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페미니즘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지금, 페미니즘

2018-10-05T19:55:49+00:002018.10.05|FEATURE, 컬처|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의 자장이 이토록 뚜렷했던 적이 있을까? 눈뜨고 일어나면 사건과 목소리가 뒤엉켜 불어나는 요즘이다. 더욱 거세진 페미니즘 담론 속에서 세 가지 화두를 길어 올렸다. 가장 뜨겁게, 입으로 행동으로 오르내리고 있는 그 화두들.

Liquid nitrogen with exploding pink rose

탈코르셋에 눈뜨기

지난여름부터 나는 얼굴에 선크림만 대강 바르고 외출한다. 준비 시간이 10분 정도로 줄었다. BB크림이나 CC크림(사실 나는 이 크림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로 톤을 고르게 보정하지 않은 피부 상태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마침 짧게 자른 머리카락 역시 외출 준비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됐다. 안이 비치지 않는 옷을 입는 날에는 브래지어나 브라렛 대신 니플 패치를 붙이거나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가기도 한다. 그동안 이 더운 여름에 어떻게 화장을 하고, 어떻게 브래지어를 하고 다녔는지 의문스 러울 지경이다.

올해 초부터 여성들 사이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됐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여 성들이 모인 온라인 ‘여초 카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이 운동은 메이크업을 포함해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지나친 꾸밈 등 외모 강박을 부추기고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자는 움 직임이다. 여성들은 매일 정성스레 손질하거나 큰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부러뜨린 립스틱이나 쓰지 못하게 망가뜨린 화장품을 사진으로 인증하며 ‘#탈코르셋_인증’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올렸다. 꾸밈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게끔 해주는지, 얼마나 홀가분한지 여성들은 이야기 했다. 여성 단체 ‘불꽃페미액션’은 여성의 몸 또한 남성처럼 인간의 신체일 뿐이라는 취지로 상의 탈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다가 음란물로 분류, 삭제되는 일을 겪자 실제로 상의를 탈의한 채 페이스북 코리아 사옥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매분 매초 외모에 전방위적 압박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잡티 없이 매끈한 피부, 완벽하게 정돈된 화장, 군살 없는 몸매를 넘어 말랐지만 볼륨 있는 몸에만 아름답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광고는 땀 흘리는 운동을 하면서도 지워질 걱정 없는 메이크업 제품을 쓰라고 여성에게 강권한다. 화장하지 않는다면 민낯이 예뻐 보여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제모는 필수, 윤기 나는 머리카락도 기본, 손발톱도 무언가를 붙이든 바르든 예쁘게 보여야 하고 심지어 하나에 10kcal 이하라 포만감은 주지만 실제로 살은 찌지 않는다는 젤리가 식사 대용으로 유행한다. 이런 환경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살아가다 보니 여성들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외모 압박에 자신을 옭아맨다. 얼마 전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마마무의 화사와 박나래가 나눈 대화는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화사가 박나래에게 ‘얼굴이 작다’고 말하자 박나래는 ‘돌려 깎기를 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눈이 크다’고 이야기하자 ‘쌍꺼풀 수술을 했다’고 답한다. 다른 여성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인식이 여성 사이에도 퍼져 있으며, 칭찬받은 여성은 곧바로 긍정하지 못한 채 또 한 번 자신의 외모를 깎아내린다. 박나래의 성형 수술은 자신도, 주변에서도 종종 개그 소재로 삼지만 중요한 것은 성형 수술이 괜찮은가 나쁜가를 감별하는 일이 아니다. 성형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극심하게 가해지는 외모 ‘코르셋’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여성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다이어트 강박이다. 인스타그램을 잠깐만 둘러봐도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성 연예인의 전후 사진을 올리면서 ‘자극짤’이라고 하거나, 다이어트 성공 비법을 공유하는 계정이 눈에 띈다. 가끔 방송에서 여성 연예인이 다이어트하느라 괴로웠던 경험을 털어놓으면 순간적으로 화제가 되지만,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이나 반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에이핑크의 정은지는 tvN 〈인생술집>에서 다이어트약을 먹다가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으며, 에일리는 JTBC <히든싱어5>에서 체중 감량을 하다가 가창력까지 줄어든 경험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매일 이런 기사들을 접하며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부끄럽게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사람을 적게 만나고 복장을 갖춰야만 하는 일이 드문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메이크업과 제모, 브래지어 착용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내 몸에는 좀처럼 초연해지지 못했다. 지난해 꽤 많은 무게를 감량한 이후로 나는,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대략적인 칼로리를 계산하고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 후에는 몸무게를 쟀다. 겨우 0.2kg 정도만 줄거나 올라가도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나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떨칠 수 없었다. 러네이 엥겔른이 쓴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 한 여학생이 메건 트레이너의 노래 ‘All About That Ba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나와 유사한 심리를 아주 잘 보여준다. “날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노래예요. 사실 진짜 힘이 되긴 하죠. 좋은 노래였어요. 그래서 전 ‘와, 진짜 좋은 이야기다. 엉덩이가 좀 크면 어때! 그래, 엉덩이에 살이 쪄도 괜찮아!’라고 생각했죠. 그러고 나서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메건 트레이너가 좀 뚱뚱한 거예요.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했죠. ‘그래도 난 너보단 날씬해야겠어.’ ”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더는 변명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오랫동안 여성에게만 가해진 외모 ‘코르셋’의 피해자이자 동조자로서, 그것이 얼마나 여성의 삶을 납작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는 30대 여성으로서 더더욱 그렇다. 지난 7월 ‘아이돌 산업과 여성 혐오’를 주제로 강연했을 때는 초등학교 교사들로부터 ‘건강검진 때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운 여학생이 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데 다이어트하는 애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는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는 게 경쟁력이라고, 몸매는 자기 관리의 증거며 강해 보이는 메이크업은 여성의 힘을 보여주는 방법의 하나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 이제 여성은 외모를 위해 비용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모든 행위는 도리어 여성을 구속하는 것임을, 여성의 몸을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야말로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알고 있다. 몇 달 전 나는 친구들과 약속했다. 어떤 경우에도 외모를 소재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다음, 또 다음 세대의 여성은 더 이상 ‘코르셋’을 조이지 않도록, 우리처럼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글 – 황효진(칼럼니스트)

 

각자의 페미니즘이 존재한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페미니즘은 복수 명사로 그 안에 다양한 페미니즘이 공존할 수 있다.” 록산 게이는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의 역사에 정통하지도 않고, 자기 관심사와 개인적인 성향과 의견이 주류 페미니즘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즉 완벽하지 않은 페미니스트,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록산 게이의 말처럼 완벽하지 않은 페미니스트까지 넉넉히 포용한다. 페미니즘이 복수 명사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어보면, ‘단 하나의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없다’가 아닐까? 이를 페미니즘의 한계나 결점이라고 진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의 수만큼, 딱 그만큼의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페미니즘이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틀에 맞지 않다고 해서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 늘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페미니즘은 말이 안된다고, ‘틀렸다’고 말한다. 여성 혐오에 남성 혐오로 맞서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격한 표현을 쓰기 때문에, 광장으로 몰려나와 여러 차례 시위를 하기 때문에 이 낯선 상황을 우려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그’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하는 무기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그’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의 대명사로 몰고 가면서 이 문제를 크게 부풀리기도 한다.

무언가 틀렸다고 말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은 옳음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가능하기 때문일까? 지금의 소수 급진 페미니즘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차는 분 중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분들께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에 인의 장막을 치는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논점을 흐릴 뿐이라고 반박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혐오에 대한 반대이며, 성희롱과 혐오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이 말은 그간 인문학 책을 꽤 쓰신 어느 대학의 모 교수가 하신 말씀이다. 보자마자 긴 한숨이 끝도 없이 나왔다. 한국 사회의 급진 페미니스트는 극히 소수다. 그들이 페미니즘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급진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시선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이 이론적 가치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그 모습 그대로 있기를, 페미니즘은 광장이 아닌 책 속에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페미니즘이 이론 운동이 아닌 현실 운동이 되었을 때 여지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급진 페미니즘의 과격성은 비판할 수 있지만, 그들이 주로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쉽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몇몇 급진 페미니즘 운동이 과격하다고 해서 IS에 버금가는 우익 집단으로 매도해도 되는 것일까?

‘그’ 페미니즘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전략을 사용한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난하기보다는 왜 그것이 지금 여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로 초점을 이동하여 그 지점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나 또한 급진 페미니즘이 처음 등장했을 때 몹시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미러링 말고 다른 전략은 없는지 묻기도 했다. 새로 등장한 이 낯선 페미니즘이 ‘단 하나의 페미니즘’, 즉 주류 페미니즘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단 하나의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소수의 목소리지만 새로운 페미니즘이 사회 변화의 불씨가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을 때,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일범죄동일처벌’, ‘낙태죄 폐지’, ‘성폭력 가해자 엄중 처벌’ 등을 위해 다소 과격한 언어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그들만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자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느 정도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뭔가 대단한 ‘단 하나의 완벽한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현실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변화와 진화의 시간을 겪을지 모를 일이며,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숱한 빈틈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단 하나로 무리하게 엮을 수 없는 복잡한 층위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페미니즘으로 존재할 뿐이다.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구에서 성 평등을 이룬 나라는 어디도 없다. 성 평등 지수는 국가별로 교육 수준, 국민 소득, 평균 수명 등에 있어서 남녀 평등의 정도를 측정하여 발표하는 지수다. 2017년 총 144개국 중 한국은 몇 위를 했을까? 118위, 최하위 수준이다. 1위를 차지한 나라는 아이슬란드다. 세계에서 성 평등 지수가 가장 높다는 아이슬란드도 완전한 성 평등을 이루기까지 앞으로 100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그렇다면 성 평등 지수 118위인 한국은 얼마나 걸릴까.

글 – 나희영(<우먼카인드> 한국판 편집장)

 

낙태라는 질문

‘만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하면 어떡하지, 엄마가 알면 큰일 날 텐데, 절대로 못 낳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무조건 낙태해야지. 이기적이어도 어쩔 수 없어. 아기가 불쌍하지만 살고 볼 거야.’ 여성이라는 성별을 ‘임신 가능한 몸’이라는 의미와 연결 지을 수 있을 때부터, 낙태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신고할 수도, 유죄 판결을 기대할 수도 없는 폭력적인 성관계를 통해서, 남자친구가 콘돔을 쓰지 않고도 피임할 수 있다고 우겨서, 콘돔을 썼는데도 찢어져서 혹은 찢어지지 않았음에도, 불상사는 언제나 발생한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의 몸을 두려워하며, 태아에 대한 죄책감과 인생을 끝낼 수 없다는 비정한 각오가 뒤범벅된 채 늘 같은 다짐을 했다.

그렇다고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이 저주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니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낙태하겠다는 생각은 원하는 순간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꿈과 자연스레 공존했다. ‘낙태에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낙태는 성교육 수업에서 틀어주는 태아의 팔다리를 조각 내는 영상을 보며 여차하면 죄를 지은 채 살아갈 각오를 다지던 학창 시절, 종종 제시된 토론 주제이기도 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낙태하리라고 결심하면서도 찬성 측에 서는 일이 영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졌다. 불쌍한 상황에 놓여서 낙태를 꼭 해야만 하는 여성의 절박함을 늘어놓는 데 그쳤다. 반대측은 늘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여자들이 죽지는 않잖아. 아기가 죽는 일이 더 불쌍하지 않아? 그런데도 낙태에 찬성한다고?’ 나는 속으로는 응, 이라고 답하면서도 이 질문 앞에서 도저히 입을 뗄 수 없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낙태가 여성 운동의 의제라는 사실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가피하게 낙태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나 역시 낙태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여성의 권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낙태와 여성 인권이 연결되는 순간은 여성이라는 성별과 임신할 수 있는 몸이 연결되며 덜컥 겁먹던 순간처럼, 또다시 갑자기, 그리고 불시에 찾아왔다. 온라인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이슈가 본격화한 2015년 이후의 일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우선 낙태라는 단어 대신 ‘임신 중단’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들은 현행 낙태죄의 맹점을 꼬집었다. 현행법상 강간으로 인한 임신은 임신 중단이 허용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이 성폭력으로 인정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충분히 저항하지 않아서, 성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좋아하는 사이처럼 보여서, 발생한 이후에 상대와 말을 섞어서…. 이미 일어난 임신을 중단하겠다는 결정에 법이 관여할 때는 여성이 성관계에 조금이라도 동의했는지가 무척 중요해진다. 반면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여성이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법 앞에서 그다지 중요한 지점이 아니다. 행여 해당 성폭력이 유죄로 인정받는다 한들, 뱃속의 배아는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자라난 후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수술이 모체에 위협이 되는 정도와 태아가 고통을 느끼는 정도도 심해진다.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에서 흔히 행해지는 수술을 통한 임신 중단 외에도, 임신 12주 내라면 알약을 먹어서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 개발되어 있음을 알렸다. 세포를 배출시키는 임신 중단 약 ‘미프진’이 수정란을 탈락시키는 사후피임약과 다른 점은, 성관계 직후 72시간 이내에만 효과가 있는 사후피임약보다 결정할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해준다는 것뿐이다. 또 페미니스트들은 태아의 팔다리를 조각 내는 이미지가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고 죄책감을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계에서 거짓으로 만들어낸 영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했다. 모체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는 태아의 이미지, 그러니까 눈 딱 감고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기의 이미지는 가짜였다. 그나마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수술은 후기 임신 중단으로, 임신 중단이 합법화한 경우라면 맞닥뜨릴 수 없는 일이다.

온라인에서 이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접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할 때마다 특정한 상황에 처한 여성이 얼마나 불쌍한지, 그래서 얼마나 임신 중단을 필요로 하는지를 호소하는 방식으로 임신 중단을 허락받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되물었다. ‘그동안 내가 태아와 여성 중 여성의 손을 들어도 된다는 판단을 얻어내기 위해 호소한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것은 남성의 얼굴을 한 국가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지만, 특히 한국은 산아 제한이라는 명목으로 임신 중단이 자행된 나라, 태아의 성별을 이유로 여아를 숱하게 죽인 나라다. 농촌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키기도 했다. 여성이 성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몸에 죄의식을 덧입힌 반면, 국가가 결정하는 임신 중단은 언제나 정당화되었고 누구에게도 단죄되지 않았다. 낙태죄는 여성이 임신했을 때 그것을 지속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할 권한이 여성이 아닌 국가에게 있다는 증거다. 흔히 말하듯 삶은 결정의 연속이다. 임신 상태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결정 또한 여성이 삶을 계속하기 위해 내리는 무수한 결정 중 하나다. 이는 태아와 여성 중 누가 더 불쌍한지를 호소한 뒤 얻어내는 판단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복잡한 삶 속에서 복잡하게 고민한 뒤 자신의 몸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방식 중 하나다. 게다가 임신 중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행해지는 시술로,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살아 있는 동안 임신 중단을 경험한다. 안전하고 값싸게 임신 중단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발명되었다. 그러니 질문은 ‘낙태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가 아니라, ‘임신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온전히 갖기 위해서는 임신 중단이라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반드시 여성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이 권한을 국가가 아닌 여성에게 돌리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진행 중이다.

글 –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저자, <어머니의 나라> 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