위치를 지키는 음악가다. 미모의 솔로 여가수로서 이쪽에서는 일종의 아이돌처럼 통한다. 불길한 중세풍 명상 음악의 음유, 그리고 필사의 절규. 이 둘을 오가며 오늘도 분투 중이다. 앨범 제목인 <Mareridt>를 영어로 바꾸면 ‘Nightma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