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변장 마스크 너머, 그녀가 엿보려던 진실에 관하여
창조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해 인간의 정체성을 실험하는 영국의 예술가 질리언 웨어링이 <더블유>를 위한 특별한 화보를 완성했다.
“사람은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공적 표현과 진정한 자아 사이의 간극을 면밀하게 탐구해온 영국의 예술가 질리언 웨어링(Gillian Wearing)은 단언한다. 영국 yBa 그룹의 대표 작가로 손꼽히는 웨어링이 변장 마스크와 AI, 포토샵을 활용해 오로지 <더블유>를 위해 창조한 일련의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녀는 직접 이번 화보의 모델로 나서 여러 인물로 변신했는데, 샤넬 드레스를 입은 채 전용 운전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옛 무비스타부터 배우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톰 셀릭(Tom Selleck)의 얼굴을 적절히 섞은 듯한, 미우미우 카디건 차림의 콧수염 신사까지 그 모습이 무척 다양하다. “모델보다는 배우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몇몇 사진에서는 마치 인물이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날 거예요.” 머리를 부여잡은 디올 드레스 차림의 여성을 보면 사진 너머로 터질 듯한 긴장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릴까 불안해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이미 상실감을 맛본 자의 얼굴일 수도 있죠.”
질리언 웨어링은 대표작 ‘60분의 침묵(60 Minutes Silence)’을 비롯한 여러 혁신적인 작품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60분의 침묵’은 단체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한 영국 경찰들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 작품으로, 웨어링은 이 작품을 통해 1997년 터너상을 거머쥐었다. 런던 의회 광장에 세워진 밀리센트 포셋(Millicent Garrett Fawcett) 동상은 웨어링이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운 동명의 여성 운동가를 본떠 만든 작품으로, 영국 의회 건물의 정중앙에 들어선 최초의 여성 조각상이다. 한편 팬데믹 기간에 웨어링은 수채화와 유화 기법을 활용한 획기적인 자화상을 제작했으며, 2022년에는 AI를 이용해 섬뜩하면서도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인의 말로에서 베티 데이비스가 되었다고 상상하는 조앤 크로퍼드의 얼굴(Imagined Mask of Joan Crawford as Bette Davis in Whatever Happened to Baby Jane)’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이미지 생성형 인공지능 ‘달리 2’를 활용해 할리우드 영화계의 라이벌이었던 두 배우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변형한 것으로, 희극과 비극의 분위기를 작품에 동시에 담아냈다. 또한 가장 최근인 작년 말엔 LA에 자리한 갤러리 ‘리젠 프로젝트’에서 AI를 활용해 제작한 비디오 ‘질리언 입기(Wearing Gillian)’와 그녀 자신이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로 분한 사진 작품을 비롯해 여러 창조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리플렉션(Reflections)>을 진행했다. 웨어링은 ‘비디오에 모든 것을 고백하라. 당신은 변장을 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구미가 당긴다고? 그렇다면 질리언을 찾아라(Confess All on Video. Don’t Worry You Will Be in Disguise. Intrigued? Call Gillian)’라는 제목의 작품을 제작한 1994년부터 마스크를 활용해왔다. 해당 작품에는 마스크를 쓴 평범한 영국 시민 10명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언가를 훔치거나 상사의 피자에 곰팡이를 뿌리는 등의 행동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 촬영에 등장한 마스크들은 정체성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도구라고 볼 수 없다. “사진 속 사람들이 제가 여러 명으로 변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어요. 우리는 마스크를 쓰면 두렵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전 그들을 통해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웨어링은 보테가 베네타 드레스를 입은 매력적인 금발의 북유럽 여성과 어딘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프라다 드레스 차림의 여성으로도 변신했다. 몰리 고다드와 막스마라 컬렉션을 입은 여성 두 명이 앉아 있는 강렬한 화보 컷도 눈에 띈다. 오른쪽 여성이 다른 한 명에게 책을 읽어주는 듯한 모습이다. “두 캐릭터가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서로의 존재에게 녹아드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책을 읽고 있는 여성의 나이가 더 많아 보이죠. 옆자리에 앉은 어린 여성의 엄마일 수도 있고, 친구 같은 언니일 수도 있어요. 젊은 여성이 지루한지, 졸린지 아니면 그저 듣고 있을 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른쪽 여성이 읽고 있는 책은 페이즐리 리빙스턴(Paisley Livingston)이 쓴 <잉마르 베리만과 예술의 의식(Ingmar Bergman and the Rituals of Art)>이라는 책이에요. 흥미롭게도 이 책의 첫 장 제목은 ‘예술가의 가면’이랍니다.”
- 포토그래퍼
- Gillian Wearing
- 글
- Alex Needham
- 스타일리스트
- Gillian Wearing
- 패션 어시스턴트
- Luke Boxall, Hugh Campb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