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고 소박한 특유의 미로 유럽 패션계에 스며든 한국 미술.

한국 민화에서 영감 받은 2018 S/S 시즌 컬렉션.

한국 민화에서 영감 받은 2018 S/S 시즌 컬렉션.

지난 파리 컬렉션에서 만난 로에베의 한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은 말이 있다. “조너선 앤더슨이 최근 한국의 도자기에 매혹돼 있어요.”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까지 주최하며 예술과 패션의 만남에 열성을 보이던 그의 관심이 한국의 도자기로 이어졌을까. 예술 그리고 나쁘고 좋은 취향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며 심미안적 성취에 몰두하는 그는 이미 광적인 아트 컬렉터로 소문나 있다. 살고 있는 런던 집을 빅토리언 시대의 타운하우스처럼 변모시킨 것만 봐도 그 강도를 잠작할 수 있지 않나?

조선 시대 후기 달항아리(Moon Jar)가 등장한 로에베의 쇼윈도 컨셉.

조선 시대 후기 달항아리(Moon Jar)가 등장한 로에베의 쇼윈도 컨셉.

프라다 쇼윈도 디스플레이 아티스트로 일한 적이 있는 조너선은 그의 관심사를 쇼윈도에 바로 투영했다. 이번 시즌 컬렉션 쇼윈도에 조선 후기 달항아리와 버킷백을 나란히 놓은 것. 한국민족 문화대백과에서 미술사학자 고(故) 최순우 선생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 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이 어수룩하면서 순진한 아름다움에 정이 간다”라며 찬미를 보낸 바 있다. 역시나 조너선의 시선으로 ‘편집’된 가죽 트리밍된 스웨이드와 오렌지색 버킷백, 그리고 달항아리가 연출한, 세기를 관통한 만남은 브랜드의 예술적 기운에 신선한 생기를 부여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이 소유한 이승택 작가의 고드레 돌 (Godret Stone). 돌, 노끈. 1958년 작.

런던 테이트 모던이 소유한 이승택 작가의 고드레 돌 (Godret Stone). 돌, 노끈. 1958년 작.

그런가 하면, 최근 파리의 유서 깊은 병원을 빌려 헤드쿼터로 지정한 케어링 그룹은 역사적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아카이브와 함께 재야의 작가로 불리는 이승택 작가의 ‘고드레 돌(Godret Stone)’을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분신하는 불상’ ‘바람놀이’ 등 한국 실험 미술과 아방가르드 1세대 선구자로 불리는 이승택의 작품을 두고 유럽 유명 큐레이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런던 프리즈 마스터스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가는 이승택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얼마 전 유명 할리우드 스타 코스튬 디자이너 대퍼 댄의 작품을 두고 표절 논란(오마주로 일단락되었지만)에 휩싸인 구찌는 2018 S/S 시즌 런웨이와 동시에 SNS에 영감의 원천을 하나하나 공개했다.

 구찌 인스타그램 스토리즈에 공개된 이름 없는 작가의 한국 민화.

구찌 인스타그램 스토리즈에 공개된 이름 없는 작가의 한국 민화.

그중 에디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스토리즈에 공개된 한국 전통 화조도. 이름 모를 작가의 민화 속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있는 새는 가죽 드레스 위에 고스란히 수놓아져 세계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한국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자체로 긍정적이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한국적인 미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익숙한 예술도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즐거운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