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안녕이라 말하기 전, 분야를 가로질러 2024년의 표정을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펼쳤다. 올해를 들썩이고 뜨겁게 만든 장면들이 여기 있다.
■ 가요 TOP 10
<더블유>가 묻고, 음악을 향한 애정과 예리한 시선을 가진 세 평론가가 답했다.
01. 올해의 프로듀서로는 누구를 꼽겠나?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뎀 조인츠(Dem Jointz). 사실상 지난 10년 가까이 K팝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하나였던 그가 에스파 ‘Supernova’를 통해 또 한 번 최고임을 입증했다. 심플하면서도 괴팍한, 특유의 비트 메이킹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성은 비슷비슷한 음악이 양산되는 K팝 신 안에서도 확실히 차별화되는 음악의 ‘장’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산얀. K팝을 대표하는 그룹 BTS의 리더와 한국에서 가장 대안적으로 움직이는 음악가들의 조합, 그 결과 올해 RM의 정규 2집 <Right Place, Wrong Person>이 나왔다. 얼핏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이 묘한 주문을 이토록 설득력 높게 풀어내는 데는 얼터너티브 K팝 그룹 바밍타이거 소속 프로듀서 산얀의 공이 컸다. K팝의 ‘다음’을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게 한 영민한 이끎이었다.
임희윤(대중음악 평론가)
SM 이성수 CAO. ‘시대유감(時代遺憾)’(1월), ‘Supernova’와 ‘Armageddon’, ‘Whiplash’(10월)를 통한 에스파의 굳히기, ‘Love 119’(1월), ‘Siren’(4월), ‘Boom Boom Bass’(6월)를 통한 라이즈의 음악적 자리매김. 그리고 에스파 세계관으로부터 극적으로 데뷔한 AI 아이돌 나이비스, R&B 서브 레이블 ‘크루셜라이즈’의 신인 민지운의 데뷔까지. SM의 2024 ‘열일’의 뒤에는 수많은 A&R이, 그리고 그 뒤에는 A&R 총괄 이성수가 있었다. SM이 일찍이 선구한 ‘인터내셔널 A&R 시스템’은 이제 K팝 시장에서 둥글게 보편화됐다고 믿었다. 미분된 원의 테두리에서 뾰족한 꼭짓점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려워졌고, 그 어려운 일을 누군가는 해냈다.
02. 올해의 가장 영리한 소속사 혹은 뮤지션은?
김영대
어도어. 2023년의 MVP였던 뉴진스는 올해 역시 실로 독보적 존재감을 떨쳤다. 뉴진스의 대단한 점은 데뷔 때부터 구축한 전체적인 이미지나 미감의 결을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도 매번 새로운 음악 장르를 들고나와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민희진이 주도하는 어도어의 기획 능력은 매 순간이 놀라웠고, 이 모든 것이 K팝 사상 유례가 없는 모회사와의 갈등 과정에서 일어났다.
김윤하
로제. 고유의 아이덴티티에서 챌린지 친화적 면모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똘똘한 한 곡 ‘APT.’의 본령은 올해 12월 발표될 첫 정규앨범 의 홍보였다. 앨범에 대한 기대치를 최고로 높이며 선공개 곡의 맡은 바 임무를 다했음은 물론 한국인의 전통 음료 ‘소맥’을 마는 로제와 건배를 외치는 브루노 마스까지 남겼으니, 목표 초과 달성도 유분수다.
임희윤
SM엔터테인먼트. 1번 질문에서 거의 답해버렸다. 에스파의 ‘쇠맛’ 공식을 대중화해 급기야는 ‘Whiplash’처럼 마니악한 곡까지도 히트곡 선상에 올렸다. 새로운 스타일의 청량돌 공식을 만들어낸 라이즈도 있다. 지난해 인수전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혼탁한 모래 폭풍 속에서도 쾌청한 시야를 열어젖혔다. 음악으로, 이미지로.
03. 신예 K팝 그룹 중 한 팀의 매니저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방향과 전략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김영대
베이비몬스터. YG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NE1과 블랙핑크에서 얻은 노하우를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K팝도 레트로의 시대가 된 마당에 YG K팝 특유의 올드스쿨한 감성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시대가 바뀐 만큼 조금 더 모던한 접근으로 업데이트하면 어떨까. 확실한 건 재능들은 역대급이라 부를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윤하
영파씨. 등장과 동시에 ‘국힙의 딸들’ 자리에 오른 독보적 존재감을 길이 보전하고 싶다. 붐뱁에서 지-훵크(G-Funk)까지 골고루 거치며 성장한 데뷔 1년의 기를 이어받아 힙합을 비롯한 흑인 음악의 다양한 지형도를 하나씩 짚어가는 그룹으로 성장시켜보는 건 어떨까. <투나잇 쇼>보다는 <소울 트레인>이, ‘코첼라’보다는 ‘축제의 여름(Summer of Soul)’이 어울리는 그런 그룹으로.
임희윤
트리플에스. 24인조 다국적 아이돌 그룹인 이들과 유닛을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고 배가 산으로 갈 확률도 무궁무진하다. 24절기 세계관을 제안한다. 멤버들의 출신지인 동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는 낯익으면서도 해외 팬들에게는 또 엑소티시즘을 자극할 수 있다. 이달의 소녀도 있지 않았나. 절기는 약 보름마다 돌아온다. 기획팀이 좀 바쁘긴 하겠다.
04. 올해의 가장 탁월한 랑데부는?
김영대
로제&브루노 마스. 콘셉트, 노래, 퍼포먼스, MV 모든 부분이 그냥 ‘It just worked!’란 인상이었다. 음악적 컬래버라기보다는 이벤트적 성향이 다분했지만 중요한 건 그 모두가 조금의 어색함이 없는 유쾌하고 오가닉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김윤하
이영지&도경수. 하마터면 배우계로 빼앗길 뻔한 K팝 인재 도경수를 다시 가요계로 이끈 것만으로도 훌륭한 만남이다. 여기에 영지 소녀의 화려한 커리어 가운데 딱 하나 아쉽던 ‘대표곡’이라는 마지막 퍼즐까지 맞췄으니, 흔한 표현으로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임희윤
비비&장기하. 탁월한 박자 감각과 한국어 감각을 탑재한 장기하가 빚어낸, 가히 고전 음악적인 아름다움의 왈츠. 플러스, 나긋나긋 폭신폭신하지만 색깔 또렷한 비비의 가창. 투박하나 기이한 통나무집과 벨벳 원단의 핑크 인테리어가 뚝딱 결합된 듯 아찔하게 낯설고, 거부할 수 없도록 매력 있다.
05. 올해의 인상적인 컴백과 실망스러운 컴백은?
김영대
인상적인 것도, 실망스러운 것도 키스오브라이프. ‘Sticky’는 걸그룹의 건강한 현대적 섹시미가 뭔지를 정확히 보여준 곡으로 세련된 음악과 싱그러운 원테이크 MV까지 완벽했던 올해의 노래 중 하나다. 그에 반해 ‘Get Loud’는 정확히 그 지향성을 알기 어려운 밋밋한 노래여서 아쉬웠다(놀라웠다).
김윤하
8년 만에 2NE1 완전체 무대에서 울려 퍼진 ‘Come Back Home’과 ‘Fire’. 때로는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그것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다. 2NE1의 컴백이 그랬다. 한편 스테이씨는 올해로 데뷔 5년 차를 맞으며 무려 14곡을 담은 첫 정규앨범으로 묵직한 출사표를 던졌지만, 결과가 아쉬웠다. 스테이씨만의 비타민 같은 통속의 부활을 기다리는 게 나만은 아닐 거라 믿는다.
임희윤
조용필은 누구나 추앙하는 한국 음악계의 살아 있는 동상이다. 그렇기에 지친 듯한 목소리로 하던 음악, 또는 더 간결한 어쿠스틱 포크나 앰비언트 뮤직 기반의 음악을 냈다면 훨씬 힘을 덜 들이고 평단의 별 네댓 개를 품에 안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필은 진정 이상한 선택을 했다. 이 시대에 주어진 편곡과 사운드의 재료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팝송을 만들고자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싶을 정도로. 반대로 로제의 경우, 특유의 매혹적인 목소리로 이를테면 얼터너티브 록풍의 강단 있는 음악을 해주길 바랐다. ‘아파트~ 아파트~’로 세계를 휘젓기는 했지만 이건 로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어느 정도 해냈을 곡이다. 세기만 하고 평이한 곡 뒤로 결국 로살리아와 ‘New Woman’을 빚어낸 리사를 보라. 로제의 정규앨범을 기대해볼 뿐이다.
06. 블랙핑크의 리사, 제니, 로제가 솔로로서 음악을 냈다. 그들의 음악과 행보를 아우르는 소감은?
김영대
리사(★★★☆) ‘Rockstar’라는 제목처럼 화려하고 강력한 탈 K팝 싱글.
제니(★★★☆) 거부할 수 없이 터지는 제니의 매력 폭탄.
로제(★★★★) 로제가 아닌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의 매력.
김윤하
리사(★★★★) 왼손에는 블랙핑크의 리사, 오른손에는 태국 방콕 출신 팝스타 라리사 마노반.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다.
제니(★★★☆) ‘Pretty Savage’를 이끄는 ‘It Girl’로서의 확고한 존재감. 그래서 다음이 더 궁금하다.
로제(★★★★) 의외의 한 방이라는 말은 실례다. 이제 막 시동을 건 ‘Rosie World’의 출발 신호.
임희윤
리사(★★★★) ‘Rockstar’는 아니었다. ‘Moonlit Floor(Kiss Me)’는 그냥 그랬다. 그래도 ‘New Woman’이 있었다. 올해 리사는 이것으로 족하다. 앞으로 이거면 리사로 족하다.
제니(★★) ‘Mantra’로는 적더라. 제니가 올해 보여준 것. 나쁘지 않았지만 별로 좋지도 않았다. 아쉽다. 일단 올해까지는. 로제(★★) ‘APT.’로는 아직 판정할 수 없다. 아파트로 치면 단지 진입로도 안 깔렸다. 아파트 다 올리면 불러주길. 기대는 하고 있다.
07. 하이브 방시혁 의장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면?
김영대
시스템 VS 예술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뭘 취하겠어요?
김윤하
당신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임희윤
Do You Believe in Music?
08. 어도어 민희진 사내이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면?
김영대
뉴진스 정규앨범은 (언제쯤) 나올까요?
김윤하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무엇인가요?
임희윤
Do You Have One (More) Room?
09. 올해 K팝계에 일어난 인상적인 사건 하나를 꼽아보자.
김영대
하이브, 민희진 분쟁. K팝이 탄생한 이래 산업적인(경영적인) 이슈가 음악적인 이슈를 완전히 덮어버렸던 아주 독특한 한 해. 이 갈등은 K팝 산업이 꽁꽁 숨겨온, 혹은 쉬쉬해온 다크 사이드를 한꺼번에 수면 위에 드러냈고, K팝 산업에 대해 몇 가지 중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멀티 레이블의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가? K팝에서 예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K팝에서 미학의 가치는? K팝에서 아티스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갈등 양상의 결론에 따라서 향후 몇 년간 K팝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다. 한 회사의 운명도.
김윤하
민희진의 기자회견. ‘대퓨님’의 숨겨진 ‘퍼포먼스력’을 비롯해 K팝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의 병폐가 ‘파묘’되는 걸 3시간 가까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놀라운 시간이었다.
임희윤
하이브, 민희진 분쟁. 회사 내 진흙탕 싸움의 장이 알고 보니 컨버터블, 그러니까 돔구장이었다. 돔 뚜껑이 열리니까 지저분한 것들이 보였다. 진흙도 탕 밖으로 마구 튀었다. 그제야 우린 K팝을 조금 더 보게 됐다. 역사의 앞 2/3는 아이들 듣는 음악이라며 무시했고 역사의 뒤 1/3(최근)은 국위선양에 빠져 찬양만 했던, 그 어른들도 이제는 K팝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대중음악판 ‘한강의 기적’은 너무 급속도로 일어났고 그림자는 더 길어졌으며 영영 양지로 생각되던 곳에도 음영을 드리웠다. 차제에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 업계 안팎의 건강이다.
10. 최근 대두한 K팝 위기론, 그런데 지금 K팝은 진짜 위기일까?
김영대
K팝은 위기가 맞다. 하지만 그건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와 같은 슈퍼스타의 부재 때문은 아니며 M&A로 탄생되는 공룡 기업의 필요성을 방증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K팝의 위기는 ‘구태의연함’에서 비롯된다. 시스템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찍어낸 음악의 진부함, 눈 가리고 아웅식의 눈속임 성과, 회사 및 아티스트 각각의 도덕적 해이, 정확한 비전이 없는 몸집 불리기야말로 K팝의 발전을 가로막고 위기론에 부채질하는 부분들이다. K팝 산업은 그걸 사랑하고 지지하는 팬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 팬덤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부심’이다. K팝 회사들이 팬들로부터 이 자부심을 뺏는다면 그것이 바로 K팝의 진짜 위기일 것이다.
김윤하
매년 K팝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숫자판만 읽고 있지만, 만약 K팝에 진짜 위기가 온다면 그건 K팝을 향한 팬덤과 대중의 냉소에서 올 거라고 확신한다.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팬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댐에 금 가는 소리가 그 어느 해보다 요란한 2024년이었다.
임희윤
아니다. 근년 여러 특이점을 만나 급성장하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K팝은 오래전부터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서브컬처로서 자리 잡았다. 향후에도 해외 차트 최상위권을 몇 번 쿡쿡 찌르겠지만 재미난 서브컬처의 본질은 차트 성적이 아니다. 계속해서 이상하고 재밌는 게 본질이다. 다만 이제는 더 건강해졌으면 하면 바람이 있다.
■ <흑백요리사> 익힘의 정도는요
한국의 다이닝 신은 지금까지 세 차례 계단식 성장을 했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렸을 때, 현대카드가 ‘고메위크’를 시작했을 때,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이 론칭했을 때. 그리고 2024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많은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 안성재 셰프의 코멘트들이 유행어로 떠올랐고, 빽다방의 백종원 대표 사진과 일러스트엔 검은 눈가리개가 입혀지는 ‘짤’이 생성되었다. 두 심사위원 외 출연자들도 고루 불꽃놀이처럼 여기저기서 터지는 인기를 얻고 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무명씨 중 스타 하나씩만 선발한 그 경연에 비해, <흑백요리사>는 최현석, 여경래, 정지선 같은 셀러브리티 셰프부터 ‘나폴리 맛피아’, ‘요리하는 돌아이’, ‘이모카세’처럼 접근이 용이한 식당의 셰프까지 다양한 ‘요리인’을 고른 비중으로 조명했다. 제왕적 스타 하나를 추대하던 봉건적 과거와 크리에이터 다수를 구독하는 민주적 현재의 세대 차이랄까. ‘캐치테이블’ 앱 기준, <흑백요리사〉 오픈 전후 예약 건수가 4937.5%나 치솟은 출연자의 식당도 있을 정도. ‘철가방 요리사’의 도량은 10월 예약 오픈에 6만5,000여 명이 동시 접속해 모든 예약이 순식간에 마감됐다고 한다. 그래서 <흑백요리사>가 ‘위기의 외식업을 살리는 미식 열풍’을 가져왔다는 진단도 나온다.
이는 성급한 샴페인이다. 침소봉대다. 출연한 셰프들 대다수와 제작진은 속내에 ‘어려운 외식업계가 <흑백요리사>를 계기로 살아나면 좋겠다’는 바람을 숨기듯 지니고 있었다지만, 미안하게도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흑백요리사>가 살린 것은 〈흑백요리사> 자신뿐이다. 요리가 아니라 택견이나 꽃꽂이였어도 상관없었다. <흑백요리사>로 미식 열풍이 불어닥친 곳은 <흑백요리사>들의 업장뿐이다. 물론 <흑백요리사>가 그 이상을 해야 할 책임도, 강요도 없다.
A 호텔 뷔페는 가장 높은 퀄리티와 가장 높은 가격으로 유명한 곳이다. 갑자기 가려다 당연히 예약되지 않아 B호텔 뷔페에 갔다. A 뷔페에 비해 2/3인 가격처럼 테이블도 음식도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가격이 A 뷔페의 1.5배 정도인 B 레스토랑은 미쉐린 가이드 서울 2스타이지만, <흑백요리사>에 나온 셰프의 업장이 아닌 덕분인지(!) 여유 있게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즐겨 가던 와인 바는 재료비와 인건비가 너무 올라서 가게를 내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성수동의 이름 쩌렁쩌렁한 와인 바들과 정반대 상황이다. 성공한 식당 사장님이 새로 낸 식당은 또 성공했지만, 동네 백반집과 카페 자리에는 벌써 몇 달 넘도록 ‘임대 문의’만 줄줄이 붙어 있다. 지금 한국의 외식업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말은 ‘양극화’다.
<흑백요리사>는 요리사들을 백수저와 흑수저로 구분했지만, 이 둘 아래 빛이 닿지 않은 곳에 진짜 흙수저 요리사들이 있다. 앞으로가 관건이다. 넷플릭스 예능이 촉발한 다이닝 신에 대한 어마어마하고도 능동적인 호기심이 <흑백요리사> 출신 셰프 둘이 추가되어 12월 방영을 시작하는 <냉장고를 부탁해> 시즌 2와 2025년 하반기로 예고된 <흑백요리사> 시즌 2를 통해 쭉 잘 이어져야 한다. 어쩌면 정말로 올림픽과 고메위크, <미쉐린 가이드>에 이어 <흑백요리사>가 다이닝 신으로서는 네 번째 계단식 성장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반면 흙수저들의 외식 바닥은 우리 곁에 산소처럼 자연스레 녹아 있는 백반집이고 고깃집이고 호프집이다. 치열한 생존형 외식업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4년 2분기 폐업한 서울시 식당 수는 6,290개이고, 이건 2022년 같은 분기에 비해 무려 2,213개나 증가한 수치다. 포스트 팬데믹, 경제 상황, 국정 운영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지표 결과이지만 아무튼 침체는 가속화되고 있다. 거기에 대고 <흑백요리사>의 부흥을 침소봉대해 얘기하는 이들을 보면,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노래나 읊는 로마 황제의 영화적 순간이 떠오른다. 외식업계 전체가 나눠 가진 이 불황의 더께는 <흑백요리사>의 이븐하지 않은 낙수 효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 왜 러닝인가?
그야말로 러닝 붐이다. 매년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를 발간하며 신조어를 만드는 김난도 교수처럼 이 현상을 새롭게 작명하고 싶다. 러너볼루션(Runner+Revolution)이나 러너션(Runner+Passion)처럼 있어 보이는 단어로. 아무튼 2024년을 기점으로 러닝 판도가 바뀐 건 확실하다. 한강만 가도 알 수 있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러닝화 기업 온홀딩(온러닝)의 주가는 지난 1년간 74% 뛰었다. 러닝화 브랜드 호카를 보유한 데커스 아웃도어 역시 70.3% 상승했다. 빅테크 대장주인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뛰어넘는 성적이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골프 카테고리 매출은 2022년 대비 감소했지만 러닝 카테고리는 35%나 성장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국내 러닝 인구를 1,0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제 동아 마라톤, 춘천 마라톤, JTBC 마라톤 참가권은 임영웅 콘서트 티켓만큼이나 구하기 어렵고, 새로 출시하는 러닝화는 당근이나 크림에서 웃돈 주고 사야 할 정도다. 슬프다. 달리고 싶은데, 예쁜 신발이 없다니. 어쩌다 러닝이 유행이 됐을까? 치킨이 좋은 이유가 한 가지가 아닌 것처럼, 딱 하나만 꼽기는 어렵다.
MBC <나 혼자 산다>의 기안84가 뉴욕 마라톤에 도전하는 드라마가 작은 공을 쏘아 올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여기에 새티스파이,디스트릭트비전, UVU 등 세련된 러닝 브랜드들이 예쁜 옷을 쏟아냈다. 그 옷을 입고 달리는 셀럽과 인플루언서가 늘어나며 “야, 너두?” 하듯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뛰기 시작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며 다른 스포츠 브랜드에서도 매주 러닝을 주제로 다양한 행사를 연다. 2000년대 초반 홍대의 클럽데이처럼 러닝화 하나면 서울 러닝클럽 어디서든 뛸 수 있는 시대다. 사실 러닝만큼 쉬운 운동이 없으니, 진입 장벽이 낮은 것도 한몫했다. 남녀노소 같이 뛰고 맥주 한잔 걸치기도 좋다.
<SNL 코리아>의 고준희 편이 다룬 ‘빤스런’ 콩트에는 좀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내가 속한 크루만 봐도 달리다가 눈 맞아서 결혼한 커플이 5쌍은 넘으니까. 건강도 챙기고 사랑도 하고. 이 좋은 걸 안 할 이유가 있나? 요즘 러너들 사이에서는 ‘겨울이 오면 패션 러너는 다 사라질 거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오간다. 그렇다면 곧 유행이 끝나는 걸까? 당분간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미 물살을 탔고, 추운 겨울에 러닝하고 인증샷을 남기는 게 새로운 챌린지가 될지도 모른다. 직히 러닝에 유행이 어디 있나?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부터 달렸는데!
– 박한빛누리(프리랜스 에디터, 10년 차 러너)
■ ‘텍스트힙’이 휩쓴 자리
‘사나흘’과 ‘심심한 사과’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던 젊은 세대가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역설적이지만, 그런 일이 올해 실제로 일어났다. 스마트폰 대신 종이책을 쥐고, 주말엔 북카페와 북바에 가고,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을 검색하고, ‘완독’ 해시태그를 달아 인증샷을 남기는 흐름은 ‘텍스트힙’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올해의 유행어 ‘추구미’ 에 빗대 말하자면 ‘독서하는 나’는 올해 가장 뜨거운 추구미 중 하나였다.
올 초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점령하더니, 하반기 10월엔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전국의 서점 앞으로 오픈런 행렬이 생겨났다. 이렇듯 몇몇 ‘대박 히트 상품’이 사람들을 독서로 이끈 것도 맞지만, 그보다 텍스트힙에 불이 지펴진 영문을 좇다 보면 결국엔 ‘희소성’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종이책은 낯설면서도 신비한 존재다. 모두가 릴스 같은 숏폼 영상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에, 연간 독서량이 1.7권에 불과한 나라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확실히 차별화된 행위가 된다. 최신 유행 패션과 유명 맛집보다 지적 수준을 은근히 드러낼 수 있는 책 한 권은 SNS상에서 보다 니치한 과시재로도 통한다.
텍스트힙 열풍이 휩쓸며 올해 출판계는 진귀한 풍경을 목도하기도 했다. 해묵은 책이 하루아침에 판매량 수직 그래프를 그리며 ‘재판 화급’에 부쳐지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정대건의 장편소설 <급류>는 이를 다룬 한 SNS 유저의 ‘오열 릴스’가 바이럴되며 동일 기간 대비 판매량이 6배 가까이 뛰었고,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 역시 배우 한소희의 추천으로 즉시 완판을 기록했다. 누군가는 이런 흐름 역시 젊은 세대의 디토(모방) 소비 심리에 불과하다며, 이미지 소비를 위한 과시용 독서일 뿐이라며 회초리를 들려 했지만 ‘텍스트힙 코인’에 탄 출판사들은 ‘과시용 독서 책 추천합니다’라고 홍보하며 싱글벙글 노 젓기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한편 올 초 <가디언>은 젊은 세대 사이에 분 독서 열풍을 다룬 기사를 실었다. ‘독서는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라는 제목의 기사는 “Z세대가 디지털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책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전한다. 적어도 텍스트힙은 비단 국내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힙 시대에 ‘진지한 독자는 없다’는 날 선 목소리도 제기되지만, 한편으론 텍스트힙 시대이기에 독서는 내밀한 취미에만 머물지 않고 공유하는 문화로 확장될 수도 있었다. 도파민 지나 ‘독파민’의 시대는 어쨌든 열렸다. 디지털 시대의 때아닌 활자 예찬이 우리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볼 일이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 다시, 밴드 음악
2024년, 세상에 보이지 않는 지령을 담은 비밀 전파라도 흐르는 게 아닐지 잠시 의심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밴드 음악이 대세라며 희망의 깃발을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 마니아들 사이 ‘밴붐온(밴드 붐은 온다)’이나 ‘과도한 록 놀이’라는 말이 구호처럼 유행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록 페스티벌인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사흘 동안 역대 최다 관객인 15만 명이 몰렸고, 부산의 자존심 부산 록 페스티벌은 일일 최다 관객 3만 5,000명을 넘겼다. ‘록은 죽었다(Rock is Dead)’며 관에 못을 박은 지 꽤 됐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밴드 음악의 위상이 180도 바뀐 것이다.
변화의 중심에 당연히 화제의 밴드가 있었다. 인디에는 실리카겔, 메이저에는 데이식스가 좌청룡 우백호처럼 그 위용을 자랑했다. 공교롭게도 2015년 첫 앨범을 발매한 일종의 데뷔 동기인 두 밴드는 활동 10주년을 눈앞에 둔 지난해와 올해 양과 질 모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올렸다. 음악 연습실을 들락거리는 10대 가운데 두 밴드의 음악을 카피하지 않는 이를 찾기 어려웠고, 밴드는 그사이 ‘꼰대’에서 ‘힙’으로 자리를 옮겼다. 심지어 2024년 8월, 이들이 다시 모이면 ‘손에 장을 지진다’ 호언장담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던 밴드 오아시스마저 재결합을 선언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이유가 아주 없는 흐름은 아니다. 국내 기준, 앞서 언급한 두 밴드의 활약에 더해 전 세계 Z세대의 팝 펑크 아이콘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인기를 앞세운 록 리바이벌 붐을 계기로 밴드 음악을 찾는 젊은 층이 부쩍 늘었다. 엔데믹 무드와 함께 찾아온 크고 작은 음악 페스티벌의 성황은 이와 같은 흐름을 눈과 몸으로 직접 체험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움직임에 기댄 결과였다. 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젊은 세대의 고막과 삶을 사로잡았던 힙합의 인기 하락세도 뚜렷했다. ‘국힙’의 위상이 격하하는 사이를 밴드 음악이 파고든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방점이 찍힌 곳이 ‘록’이 아닌 ‘밴드’라는 점이다. 장르를 꼬장꼬장하게 따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무래도 고루한 일이니까. 심지어 그렇게 새롭게 발굴된 록과 밴드 음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팝 펑크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뉴트로 인기를 등에 업고 다시 소환된 에이브릴 라빈에서 린킨 파크까지, 하나같이 이들이 유행하던 21세기 초만 해도 록 마니아들이 만든 ‘진짜 록’ 놀이터 근처에도 얼씬 못한 음악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밴드 붐은 지난 세기와는 사뭇 다르다. 설레는 소문을 넘어 든든한 현실이 되기에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 국정감사에서 생긴 일
올해처럼 국정감사가 다양한 세대의 유튜브 알고리즘과 연관된 경우도 드물지 않을까? 국회의 국정감사는 국정 운영 전반에 관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다. 국감에 나오는 증인과 참고인은 대개 공공기관의 수장이나 기업인, 정치 관료 등이지만, 종종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2023년 가수 남태현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감장에 마약 중독 치료 관련 참고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다. 2018년 더본코리아 대표 백종원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감장에, 2014년 ‘난방열사’라는 닉네임을 얻은 배우 김부선은 국토교통위원회 국감장에 참고인으로 나와 발언했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주제가 있으면 관련 유명인이 부름을 받기도 하는 식이다.
정치인 입장에선 단지 인지도를 위한 ‘쇼’를 꿈꾸고 출석을 요청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테지만, 그 의도가 어떻든 단기간에 여론 조성이 가능하기로는 이만한 무대가 없다. 평소 국감 영상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던 이들도 올해는 클릭을 거듭했으니, 키워드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다. 대한축구협회와 대한배드민턴협회 관계자, 빌리프랩의 김태호 대표가 스포츠와 문화 예술 전반을 관장하는 위원회의 부름을 받았다. 뉴진스의 하니와 어도어 김주영 대표는 고용 노동,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의 부름에 증인과 참고인으로 출석한 경우다. 여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 회의(9월 2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감(10월 1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10월 24일)에서 나온 질문 몇 가지를 남겼다. 앞뒤 맥락이 있었던 질의응답에서 일부를 추린 것이지만, 국감이 열리던 날들의 풍경과 기억을 부른다.
– 권은경(<더블유> 피처 디렉터)
“(화면에 자료를 띄우며) 정몽규 회장이 물러나야 할 10가지 이유, 얼른 한 번 쭉 봐보십시오. 혹시 내가 이거 한 거 아닌데, 그런 게 있습니까?”
– 민형배 의원
“11년 동안 축구협회 회장을 하셨어요. 강산이 한 번 바뀐다는 10년을, 한 턴을 돌았는데, 회장을 계속하고 싶은 이유가 대체 뭔가요 회장님?” – 배현진 의원
“최종 후보자 3인의 평가에 대해서 정성지표와 정량지표로 구분된 점수표, 회의록, 채점 결과 있습니까?” – 강유정 의원
“다른 나라들은 대개 협회에서 예외 규정을 뒀는데, 왜 대한배드민턴협회만 몇 년 동안 예외 규정을 두지 않아서 안세영 선수가 신발을 교체해달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오랫동안 안 바뀝니까?” – 민형배 의원
“최근에 그 민희진 대표님과 방시혁 대표님 간에 갈등이 좀 있었잖아요. 혹시 그것과 지금 이런 사태가 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뉴진스 하니에게) – 우재준 의원
“최근 대주주 간의 다툼이 사내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나요?” (어도어 김주영 대표에게)” – 우재준 의원
거… 회사입니까 기획사에 갈 때, 내 사장이, 그러니까 내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 내한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업무 지시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이다’… 내 회사가 지금 보니까 두 개 정도 돼 있는 거 같은데요, 어느 회사가 내 저건지, 명확하게 인지를 하고 회사를 다녔습니까?” – 김형동 의원
“국정감사가 진행이 되고 있는데, 국감 위원이, 문체부 위원이 증인으로 채택을 해서 나오셔 가지고 질의응답이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회사에서 어떤 식이든 입장문을 내가지고 마치 이 국정감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든지, 국회 권위를 이런 식으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 전재수 위원장
■ 극장 관객수가 말해주는 것
“그래서 진짜 망했다는 거야?” 대중문화 영역에서 영화는 더 이상 화제를 끄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어떤 대작이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영화판 자체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거나 하는 얘기만 사람들 사이에서 떠돈다. <파묘>와 <범죄도시4> 등 상반기에만 천만 관객을 모은 한국 영화가 두 편 나왔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 두 편 외에는 잘된 영화가 없다. 티켓값 인상으로 극장 영화 매출이 팬데믹 이전의 90% 수준을 회복했으나 이것은 통계의 눈속임에 불과하다. 잘되는 영화는 잘되지만 대부분의 개봉작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흥행 양극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 제작되는 영화 편수 자체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팬데믹 여파로 개봉하지 못했던 ‘창고 영화’(2020년 기준 5년 만기 펀드가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는)들은 늦어도 내년 안에 개봉일을 잡아야 한다. 올해 새롭게 투자가 확정된 영화는 스무 편이 채 되지 않는다. CJ ENM에서 올해 제작에 들어간 영화가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뿐이라는 것은, “봉준호와 박찬욱 외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라는 흉흉한 소문이 업계에 도는 것은, 사실상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가 거의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올해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 이종필 감독의 <탈주>, 남동협 감독의 <핸섬 가이즈>가 여름 시장에서 선전한 현상을 두고 희망을 찾기도 한다. 이 작품들의 감독은 모두 80년대생이거나 첫 장편영화를 연출한 이다.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2부,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 등 이른바 ‘올드보이’ 감독의 신작이 흥행에 실패한 것과 대비되는 결과다.
이제 관객은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값만으로 관람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두고 ‘세대교체’라는 키워드를 꺼내는 것은 섣부르다. 장재현 감독처럼 오컬트 장르에서 자신의 DNA를 꾸준히 보여준 사례를 제외하면 이전 세대와 구분되는 현세대의 특징이 두드러진다거나, 고유의 영역을 구축한 신진 감독이 자리 잡았다고 보 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로 주목받은 감독들이 상업영화 진출작에서 아쉬운 결과를 남기는 경향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런 한편 의외의 흥행작이 있었다. <사랑의 하츄핑>이 122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1년 중 가장 성수기에 해당하는 7~8월 극장가에서 두 번째로 흥행한 한국 영화다. 지난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그랬듯 확실한 타깃층을 가진 영화가 선호되는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해외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깜짝 흥행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결코 대중적이라 할 수 없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20만 명씩이나 본 이유는 무엇일까. <퍼펙트 데이즈>가 관객수 12만 명을 동원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한국에 시네필이 많아서는 아닐 텐데). 칸영화제 수상, 유명 평론가들의 극찬, 무엇보다 극장 관람이 필수라고 입소문을 탄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이 팬데믹 이전보다 엄격해지면서 오히려 수요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는 해외 예술 영화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 한국 독립영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LGBT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관객수 84만 명을 동원한 것은, 그것이 손익분기점이 400만 명에 이르는 대작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관객수(68만 명)보다 높은 수치인 것은 지금 시장에서 과거 흥행 코드를 답습하는 기획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성소수자의 일상적 연애를 보여주는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꾸준한 입소문으로 생존하고 있다.
넓은 맥락에서는 <사랑의 하츄핑>이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흥행과 함께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타깃층이 분명하거나 ‘와우 포인트’가 있거나 확실한 차별점이 있는 기획이어야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영화 투자가 위축되는 흐름은 막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선택만 해서는 오히려 악순환이 지속될 것이다. 올해 극장가 성적표는 앞으로 영화계가 어떤 작품을 내놓아야 하는지 에둘러 알려주고 있다.
– 임수연(<씨네 21>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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