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를 기억하는 세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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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3일, 누벨바그의 기수 장 뤽 고다르가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 영화사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거장의 죽음은 마치 한 시절에 대한 영원한 안녕으로도 다가온다. 세 명의 필자가 고다르의 영화와 삶을 추억하며 세 편의 글을 보내왔다. 불멸로 남을 그와 그의 작품에 전송하는 애도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고다르와 괴짜

장 뤽 고다르의 부음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국보를 잃었다”라고 애도한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을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인과 관객이 각별한 존경심을 담아 그와 관련된 기억을 털어놓는 분위기다. 그중엔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다르가 마치 ‘영화의 역사’처럼 다가오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기도 전에 전설이 된 존재랄까. 그를 기리는 부고 기사들 속에서 애꿎게도 ‘영화 천재’ ‘누벨바그의 아이콘’ 같은 아름다운 수식어보다 ‘괴짜’, ‘프로 불참러’, ‘은둔의 고수’ 로서의 면모가 더 강하게 떠올랐다. 여기에는 몇 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

때는 바야흐로 2018년, 칸국제영화제. 영화제가 반환점을 돌 무렵, 기이한 장면 하나가 연출됐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이 손바닥만 한 휴대폰 모니터 앞에서 북새통을 이뤘다. 고다르와 오랫동안 협업한 프로듀서 파브리스 아라뇨 손에 든 휴대폰에 얼굴을 드러낸 이는 은둔 생활을 이어가던 87세의 장 뤽 고다르였다. <이미지의 책>(2018)으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고다르는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 대신, 휴대폰 기자회견으로 기자들을 만났다. 화상 연결이라는 첨단 시스템이 있는데도 굳이! 단상 앞에 줄을 늘어선 기자들이 차례를 기다려 고다르를 만나는 장면은 흡사 아이돌 팬 사인회 현장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었다. 규칙에 갇히길 거부하는 거장의 가장 실험적인 기자회견 같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올해 칸에서 가장 이상한 풍경’이라고 그날을 기록했던가.

기자회견에서 엿본 고다르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을 무렵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을 만났다. 88세가 된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가 (흡사 젊은 날의 고다르를 연상시키는) 프랑스 예술가 JR과 포트 트럭을 타고 프랑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주민들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정의 끝에서 바르다와 JR은 고다르의 집에 이른다. 오랜 친구이자 영화 동료였던 고다르를 만날 생각에 아이처럼 설레하는 바르다. 고다르는 그러나 바르다에게 끝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암호 같은 글만 창문에 남겨둘 뿐. 그것은 만남 요청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었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만의 방식이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먼 길 달려온 친구에게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고집이라니! 닫힌 문 앞에서 실망하던 바르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2019년 바르다는 세상을 떠났고, 마주하지 못한 그날의 만남은 그들의 마지막 인연이 됐다.

고다르의 은둔 기질은 그에게 러브콜을 청한 이들에게 굴곡 많은 사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01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땐, 고다르의 시상식 불참 이유를 두고 여러 잡음이 일기도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내를 통해 이 한마디를 표명했을 뿐이다. “쇳조각을 받기 위해 미국까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2007년 유럽영화상 평생공로상을 거절하면서 남긴 말도 그의 성정을 가늠하게 한다. “나 자신이 뭐 그리 큰 공로를 세웠다고!”

고다르는 감독으로서 꺾이지 않을 명성을 얻었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타협하지 않는 기질과 주변 사람들에 독설을 서슴지 않는 면모로 일평생 ‘괴짜’라는 소리를 들었다. 후배 감독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고다르의 이러한 면모를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2020)에 블랙 코미디로 담아냈다. 배우 안 비아젬스키가 쓴 회고록 <1년 후>에서 출발한 영화는, 안(스테이시 마틴)과 고다르(루이 가렐)의 사랑, 권태, 이별의 과정을 경유하면서 고다르의 고집과 불안과 불평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심지어 지질함까지도. 이 영화에도 훗날 ‘프로 불참러’가 될 그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다. 1968년, 68운동 와중 칸영화제가 열리자 정부를 비판하며 영화제 중단 시위를 주도한 고다르는 안이 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어 하자 마지못해 따라나서는데, 칸에서 돌아오는 좁은 차 안에서 친구들과 갈등을 빚으며 폭발하는 고다르의 모습은 블랙 유머의 정점을 보여준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보기는 했을까.

타인이 자신의 삶에 침투하는 걸 경계했던 고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의료진이 제공한 약물을 스스로 투약해 삶을 마감하는 조력자살. 죽음이 자신을 초대하기 전에 앞장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고다르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길 원했다고 한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서도 세상에 거대한 화두를 투척한 감독.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것과 영화적인 삶을 사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고다르는 명백히 후자다. 죽음마저도 그렇다. 글ㅣ정시우(영화 칼럼니스트)

고다르와 선글라스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예술가 JR을 향해서 장 뤽 고다르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선글라스가 얼굴에 붙어 있다시피 했지만, 언젠가 나를 위해 잠시 벗어준 적이 있다. 오래전이다. 내가 서른세 살 때였으니까.” 바르다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1962)를 촬영할 당시, 고다르는 안경 벗은 얼굴을 카메라에 보여준 적이 있다. 젊은 시절의 순간 중 유일하게 선글라스가 없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고다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물건이 있다. 바로 ‘담배’와 ‘선글라스’다. 정장 재킷에 담배를 물고, 레이밴 선글라스를 낀 고다르의 모습은 흡사 현대 영화의 아이콘처럼 느껴진다. 스위스 RTS 방송이 공개한 1971년 GV 자료에서도 그의 모습은 그대로다. 무대 앞에서 불이 붙은 담배를 든 고다르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네 멋대로 해라>(1960) 촬영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다. “이 영화가 숭고하고 천재적이라고 여기는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그건 사실 과장되었다.” 많은 일이 우연에 의해 성립됐고,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필름에 담겼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신기한 점은 과장되었다는 말조차 그를 돋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믿음은 다름 아닌 고다르로부터 시작된다. 얼핏 그는 자유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처음 보았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반복되는 지점에서 강박이 느껴진다. 오브제만이 아니다.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고다르는 정반합을 충실하게 따른다. 관객은 외형뿐 아니라, 무언가를 해체하는 방식에서도 고다르의 색채를 느낀다.

단편영화 <샤를로트와 남자친구>(1958) 작업 후, 배우 장 폴 벨몽도와 고다르는 여러 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다. 외적으로 벨몽도는 고다르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정석적인 미남은 아니고, 길들여지지 않는 냉소적인 미소를 가졌다. 벨몽도의 라이벌이었던 알랭 들롱과는 상반된 매력이었다. 팬들 사이에서 고다르와 벨몽도는 ‘골몽도’ 혹은 ‘벨몽다르’라 불리며 완벽한 콤비로 인정받았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1965)에서 정점에 달한다. 욕조에 앉아서 책을 읽는 벨몽도의 얼굴, 색칠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로 감싼 그의 얼굴이 흡사 고뇌에 빠진 영화감독처럼 보인다.

<미치광이 피에로>의 장면 중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칸영화제 포스터에도 사용된 적 있는 ‘자동차 키스신’이다. 사실 고다르의 영화에는 매번 많은 자동차가 등장한다. <미치광이 피에로>에는 포드사의 갤럭시 컨버터블이, <네 멋대로 해라>에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차가 나열된다. 벨몽도의 역할이 차를 훔치고 다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레퍼런스, 틀에 박힌 의상, 그리고 습관이 벨몽도를 거쳐서 고다르를 드러낸다. 어쩌면 고다르의 영화는 이 배우를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에 벨몽도는 “정말 구역질 나는군”이라고 중얼거린다. 언뜻 여주인공의 입장에서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되묻게 만드는 모호한 대사다. 하지만 막상 벨몽도의 입장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면, 이 말은 이중적으로 해석된다. 그의 비극이 순전히 ‘허망한 사랑’ 탓에 발생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자 구역질이 난다. 바로 이 부분이다. 고다르의 삶에서 모든 문제는 상대방과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다. 대신 본인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런 면에서 고다르가 진짜 사랑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대로 끝이라 해도, 영화를 찍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고백하는 대사처럼 들린다.

사망 전 고다르는 자신의 묘비명을 ‘반대로(Au contraire)’로 정했다. 아내 안느 마리 미에빌의 추천으로 결정한 내용이라고 한다. 평소 자주 사용한 말이고, 그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담은 문구다. 개인적으로는 선글라스를 생각하자마자 ‘반대로 그는 참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했다. 고다르의 모든 것은 정반대의 것들을 향하고 있다. 그가 사랑한 물건처럼, 명백하지 않은 일관성의 나열이 ‘고다르스러움’을 형성한다.

누군가 고다르의 탄생 이후에 기존의 영화들이 갑자기 ‘늙어’ 보였다고 말했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 “난 늙은이만 좋아”라고 말하는 배우의 입 모양도 떠오른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잘못된 피팅은 잘못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 단편화는 결함이 아니라 원칙이 된다. 그는 모든 것을 부수었고, 그 자리를 영화로 채웠다. 시간에 관한 영화, 기억에 관한 영화, 그리고 그 자신에 관한 영화를 이제는 찬찬히 둘러볼 차례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반영하며, 그의 영화와 다시 만나려 한다. 글ㅣ이지현(영화 칼럼니스트)

고다르와 여인들

1968년 2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장 뤽 고다르는 사람들이 보통 영화를 보러 갈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관객을 바꾸려고 하는 건가?” 라는 질문에 “세계를 바꾸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세상과 영화의 혁명을 꿈꾼 그에게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이 있기에, 고다르는 반세기 동안 새로운 영화를 ‘발명’해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첫 번째 아내, 안나 카리나는 1960년대 고다르의 뮤즈이자 누벨바그의 아이콘이었다. 본명은 한느 카린 베이어로 1940년 덴마크 프레데릭스베르에 태어난 그녀는 17세에 파리로 이주해 모델 일을 시작했다. 고다르는 우연히 광고에 나오는 카리나를 보고 반해 그의 감독 데뷔작인 〈네 멋대로 해라〉(1960)의 단역을 제안했지만 카리나는 작품 속에 누드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일을 계기로 고다르와 인연을 맺고 두 사람은 <작은 병정>(1963)을 촬영했다. 그런데 영화가 1963년에 개봉했기 때문에 대중이 고다르, 카리나 커플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어쩌면 할리우드 뮤지컬에 오마주를 바치는 로맨스 뮤지컬 <여자는 여자다〉(1961)에서였을 거다. 스쿨걸 룩이 돋보이는 안젤라 역으로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낸 카리나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흥행과 평단의 찬사,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비브르 사 비〉(1962)를 필두로 두 사람은 <국외자들>(1964), <미치광이 피에로〉(1965) 등을 포함해 영화 7편을 함께했다. 카리나 역시 고다르의 뮤즈가 된 것을 진심으로 즐겼다. 고다르가 “그 모든 역할을 연기할 수 있는 재능을 줬다”고 말할 정도였다. 1964년 고다르와 카리나는 제작사 ‘아누슈카 필름’을 설립했지만 이들의 동행은 길지 않았다. 1961년에 시작한 결혼 생활은 1965년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고다르의 1960년대 누벨바그 시기는 ‘안나 카리나의 시기’라고 불릴 정도다. 즉 영화광들에게 고다르 영화에 중독되는 것은 카리나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고다르의 두 번째 여인은 독일 베를린 태생의 안 비아젬스키로, 18세에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로 데뷔했다. 브레송의 영화를 극찬한 고다르와 만난 비아젬스키는 마오이즘에 빠져 급진적 영화를 표방한 고다르의 <중국 여인〉(1967)에 출연했으며, 제작하는 동안 그와 결혼하면서 카리나의 자리를 대신했다. 1968년 5월 이후, 고다르는 정치적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감독이자 사상가 장피에르 고랭과 의기투합하였고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해 1970년대 초까지 작업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동풍>(1970), <이탈리아에서의 투쟁>(1971), <만사형통>(1972) 등에서 비아젬스키는 고다르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카리나의 얼굴이 고다르의 초기 영상 미학을 머금은 미장센이었다면 비아젬스키의 등장은 브레히트 소격 효과(낯설게 하기) 같은 형식적 실험뿐만 아니라 베트남전 비판, 마르크스주의 등 정치적 혁명을 상징했다. 드라마와 섬세한 심리 묘사보다는 정치적 행동을 선택한 고다르에게 영감을 준 비아젬스키는 영화 속에서 독특하고 신비로운, 가끔은 제멋대로인 고다르의 대변자로 설득력을 더했다. 1970년대 초에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공식적으로는 1979년에 이혼했다. 이후 비아젬스키는 1980년대까지 배우로 활동하다 1990년대 갈리마르에서 소설을 출판하면서 작가가 되었다.

1970년대 초 고다르는 파리에서 치명적인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장기간의 회복기를 거쳐야 했는데, 안느 마리 미에빌의 도움을 얻었다. 그녀 덕분에 고다르의 불행은 곧 행운이 되었다. 그의 영화를 빛냈던 두 명의 스타에 이어, 고독한 영화 작업을 함께 수행할 진정한 동료를 얻었기 때문이다. 1945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난 미에빌은 파리의 친팔레스타인 서점에서 일하는 사진작가로 고다르와 만났다가 그의 동료가 되었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다르의 영화와 비디오 실험에 공감한 미에빌은 대안적인 비디오 제작과 배급 회사인 ‘소니마주’를 프랑스 그르노블에 설립했고, <여기와 저기>(1974), <넘버 투〉(1975) 등에서 고다르와 함께 각본을 쓰다가 공동연출을 했다. 이들은 1978년부터 스위스 롤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텔레비전 방영을 위한 작품이나 고다르가 극장용 작품으로 복귀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79) 등을 완성했다. 고다르는 미에빌의 각본으로 <그녀의 이름은 카르멘>(1983)을 선보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건재함을 알렸고,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영화 2×50년>(1995)에 이르기까지 미에빌은 지속적으로 고다르 영화에서 각본, 편집, 공동연출을 맡았다. 미에빌은 스위스에서 작업하면서 점점 은둔자가 된 고다르의 영혼의 파트너였다. 영화 작업에 있어 철저히 금욕주의적 직업 윤리를 실천한 고다르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동반자였다. 한집에 살지 않지만 모여서 늘 아침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부부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고다르가 영화보다 영화적인 삶을 자신의 의지(안락사)대로 마무리할 때 미에빌과 함께였다. 글ㅣ전종혁(영화 칼럼니스트)

피처 에디터
전여울
사진
COURTESY OF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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