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을 받아 깨어나는 생의 감각, 관객을 채우고 되돌아온 에너지로 충전되는 자아. 배우로서든 가수로서든 엄정화는 독하게 무대에 남고야 말 사람이다. 자신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장소가 오직 거기이므로.

가수들이 연기를 한다. 많은 가수들이, 어느날 문득 잊고 지낸 약속이 떠올랐다는 듯이, 마이크를 툭 내려놓고 연기를 시작한다. 엄정화도 순서는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를 몇 편 찍은 뒤로도 틈만 나면 다시 음반을 내려 애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배우로 자리 잡기까지는‘어느 날’이라 뭉뚱그리기엔 곤란할 만큼 긴 시간이 걸렸다. 가수로 성공하기까지 그랬듯이 말이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잊혀지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가 아주 낮은 데서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온, 긴 계단을 기억한다. 엄정화를 만난 건 대한민국 음악상 시상식 다음날 아침이었다. 대한민국 음악 중에서도 퍽 진지하게 음악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여자들 절반쯤 노래방에서 ‘배반의 장미’나 ‘페스티벌’같은 그의 레퍼토리를 부르는 오버 그라운드 댄스 가수의 존재감은 다소 이질적인 것이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백상을 받을 때 꼭 그랬어요. 영화를 하면서도 이방인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 상은 배우로서 너를기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느껴졌거든요. 어제, 굉장히 색깔이 다른 멋진 뮤지션들 틈에 긴장해서 앉아있는데, 그 자리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어요.” 새로 생긴 ‘댄스, 일렉트로닉 부문 올해의 앨범상’부문을 수상한 그는 “댄싱퀸 엄정화예요. 우리 집에 이런 트로피 많거든요”라고 운을 띄웠으며,“하지만 그 어떤 상보다 이상이 의미 있어요.”라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20대에 최고로 빛나던 나이, 빛나는 시간, 가수로서의 최고 인기와 판매량을 누리던 때, 사람들 앞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연을 하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런 상이 왔다. 그건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하얀 가발과 컬러 렌즈, 헤드폰 같은 소품과 스타일 정도를 결정할 뿐이던 수동적인 ‘댄싱퀸’은 이제 스스로 프로듀서를 정하고 작곡가를 찾아다니며 곡을의뢰하고, 작사 작곡에도 관여하는 능동적인 ‘퀸’으로 진화하고 있다.

“음반 시장도 좋지 않고, 나는 서른을 훌쩍 넘겼어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고, 나의 개성을 살린 음악을 하고 싶어서 부린 고집이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기쁘죠. 내가 일렉트로닉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너무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한 대답을 받은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내 노래를 좋아해주는건 아니지만, 음악적으로 변하고 싶은 시도에 대해 인정받았다는거 말이에요. 이제10집을 나 스스로 기대하게돼요.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시간이 아주 괜찮을 수 있다는, 나에 대한 희망 같은거.”

열줄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채운 지금 더는 영화계의 이방인일수 없지만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아직도 그를 따라다니며, 음반을 내놓고도 영화 스케줄과 부딪쳐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일도 생긴다. 가수와 배우의 중간에서 지그재그로 영역을 돌보는건, 그럼에도 엄정화에게 포기할수 없는 일이다. “책임감? 자존심? 음악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그런걸 느껴요. 정말 멋있는 콘서트 한번 하고 싶어요. 제대로 멋진걸 보여주는 쇼말이에요.” ‘나잇값 못한다’는 댓글에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불특정 다수의 악성 리플 같은 데 마음을 낭비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말한다.“ 사람 복이 많아서, 내 주변에 나를 직관적으로 보고 아니면 아니라고 아주잔인하게 얘기해줄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옷 입는 거로나, 연기에 대해서나, 음악 쪽으로나.”

한 장면을 찍느라 오전 시간이 다 갔다. 주거니 받거니 오가는 긴 대사를 요령껏 잘 쳐내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틀리고만 자신에 대한 책망이 미간에 세로로 새겨진다. 잠시 의기소침해진 그는 한기가 드는지 드러난 팔뚝을 손바닥으로 감싸지만, 금세 긍정의 힘으로 체온을 회복할 사람이다. 상처 받을 일이 많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내가 이 일을 즐기고 있고,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좋아한다는거.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이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뻐요. 20대 때는 자기 연민이 컸던 것 같아요. 이상하게 내가 다짐을 진 것 같고, 가족들도 버겁고, 타인의 인생이 부럽기도 했어요. 나는 이렇게 사적인 생활 아무것도 없이 노력하는데, 내가 꿈꾸는 목적지까지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술 마시면 감정이더 과장되니까 내 자신이 너무 가엾고, 외롭고, 누군지 모를 대상에 대해 억울해했죠. 그런데 사랑도 하고, 사람들의 사랑도 받으면서 거기서 벗어나게 됐어요. 돌아보니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알겠더라고요. 항상, 나를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믿었어요. 내가 간절히 원한 꿈을 이뤘고 조금씩 더 좋은 것들이 내게 주어졌으니까. 그건 내 힘만으로 할 수 있는건 아니었을 거예요.”

촬영 중인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제목 그대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미처하지 못한 질문이지만, 지금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냐고 물었다면 엄정화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올더 좋은 시간을 더 기대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