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 & her 젠더 블렌딩 패션

이채민

성의 구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패션의 ‘젠더 블렌딩’. 패션의 현재, 나아가 미래는 그 유연하고도 관용적인 창의성에서 출발한다.

여성 컬렉션의 붉은색 체크 셔츠 드레스와 트렌치, 남성 컬렉션의 푸른색 페이턴트 가죽 트렌치, 여성 컬렉션의 체크 팬츠, 남성 컬렉션의 검은 팬츠와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버버리 제품.

여성 컬렉션의 붉은색 체크 셔츠 드레스와 트렌치, 남성 컬렉션의 푸른색 페이턴트 가죽 트렌치, 여성 컬렉션의 체크 팬츠, 남성 컬렉션의 검은 팬츠와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버버리 제품.

패션이 2018년을 어떻게 바꿀지를 묻는다면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젠더일 거다. 물론 윤리적이고 환경적으로 의식 있는 패션으로 나아가고 인종적인 다양함이 더해지는 것도 중대한 이슈. 하지만 무엇보다 남녀라는 성 구별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과 개체성이 중요한 스토리로 떠올랐다. 이처럼 진화한 패션의 매력적인 얼굴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더욱더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성을 독려한다. 스커트 차림의 제이든 스미스가 보여주듯 자신의 성과 상관없이 상황과 기분에 따라 남성복과 여성복의 아이템을 선택하는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식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나 ‘젠더 크로싱(Gender Crossing)’ 현상, 혹은 90년대 유니섹스 붐을 연상시키는 ‘무성(Agender)’이나 중립적인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을 지향하는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식 옷 입기가 대표적인 예. 그들이 만들어낸 패션 유토피아에선 성에 관한 억압이나 제약 없이 그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덕분에 성의 구분을 넘어서는 의상은 우리에게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서로의 영역을 블렌딩하는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고 있다. 나아가 규정된 성 정체성과 성 역할의 범위를 벗어나는 성별 비순응자가 ‘퓨처 젠더(Future Gender)’를 예고하는 세상. 이처럼 규정할 수 없는 미래의 새로운 성 담론이 패션을 통해 펼쳐진다. 패션 역사상 젠더 이슈가 이렇게 풍성하게 논의되며, 그 구체적 실험이 이렇게 활발히 이뤄진 적이 또 있었을까.

여성 컬렉션의 검정 슬리브리스 재킷과 겹쳐서 연출한 셔츠,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프린트의 회색 니트 톱, 허리를 강조한 스터드 장식 벨트, 검정 나일론 팬츠,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여성 컬렉션의 검정 슬리브리스 재킷과 겹쳐서 연출한 셔츠,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프린트의 회색 니트 톱, 허리를 강조한 스터드 장식 벨트, 검정 나일론 팬츠,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지난해 2월, 구찌로 시작해 디스퀘어드2, 겐조, 캘빈 클라인, 보테가 베네타, 베트멍, 버버리로 이어진 ‘남녀 통합 쇼’ 열풍. 그리고 올 2월부터 시작되는 2018 F /W 시즌 여성 컬렉션을 통해 페라가모, 몽클레르를 비롯해 발렌시아가도 그 대열에 합류할 예정이다. 발렌시아가의 수장인 뎀나 바잘리아는 2016 년 6 월 발렌시아가 남성복을 재론칭한 이래 2018 S /S 맨즈웨어 쇼에선 키즈 라인을 발표하며 어린 모델을 남성복 런웨이에 함께 내세웠다. 그가 아이를 안거나 손을 붙잡은 남자 모델들을 등장시킨 건 오늘날의 달라진 남성성과 시대상을 대변한 것일 터. 한편 남녀 통합쇼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편 미우치아 프라다지만 그녀 역시 항상 프라다 여성과 남성 컬렉션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시즌의 테마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서로 공유해왔다.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트렌치와 셔츠, 여성 컬렉션의 핑크 셔츠와 재킷, 남성 컬렉션의 벨트와 팬츠,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트렌치와 셔츠, 여성 컬렉션의 핑크 셔츠와 재킷, 남성 컬렉션의 벨트와 팬츠,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그래픽 트렌치, 붉은색 칼라가 인상적인 코믹스 셔츠, 여성 컬렉션의 핑크 셔츠와 검정 트렌치, 팬츠, 여성 컬렉션의 메탈 장식 팬츠, 트렌치, 니삭스, 남성 컬렉션의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남성 컬렉션의 코믹스 그래픽 트렌치, 붉은색 칼라가 인상적인 코믹스 셔츠, 여성 컬렉션의 핑크 셔츠와 검정 트렌치, 팬츠, 여성 컬렉션의 메탈 장식 팬츠, 트렌치, 니삭스, 남성 컬렉션의 슈즈는 모두 프라다 제품.

J.W.앤더슨 역시 1월의 남성쇼를 스킵한 채, 오는 2월 런던 여성 컬렉션에서 남녀 통합 쇼를 연다고 발표했다. “요즘 젠더와 패션의 관계를 두고 말이 많아요. 그런 흐름이 새로운 트렌드처럼 보이지만 제 생각에 그건 트렌드는 아니에요. 옷은 그냥 옷일 뿐, 걸칠 수 있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거죠.” 물론 패션 하우스의 입장에서 남녀 통합 쇼를 선택하는 건 한 해에 네 번이나 치러지던 쇼를 단 두 번으로 줄이며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내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 명분을 떠나 남녀 사이의 선명한 경계를 지워내는 매혹적인 저항이 젊은 세대의 눈길을 끌며, 나날이 그 메시지에 힘을 더해가고 있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

남성 컬렉션의 디즈니 백설 공주 모티프 비즈 장식 스웨트 셔츠, 여성 컬렉션의 레이스 장식 튜닉과 그래픽적인 붉은색 카디건, 여성 컬렉션의 레이스 장식 검정 드레스와 줄무늬 롱스커트, 벨벳 슬리퍼는 모두 구찌 제품.

남성 컬렉션의 디즈니 백설 공주 모티프 비즈 장식 스웨트 셔츠, 여성 컬렉션의 레이스 장식 튜닉과 그래픽적인 붉은색 카디건, 여성 컬렉션의 레이스 장식 검정 드레스와 줄무늬 롱스커트, 벨벳 슬리퍼는 모두 구찌 제품.

지난가을 밀란에서 만난 마르니의 새로운 수장, 프란체스코 리소와의 인터뷰에서 한 젠더 논의가 떠오른다. ‘보통 여성 디자이너가 패션을 현실적으로 접근한다면, 남성 디자이너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담아내는 접근을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당신이 이전 디자이너와는 다른 차원에서 마르니의 여성상을 신선하게 그려내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매너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질문을 약간 수정해도 될까. 왜 굳이 이런 부분을 정확히 되짚고 싶냐면 바로 성의 분별이 없어지는 요즘의 미학이 내게는 아주 중요한 새로운 비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황홀경을 느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구분이 이제 더는 의미가 없지 않나 싶다. ‘여성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젠더의 한계, 근본적으로는 사고의 한계를 규정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성의 모호성은 디자이너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 새로운 형태와 실루엣을 탐색하게 만들며, 여성이 남성 매장을 들르고 남동생과 남자친구의 옷장을 탐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일탈을 만끽하게 한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엄마의 옷장이 아닌 남자친구의 옷장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찾아내라는 패션지의 조언도 꽤 오래되었다. 서로의 영역을 탐하며 중립 지대의 룩을 공유하는 일이 젊은 세대에는 당연한 공식이 된 것이다. 한편 몇 해 전, 35주년 회고전을 치르기도 한 패션 노장인 장 폴 고티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들이 의상을 선택하고 입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야 하며, 디자이너의 역할은 특정 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의상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은 의상의 자유를 박탈하게 되므로, 디자이너가 먼저 자유로워야 한다.” 사실 고티에의 자유와 열정의 결과물이 그랬다. 마돈나를 통한 페티시즘에서 나아가 오늘날 후배 디자이너들이 갈구하는 젠더 블렌딩까지, 오직 창의성에 집중한 채 고답적이고 완강한 성역의 파괴에 디자이너 인생을 건 거장다운 말이다.

남성 컬렉션의 레오퍼드 니트 톱과 울 재킷, 여성 컬렉션의 화려한 메탈릭 비즈 장식의 허리를 강조한 재킷과 검정 드레스, 금빛 단추 장식의 줄무늬 롱스커트, 여성 컬렉션의 브랜드 이니셜을 새긴 스커트와 메탈릭한 키튼힐 슈즈는 모두 구찌 제품.

남성 컬렉션의 레오퍼드 니트 톱과 울 재킷, 여성 컬렉션의 화려한 메탈릭 비즈 장식의 허리를 강조한 재킷과 검정 드레스, 금빛 단추 장식의 줄무늬 롱스커트, 여성 컬렉션의 브랜드 이니셜을 새긴 스커트와 메탈릭한 키튼힐 슈즈는 모두 구찌 제품.

성별이 혼합된 컬렉션의 ‘젠더리스(Genderless)’ 룩은 우리에게 이처럼 새로운 흐름을 수용하고 즐길 수 있는 드레스 코드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구찌와 지방시 남성복 컬렉션에도 여성의 마음을 흔드는 화려한 룩과 액세서리가 가득하고(물론 반대의 경우도), 프라다나 버버리 컬렉션에서는 남녀 모두가 사이좋게 공유할 수 있는 담백하고 스포티한 룩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올봄 버버리는 런던 남녀 통합 쇼를 통해 ‘유니섹스 캡슐 컬렉션’을 선보이며 남녀 모두가 경계 없이 나눠 입을 수 있는 룩을 선보였다.

다음 시즌, 셀린에 부임할 에디 슬리먼이 셀린의 새로운 남성 컬렉션과 쿠튀르 컬렉션을 어떠한 애티튜드로 탈바꿈시킬지 사뭇 기대되는 이유도 이러한 젠더 플레이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과거 여성들로 하여금 그가 만든 디올 옴므 팬츠 슈트를 탐하게 하고, 생로랑 여성 쇼에선 쇼트 헤어의 여성 모델에게 바이커 재킷이나 턱시도 재킷을 입힌 채 등장시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매혹적으로 해체한 주인공이니까. 뉴욕에서 주목받는 신진 브랜드인 바하 이스트가 남성과 여성 모두 함께 입을 수 있는 옷을 키워드로, 하나의 아이템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스타일의 유니섹스 아이템을 선보인 것도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리라.

남성 컬렉션의 분홍색 스웨트셔츠, 여성 컬렉션의 체크 셔츠 드레스와 트렌치, 팬츠, 여성 컬렉션의 흰색 라이닝을 더한 팬츠와 체크 프린트 펌프스는 모두 버버리 제품.

남성 컬렉션의 분홍색 스웨트셔츠, 여성 컬렉션의 체크 셔츠 드레스와 트렌치, 팬츠, 여성 컬렉션의 흰색 라이닝을 더한 팬츠와 체크 프린트 펌프스는 모두 버버리 제품.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완벽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오히려 그 차이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신선한 실루엣과 무드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아직 남녀의 성역을 깨뜨려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 짜릿한 도발의 감행을 권하는 이유다. 남자가 입고 싶은 여자 옷, 여자가 들고 싶은 남자의 백처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중심이 되는 룩과의 용감하고 유쾌한 조우를 위하여.

패션 에디터
박연경
포토그래퍼
유영규
모델
차수민, 한노마
헤어 & 메이크업
장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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