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 액션물 <헌트>는 알찬 영화다. 그야말로 역대급 카메오들이 구석구석 침투해 있다.
영화 <헌트>는 공개 전만 해도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영화계의 가장 강력한 깐부 ‘정우성과 이정재의 투톱’ 정도로 언급됐다. 당연히 영화에 대한 소개와 관람 포인트의 무게도 우르르 여기에 쏠렸다. 하지만 정체를 드러낸 <헌트>는 그것 말고도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게 확인되었다. 밀도 높은 이야기와 수준급의 완성도에는 ‘웰메이드 첩보 액션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으며, 스파이를 색출해 나가는 스토리는 정교하게 짜인 심리전과 굵직한 액션을 관객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켰다. 배우들의 이름값은 또 어떻고.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이정재와 정우성의 지독한 열연은 두말할 것 없고, 그야말로 쟁쟁한 카메오들이 치고 빠지며 외의의 놀라움과 재미를 준다. 게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관객들을 수다스럽게 만든 것도 이들의 공이 크다. 짧은 등장이지만, 몇 배나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헌트>의 특별출연 배우들. 이름만 들어도 과연 역대급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 스포일러 주의. 영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남길, 박성웅, 조우진, 주지훈
<헌트>의 이야기는 소설의 챕터처럼 몇 가지 첩보전으로 크게 나뉜다. 그중에서도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가 일본 도쿄에서 작전을 펼치는 에피소드는 십중팔구 관객들의 입에 가장 먼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다. 시가지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추격 신과 총격전도 인상적이지만 해외팀 요원들로 특별출연한 김남길, 박성웅, 조우진, 주지훈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통째로 이끌어가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깜짝 등장한 건데, 이정재 감독이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 꽤 흥미롭다. ‘요원1’을 연기한 박성웅, ‘요원2’의 조우진은 대사가 있는 반면 ‘요원4’ 주지훈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한마디 말도 없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래도 주지훈은 ‘요원3’ 김남길에 비해 사정이 낫다. 김남길은 무슨 꿍꿍이인지 분장에 힘을 줘 관객들 사이에서 ‘김남길 찾기’ 미션이 돌 정도다. 이정재는 인터뷰를 통해 이토록 화려한 카메오들이 따로따로 등장할 경우 자칫 관객의 몰입이 깨질 수 있어 한꺼번에 몰아넣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이 나왔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편 성공적인 감독 데뷔작을 내놓은 이정재에게 연출 차기작 계획을 묻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바라건대 김남길, 박성웅, 조우진, 주지훈이 해외팀 요원들로 고스란히 등장하는 <헌트>의 스핀오프 작품은 어떨까? 이정재 감독님, 만들어 주면 보겠습니다. 꼭요.
이성민
정우성의 차기작 <서울의 봄>에 함께 출연한 이성민도 <헌트>에 힘을 더했다. 그는 박평호의 회상 장면에 등장해 도가 튼 듯한 넉살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주지훈, 김남길의 특별출연과 다른 점이라면 슬쩍 보태는 식의 비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민이 맡은 정보원 역할은 이야기 흐름상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능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가 박평호에게 정체를 밝히면서 남긴 말이 시종일관 반전으로 점철된 스토리의 마지막 퍼즐처럼 짜 맞춰진다. 또 다른 얘기이지만 이런 물음이 하나 떠오르기도 한다. 극중 이성민은 넌센스 퀴즈를 몇 개 던지는데, <헌트>가 칸영화제에 초청되어 선보였을 당시 이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몹시 궁금하다. 퀴즈의 내용은 이렇다. “여름에 벌이는 전쟁은? 더워. 겨울에 벌이는 전쟁은? 추워.” 만약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면 그건 어떤 웃음이었을까?
황정민
<신세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이정재와 끝내주게 호흡을 맞췄고, 정우성과는 <아수라>를 통해 조우한 황정민의 존재감은 <헌트>에서 ‘특별출연’이라 쓰고 ‘신스틸러’이라 읽는 게 합당하다. 역할적으로, 연기적으로 도미노처럼 영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히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황정민이 맡은 역할은 북한에서 귀순한 공군 파일럿 리중좌. <헌트>가 이룬 성과 중 하나는 영화적 허구에 실제 역사적 사건을 절묘하게 안착시켰다는 점으로, 황정민의 캐릭터 역시 1983년에 일어났던 미그기 귀순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영화의 전개는 전환점을 맞는다. 이야기에 불꽃이 번지고, 사건과 갈등은 연쇄적으로 급물살을 탄다. 그보다 더 말하고 싶은 건 황정민의 연기다. 꽉 막힌 취조실에서 기세등등한 모습을 유지하던 리중좌는 안기부 요원 김정도(정우성)의 도발에 휘둘려 맹렬한 기세로 폭발하는가 싶다가도, 금세 판의 흐름을 눈치챈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히든카드를 내밀어 수싸움의 우위를 점한다. 황정민은 이 시퀀스를 한바탕 휩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의 판으로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밀도가 높은 장면인 만큼 임팩트도 크다. 여기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받아주는 역할에 집중한 듯한 정우성의 몫도 포함되어 있다. 황정민은 과거 특별출연한 <달콤한 인생>을 통해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예나 지금이나 황정민에겐 역할에 따른 제약이나 한계가 없어 보인다. 혹은 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 프리랜서 에디터
- 우영현
-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