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의 화려한 데뷔

김민지

이 명민한 디자이너의 타고난 관능미는 앤 드뮐미스터의 절제된 확고함에 녹아들었고 그 결과 2023 F/W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고요한 호수처럼 자신만의 길을 걷는 브랜드에도 스타 디렉터는 필요했을까. 사내 디자인팀 체제로 운영되던 앤 드뮐미스터(Ann Demulemeester)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며 화려한 데뷔를 알린 디자이너 루도빅 드 생 세르냉(Ludovic de Saint Sernin) .이 명민한 디자이너의 타고난 관능미는 앤 드뮐미스터의 절제된 확고함에 녹아들었고, 발망 쿠튀르 하우스에서 경력을 쌓은 노련함은 성공적인 2023 F/W 컬렉션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파리와 서울에서, 화상으로 만난 그는 부쩍 웃음이 많았고, ‘행복하다’는 말을 수시로 사용했다.

“유니섹스이고 젠더리스라고 하지만 엄연히, 그리고 자연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신체는 다르니까.

나와 브랜드와의 차이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관점이 바로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앤 드뮐미스터는 더 큰 브랜드이고, 고객층과 브랜드의 역사를 고려해서 만들어야 한다.”

-루도빅 드 생 세르냉

<W Korea> 반갑다. 앤 드뮐미스터(Ann Demulemeester)의 수장으로서 데뷔 컬렉션을 치렀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Ludovic de Saint Sernin 컬렉션을 치른 지 서너 주 지났다. 돌이켜보면 정말 아름답고 다양한 감정이 든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나의 앤 드뮐미스터 데뷔 쇼를 보러 발걸음해주었고 축하해주었다. 감사와 감동이 가득한 하루였다. 쇼 이후엔 오스카 시상식 드레스를 위해 LA로 날아갔다. LA에서도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일했고, 그 이후에야 휴식이라고 할 만한 짬이 생겼다.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쏟아졌으니, 온전한 휴식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웃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의를 받고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처음 이야기가 오간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제안을 받고 정말 흥미로웠다. 왜냐면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브랜드였으니까. 앤 드뮐미스터는 이슈가 많은 브랜드도 아니고,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인상을 준 브랜드라 나의 레이더망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내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시작으로 디렉터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앤 드뮐미스터는 헤리티지가 있는 브랜드이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확실하다. 그리고 옷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도 명확하다. 예전에도 오늘날에도 브랜드가 중요시한 요소들을 쭉 유지해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기로 했다. 기본이 단단한 데다 잠재력이 큰 브랜드니까.

앤 드뮐미스터와 직접 만났다고 들었다. 어떤 얘기를 나눴나?

그 만남은 굉장히 중요했다. 서로를 위해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했으니까. 나는 그와 대화하며 내가 앤이었다면 듣고 싶었을 말을 떠올렸다. 예의와 존중이 담긴 만남에서 우리는 진중하고 섬세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놀랄 만큼 성실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그래서 나도 열심히 일했다(웃음).

이번 컬렉션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었나?

데뷔 컬렉션 영감은 앤 드뮐미스터로부터 얻기를 원했기에 아카이브를 유심히 여러 차례 살폈다. 아카이브가 영감이었다. 가장 호감이 간 것들, 앤 드뮐미스터의 상징적인 요소를 찾아야 했고, 그 안에서 나의 언어를 찾아야 했다. 어느 곳에 어떤 식으로 나의 아이덴티티를 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아쉽게도 이번 컬렉션을 현장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가슴을 가리고 걸어 나온 모델들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손으로 가슴을 가린 모델들이 등장한 앤 드뮐미스터의 과거 컬렉션에 대한 헌사이자 아카이브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짐작했다. 또 다른 한 코드인 깃털도 마찬가지고.

앤 드뮐미스터의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이디어나 생각이 흥미로웠다. 우리가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그 사람에 나를 대입해 생각해볼 때가 있지 않나. 그게 내가 한 것이다. 그 사람이 한 일을 보면서 그와 나의 공통점을 찾고, 어느 지점에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 둘이 만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브랜드 자체로서 접점을 찾고자 했다. 앤 드뮐미스터의 작업에는 유니크하면서 시적 여성성이 가득한데, 그런 측면에서 가슴을 가리고 런웨이를 걷는 건 굉장히 강렬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을 가리고 런웨이를 걷는 것을 두고 어떤 방법을 쓸지 고민도 많이 했다. 앤 드뮐미스터를 표현하지만 그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선보이고 싶어서다. 이번 런웨이에 가슴을 가린 게 나는 하얀 비둘기를 닮았다 생각한다. 깃털을 활용한 오프닝 역시 앤 드뮐미스터 작업의 심벌을 염두에 둔 작업이다. 깃털은 장인과 작업했는데, 진짜 새의 깃털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깃털보다는 그것을 표현한 조각이나 예술품이었다. 그래서 깃털을 가죽과 나무로 다시 작업했다.

당신은 남성의 가슴은 그대로 드러냈는데, 이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등에서 여성의 젖꼭지만 삭제하는 정책을 의식했다는 의견도 있더라.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을 고려한 건 전혀 아니다. 패션쇼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보여주려고 취한 정교한 계산 아래 나온 것이다. 나는 앤 드뮐미스터가 그랬듯이 시적이고 여성스러운 것을 중점으로 컬렉션을 풀어내고 싶었다. 나는 남성복을 많이 한 사람이지만 여성복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젖꼭지만 가린 이유는 앤 드뮐미스터의 아카이브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 앤 드뮐미스터의 여성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모델을 캐스팅할 때 쇼에 올라갈 옷을 걸치는 걸 보며 강한 여성상을 느꼈다. 남자가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나온 것도 아카이브의 일환이다. 앤 드뮐미스터는 처음부터 젠더리스를 아이덴티티로 삼았을 만큼 젠더리스는 이 브랜드의 핵심 정체성이다. 나에게도 중요한 단어이고. 옷이 주는 유연성. 내 컬렉션의 많은 옷이 여성이 입지만 남성이 입기도 한다. 여성복 남성복이 같은 형태가 대부분이다. 여성과 남성의 몸에 맞게 테일러링했을 뿐이다.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몇몇 룩은 루도빅 드 생 세르냉 브랜드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브랜드는 당신 자체이기도 하니까 당연하다. 앤 드뮐미스터는 마니아층이 두텁다. 당신의 브랜드와 어떤 차이점을 두고 디자인하나?

앤 드뮐미스터와 다른 점이라면 여성을 위해서, 남성을 위해서 옷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같은 옷을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입힌다. 하지만 앤 드뮐미스터에서는 같은 옷을 커팅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다.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유니섹스이고 젠더리스라고 하지만 엄연히, 그리고 자연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신체는 다르니까. 나와 브랜드와의 차이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관점이 바로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앤 드뮐미스터는 더 큰 브랜드이고, 고객층과 브랜드의 역사를 고려해서 만들어야 한다.

이번 컬렉션을 마친 후엔 어떤 반응들이 있었나?

주변 친구들이 너무 자랑스러워했다. 큰 도전을 한 나에게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젊은 디자이너가 30년 넘은 브랜드의 수장이 된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고 기뻐해준 것 같다. 내가 느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큰 도전이라 생각한 듯하다. 프레스와 레드카펫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 무척 기뻤다.

당신의 브랜드에 앤 드뮐미스터의 수장이 되면서, 일 년에 네 번의 런웨이 컬렉션을 치르게 되었다. 달라진 당신의 삶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정말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너무나 기대되고 행복하다. 시간에 심하게 쫓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자연스럽게 잘 흘러가고 있다. 개인적인 시간은 없지만, 나의 브랜드이기 때문에, 브랜드와 나를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브랜드이고 브랜드가 나이다. 개인 생활이 나의 영감 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히스토리를(사생활) 매 컬렉션에 넣는 편이다. 나의 개인 생활이 브랜드와 연결되는 것이 행복하고, 그렇게 받는 영감들이 나의 창의성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

당신의 히스토리가 컬렉션에 녹아든다니, 어떤 10대 시절을 보냈는지 무척 궁금하다.

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린지 로한에 완전히 미쳤고, 매일 그녀 그림을 그렸다(웃음). 나에게 패션에 대한 열망을 알려준 사람이다. 나는 예전부터 내가 디자이너가 될 거라 알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패션 파트에서 인턴을 하고, 수업을 들었다. 가능한 한 빨리 내가 디자이너로서 능력을 갖추길 원해서 많은 걸 배웠다.

Ann Demeulemeester fashion show, Fall Winter 2023, Paris Fashion Week.
Photo by Valerio Mezzanotti

디자이너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언제나 나의 브랜드를 꾸리고 싶었고, 유명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 두 개의 꿈을 이뤘고 이뤄가고 있다. 너무나 행복하다.

다음 시즌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처음 내가 왔을 땐 정말 작은 팀이었다. 첫 쇼 이후에 직원을 더 채용했고,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직원이 늘어난 만큼 새로운 컬렉션은 일을 더 세분화해서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결과는 런웨이에서 드러날 거라 믿는다. 첫 번째 컬렉션은 나와 앤, 둘의 마리아주로 방향을 잡았고, 두 우주가 하나로 완성되는 걸 보여주었다. 컬렉션을 거치면서 점점 내가 더 녹아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 컬렉션이 더욱 기대된다.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의 캠페인처럼, 앤 드뮐미스터의 캠페인에도 당신이 등장하기를 기다려도 될까?

오호, 나도 아직 모르겠다. 하하하, 그런 질문 많이 받았는데, 내가 직접 출연하기보다는 내가 상징적으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싶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머리색에 같은 스타일의 긴 머리 남자들과 작업한다거나, 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쇼에 녹여도 재밌지 않을까.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흥미로울 것 같지 않나?(웃음)

에디터
김민지
사진
WILLY VANDERPE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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