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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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트, 디자인 신에서 가장 자주 출몰하는 표현은 ‘다원적’ 혹은 ‘다학제적’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장르가 확장되거나 서로 다른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때론 결합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형태의 창작물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굳이 다원적 혹은 다학제적이라는 말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기 소개하는 아트, 디자인 콜렉티브 4팀의 작업을 보면 그 다층적인 우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티슈 오피스 @tissueoffice 
구기태, 이상익, 조영, 이승아, 이창훈, 최하준 

메타버스를 타고 떠나는 화성행 프로젝트
‘화성’에 진심인 여섯 사람이 모였다. 때는 2019년 스페이스X의 일론 머스크가 화성 탐사에 열을 올리던 무렵. UX/UI 분야의 이상익과 조영, 프로그래밍의 이승아와 구기 태, 3D, AR, VR의 이창훈, 그래픽 디자인의 최하준은 다학제적 그룹 ‘티슈 오피스’를 결성했다. 2021년 이들이 론칭한 ‘히든 오더’는 화성을 배경으로 한 문화예술 메타버스로, 아바타로 변신한 플레이어가 디지털로 구현된 화성 곳곳을 탐사하며 전시, 공연 등의 다양한이벤 트를 체험하는 모바일 게임이다. 단순한 게임을 넘어서 문화예술적 요소를 밀도 높게 채우고 이를 메타버스 기술로 새롭게 구현한 새로운 시대의 게임, 티슈 오피스는 이를 향해 지금도 탐사 중이다. 

우리는 | 2019년 건축가, 디자이너, 개발자, 공학자 등 각기 다른 분야에 머물러 있던 이상익, 이창훈, 조영, 이승아가 만나 결성했다. 최근 뇌과학을 전공한 개발자 구기태, 디자이너 최하준이 합류하며 지금의 6명이 되었다. 주요 매체로 ‘게임’을 다룬다. 농담 반 진담 반, 우리의 명함에도 적었듯 ‘서울특별시의 게임 판매점’이다.

화성으로 떠나자 | 2019년 팀원 모두가 스페이스X의 화성 프로젝트에 빠져 있었다. 가까운 미래 지구는 자원이 고갈될 것이며 미리 화성으로 떠나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보고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도 다가올 미래를 티슈 오피스를 통해 이룩하자.’ 그렇게 ‘현실:미래=지구:화성’이라는 우리만의 비례식을 세워 화성을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일이 가능해지는 새로운 영토로 그리고자 했다.

히든 오더 | 꼭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더라도 2030세대가 시간이 흐를수록 디지털 환경 속에서 더 고품질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향유하는 경험을 원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떠올린 기술이 메타버스였다. 메타버스는 히든 오더라는 게임을 통해 문화예술계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경험을 모두 한곳으로 모으려는 우리의 취지를 전천후로 구현해줄 기술이었다. 지금까지 서울시립미술관,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등이 히든 오더에서 디지털 전시를 개최했다. 앱스토어에서 히든 오더를 다운로드해 접속하면 액정 가득 안개가 자욱하고, 빨갛고 울퉁불퉁한 지형으로 이뤄진 화성이 펼쳐진다. ‘숨겨진 질서’ 라는 히든 오더의 뜻처럼 익숙하지도 뚜렷하지도 않은 이 행성에서 플레이어는 탐사를 수행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마주하게 된다.

내 눈썹이 불법이라니 | 지난해 7월 문화연대와 함께 국내 최초의 메타버스 집회 ‘내 눈썹이 불법이라니’를 개최했다. 2021년 6월 11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타투업법 대표 발의 이후 타투 합법화를 요구하며 열린 집회였다. 사실 집합 장소만 가상의 화성이었을 뿐, 집회 내용은 기존과 다를 바 없었다. 화성에 떨어진 아바타들이 시위를 위해 디자인된 눈썹 모양의 코스튬을 입고 행진했는데, 그 풍경이 참 흥미로웠다. 종종 대열이 흐트러지면 인솔자 아바타가 ‘줄 제대로 서주세요’라고 채팅창에 적기도 하고(웃음). 사람들이 생각보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집회를 잘 받아들이고 또 즐겨서 우리 사이에서도 ‘이게 되네?’ 싶은 프로젝트였다. 류호정 의원, 대한문신중앙회 이사장 임보란 등 300여 명의 집회 인원이 끝으로 무지개 조형물에서 행진을 마쳤을 땐 어떤 감동이 있었다.

인문학에서 길어 오기 |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신상 맛집을 찾아다니듯 최신 미학이나 철학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서로 공유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게임을 제작할 때 주로 인문학에서 힌트를 얻곤 한다. 예를 들어 파주 타이포그래피 학교에서 열린 전시 <안녕, 코로나19 국제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을 위해 만든 디지털 게임에는 미술가 히토 슈타이얼의 ‘자유 낙하’ 개념을 적용했다. 자유 낙하는 인지적 토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말하는데, 이러한 상황이 코로나19 이후 뒤바뀐 환경, 감각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계속 점프해서 아래로 떨어져야만 완결되는 맵을 만들기도 했다. 이 외에 들뢰즈의 ‘동물-되기’ 개념에 착안해 ‘링크: 비커밍 에루탄’ 게임을 제작했는데, 이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 동물 ‘에루탄’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퀘스트를 수행하는 내용이다. 결국 게임의 모든 것은 플레이어의 ‘행동’으로 이뤄지는데, 인문학적 개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 그걸 행동 규칙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만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 게임은 일련의 경험 디자인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경험을 확실하게 느끼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 하나에 하나의 가치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원 게임, 원 밸류!

밴드 바우어 @bandbower
샤이 아시안, 고요손, 임승택

감각의 제국을 향한 새들의 비행
밴드이되 밴드 아닌 밴드. 다소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말은 어쩌면 밴드 바우어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지금 미술 신에서 뜨겁게 호명되고 있는 밴드 바우어는 2018년 조각가 고요손, 뮤지션 샤이 아시안, 무대 디자이너 임승택이 모여 결성했다. ‘무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것’을 음악, 미술 등의 매체로 전하는 가상의 콘셉추얼 밴드로 2019년 플랫폼엘에서 <Birds Eye View>, 2020년 퓨처 소사이어티에서 <춘몽春夢> 등의 전시를 개최했다. 전시장 바닥에 깔린 수상한 지도, 악기를 빙자한 설치미술 작품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소리 등 이들의 전시장에 발을디딘 이들은 전시를 소개하는 어떠한 서브 텍스트 없이 오로지 ‘감각’에 집중하는 새로운 전시 경험을 체험한다. 자신들의 작업을 ‘사운드 아트팝’이 라 정의하는 이들은 ‘소리’를 통해 낯설고도 기묘한 감각의 제국을 꿈꾼다. 

우리는 | 2018년 생면부지의 세 사람이 만났다. 인스타그램 DM을 통해서. 가상의 밴드를 만들고자 했던 조각가 고요손이 뮤지션 샤이 아시안, 무대 디자이너 임승택에게 DM을 보내 결성했다. 셋 다 대학 졸업을 앞둔 때였고 창작 욕구가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처음 만날 날 서로가 약속한 것은 ‘나이 까지 말 것’. 평등한 관계 아래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실험적인 것을 하자는 약속을 했다.

바우어새 | 우연히 바우어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날 밴드 이름을 짓게 됐다. 바우어새는 한평생 자기 주변, 자기가 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쓰레기, 나뭇가지 등을 주워 둥지를 짓는다. 그것도 아주 미학적인 둥지를. 처음 바우어새의 행태를 보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우리는 저 새만도 못할까’(웃음). 너무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셋 다 취향이 다르지만 대신 각자 좋아하는 것을 모아 하나의 큰 둥지를 짓고 사람을 초대해 거기서 퍼포먼스를 하며 감각을 전해주고자 결성했다.

밴드이되 밴드 아닌 | 시작은 단순히 ‘가상의 밴드를 하고 싶다’는 고요손의 아이디어였다. 다만 음악이라기보다 ‘소리’를 하는 밴드. 스티로폼을 주재료로 비정형의 조각 작품을 전개하는 고요손은 2021년 얼터사이드에서 첫 번째 개인전 <미셸>을 전개했는데, 전시는 ‘미셸 공드리가 영화에서 사용하는 무대미술 장치를 스크린이 아닌 전시장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이처럼 조각을 통해 하나의 ‘극’을 만들기도 하는 고요손은 자신의 조각이 무대 세트가 되고, 소리가 곁들여졌을 때 어떤 장면이 탄생할지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가상의 콘세추얼 밴드를 떠올렸다. 이왕 밴드를 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공연도 펼치고 피지컬 CD도 발매하고 밴드로서 화보도 찍기로 했다. 으레 밴드들이 하는 큰 틀은 따르면서, 그 안에서 낯설고 이상한 것들을 불쑥불쑥 보여주면 관객에게 좀 더 이질적으로, 또 한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 같았다.

세상에 없던 악기 | 기성 악기는 연주를 하면 어떤 음이 나올지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누르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한 악기를 만들고 싶었다. 공연할 때 우리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재미있는 사운드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래서 상자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를 호스로 연결한 ‘사운드 부쉬’, 옷걸이 두 개에 모터를 달아 서로가 부딪치며 랜덤하게 소리가 들리는 ‘사운드 트리’, 구슬이 사포를 긁으며 마찰음이 나도록 디자인한 ‘사운드 링’을 제작했다. 간혹 사운드 링에서 수많은 구슬이 와르르 구를 때 기성 악기인 드럼보다 더한 드라마틱한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비행 4부작 | 어쨌든 우리는 ‘바우어새’이기 때문에 둥지를 지어야 했다. 그 첫 둥지는 2019년 가을 플랫폼엘에서 열린 전시 <Birds Eye View>라 할 수 있다. 새가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리적 위치나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며 시작한 전시였다. 전시장 바닥에 비행 지도라 명명한 알록달록한 카펫을 깔았고 관객들에게 원하는 위치에 앉아 우리의 공연을 감상하게 했다. 첫 전시를 끝내고 비행을 여러 부작으로 확장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전시가 바깥 계절과 맞닿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계절성’도 전시에 녹이게 됐다. 그래서 이후 2019년 겨울 탈영역우정국에서 개최한 <스노우피크>에서는 눈을 바닥에 던졌을 때 흐트러진 모양에서 착안해 방석을 만들었고, 2020년 봄 퓨처 소사이어티에서 연 <춘몽春夢>에선 냇가에 햇살이 비치며 생기는 프리즘 현상을 방석에 녹여내기도, 2020년 여름 플랫폼엘에서 연 <Space Birds>에선 비행의 다음 행선지인 우주를 생각하며 바닥을 검게 칠하기도 했다.

사운드 아트 팝 | 사운드 아트가 있는 이유는 청각의 확장, 감각의 확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운드 아트는 전시장과 같은 곳에서나 접할 수 있는, 평소 쉽게 찾아 듣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업할 때나 공부할 때, 친구들과 놀 때 찾아 듣고 싶은 사운드 아트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의 음악을 정의할 때 사운드 아트 뒤로 ‘팝’이란 말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음악은 멜론 같은 음원 사이트에서 스트리밍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사실 우리가 왜 비행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프리퀄 형식으로 풀어보고 싶기도 하다. 또 언젠가 밴드 바우어로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도 나가고 싶다(웃음). 온통 낯선 것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음악 방송이나 록 페스티벌처럼 낯설지 않고 편안한 무대에서 보여주는 게 목표다.

입자필드 @particle.field
엄정현, 김성령, 박태경

영상 매체로 나타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
2019년 디자이너 엄정현, 김성령, 박태경이 결성한 입자필드의 영상 작업에는 모션그래픽, 애니메이션, VFX, VJing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시각 효과가 용광로처럼 한데 뒤섞여 있다. 디자인 1978, 하이트 컬렉션, 코오롱스포츠 한남에서의 전시 외에도 에스파, 아이브, 크러쉬와 같은 케이팝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이름을 알린 이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는 유머러스함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 유 머’는 입자필드를 말하는 중요한 단서다. 케이팝 문화, 인터넷에 떠도는 밈을 주요 장치로 사용하는 이들의 영상에는 다분히 서브컬처적인 코드가 무질서하게펼쳐 지는데 한 번 봤을 땐 머리를 갸웃하다가도 이내 은연중에 반복해서 보게 된다는 점에서, 이를테면 ‘새티스파잉 비디오’(Satisfying Video)와도 같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영상 스튜디오. 대학교 영상 소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2010년대 초중반 학교를 다니던 무렵만 해도 주변에 3D 그래픽을 다룰 줄 아는 작업자가 적었다. 이렇게 셋이 거의 유일하게 3D 그래픽을 다루며 매일같이 컴퓨터실에 늦게까지 남아 머리를 싸매는 멤버였다. 작업을 잘하는 건 기본, 서로 개그 코드가 맞아 함께하기로 했다.

케이팝과 입자필드 | 우리가 결성한 2019년부터 케이팝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와 맞물려 케이팝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작년은 하이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필름 영상, 하이브의 신규 레이블 ‘어도어’의 프로모션 콘텐츠로 제작한 3D 그래픽 영상, 에스파의 ‘Savage’ 뮤직비디오 작업에 매진한 한 해였다. 이 중 하이브의 BI 필름은 ‘We Believe in Music’이라는 슬로건과 브랜드의 컬러 코드 3가지 정도만 가이드가 주어진 작업이라 우리가 재해석할 여지가 많아 흥미로웠던 작업이다. 셋 다 학창 시절부터 케이팝 문화를 좋아했던 터라 아무래도 관련 작업을 진행할 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 막연히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하면 좋았을 텐데’ 싶었던 걸 이제는 우리가 직접 작업자로서 구현해낼 수 있으니 왠지 ‘성덕’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웃음).

우리가 사랑하는 것 | 셋 다 인터넷 문화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그 당시 유행한다는 밈을 서로 공유하는 건 기본이고 취향도 워낙 잡식성이라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별의별 영상이 다 뜬다. 아이돌 직캠부터 새티스파잉 비디오, 무당 콘텐츠, 전통시장에서 호떡 굽는 영상까지(웃음). 그런 점에서 2020년 하이트 진로가 운영하는 갤러리 ‘하이트 컬렉션’ 전시를 위해 만든 영상 ‘달라이 라마의 피드 디오라마 드라마’는 그간 우리가 즐겨 향유했던 인터넷 문화를 총집합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아이디어는 ‘인터넷에서 가볍게 넘기며 소비되는 것들을 ‘찐득하게’ 만들어보자’였다. 보통 인터넷 밈은 화질이 열화되어 있기 마련인데 <무한도전>의 밈 중 하나인 ‘무야호’ 아저씨를 4K로 구현해보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편해지는 요가 튜토리얼,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5인조 걸그룹의 무대 영상을 삽입하기도 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다분히 서브컬처적이지만 그 ‘때깔’ 만큼은 그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퀄리티로 뽑아보자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그 모든 요소가 재미있는 방식으로 트랜지션될 때 묘하게 쾌감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다는 방향성도 있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문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작업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업이었던 것 같다.

급기야 개국한 방송국 | 2020년 경기도상상캠퍼스의 ‘디자인 1978’에서 진행한 기획전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에 참여하면서 일종의 ‘방송국’을 만든 적이 있다. 기존 TV 채널에서 볼 수 있는 뉴스, 시트콤, 다큐멘터리, 교양 프로그램 등을 우리 식으로 패러디해 영상을 만든 거다. 그중 ‘어느 날, 하늘에서 수건이 떨어졌다’는 시사 다큐 형태를 표방하는데, 2020년 어느 봄 하늘에서 수건이 떨어졌는데 알고 보니 2070년 첨단 대중 목욕탕에서 시공간이 잠시 휘는 사건이 발생해 2020년 현재로 떨어진 것이라는 황당한 플롯을 갖고 있다(웃음). 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채로 목소리로만 데이팅하는 넷플릭스 예능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에서 착안해 AI와 인간이 데이팅하는 내용의 영상 ‘AI시떼루’,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패러디한 ‘세상에 나쁜 로봇은 없다’라는 영상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미래를 우리만의 시각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작업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SF 시트콤을 만들어보자고 시작했지만 역시 또 개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해 산발적으로 나온 아이디어들을 전부 영상으로 구현한 기억이 있다.

최근의 관심사 | 언리얼 엔진에서 출시한 ‘메타휴먼 크리에이터’. 1시간 미만으로 사실적인 나만의 디지털 휴먼을 제작할 수 있는 클라우드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이다. 그동안은 디지털 휴먼을 제작하는 데 몇 개월씩이나 소요됐다면 메타휴먼 크리에이터는 이 제작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중요한 툴이 될 예정이라고.

우리만의 문화ㅣ분기마다 신경 써서 차려입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간다. 이걸 우리는 ‘고급 회식’이라고 부른다(웃음). 또 연말이면 ‘입자필드의 밤’이라는 시상식을 개최한다. 연말 방송사에서 하는 시상식에서 유형화된 것들, 클리셰를 우리 식으로 비틀어 노는 시상식이다.

ISVN @isvn.games
멜트미러, 김한주, 김정각, 백윤석, 김도이, 수퍼샐러드, 이유미

게임이라고 주장하거나 간주되는
ISVN은 매체와 상관없이 게임으로 ‘간주되는’ 것의 제작을 목표로 2018년 결성했다. 즉 게임과 게임의 뉘앙스만을 차용한 영상 매체가 이들의 주요 작업. 초기 다큐멘터리 채널 ‘더 도슨트’의 영화감독 백윤석, 밴드 실리카겔의 보컬 김한주, 영화감독 김정각, 영상감독이자 게임 개발자 멜트미러로 시작했지만 이후 만화가이자 배우 김도이, 할로미늄의 디자이너 이유미, 그래픽 디자이너 수퍼샐러드가 합류하며 총7명 이 됐다. ISVN은 자신들을 ‘각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만나 ‘비교적 성실하게’ 작업하는 콜렉티브라 소개한다. 이들의 느슨하고도 유쾌한 기조는 고스란히 작업 에녹아들어 상투적인 게임엔진을 사용해 모호한 장르의 게임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게임 역사에 진지하게 접근해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풍성한 게임 매뉴얼 을제작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실리카겔의 싱글 ‘ Desert Eagle’의 발매에 맞춰 밴드의 세계관을 녹인 TRPG 게임 ‘ Desert Eagle : Cross-Space Congress’를 출시했다. 올해 2월 13일까지 ‘화이트노이즈’에서 진행하는 단체전 <나타나엘의 눈동자>에 참여한다.

우리는 | 처음 실리카겔의 보컬 김한주와 영상감독 멜트미러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2017년 멜트미러가 실리카겔의 두 번째 EP <SiO2.nH2O>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은 이후 계속 교류하다 서로의 공통 관심사인 게임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펼치고자 ISVN을 결성했다. 이후 자연스레 ‘게임 덕후’들이 모이며 지금의 ISVN이 만들어졌다.

게임 스터디 | 주기적으로 게임 스터디를 갖는다. 게임의 역사,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게임의 본질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스터디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게임을 마니악하게 즐긴다기보다 ‘매체로서의 게임’에 관심이 높은 것 같다. 게임이 가진 형식이나 텍스처에 매력을 느끼고 게임을 단순 오락 수단이 아닌 사람들이 접속해 대화도 나누고 안부를 묻는 정서적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옛날 친구들이 다 같이 만나 놀았던 놀이터처럼. 그래서 실제 게임 제품을 출시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우리끼리 게임이라고 간주하거나 주장하는 식의 영상 작업도 많이 하는 편이다. 실제 2019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 <퍼폼2019: 린킨아웃>에 출품했던 ‘Action 3.0’도 컴퓨터 게임의 형식에서 모티프를 얻어 제작한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이었다.

함께 만든 세계관 | 지난해 12월 TRPG 게임 ‘Desert Eagle : Cross-Space Congress’를 출시했다. 실리카겔의 싱글 ‘Desert Eagle’의 발매에 맞춰 밴드의 세계관을 녹인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게임의 시작은 김한주가 파편처럼 던진 노래 ‘Desert Eagle’의 내러티브였다. ‘사막에 행렬이 있는 유령을 데리고 누가 지나간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연대기, 세계관을 만들 수 있는 TRPG 게임 ‘마이크로스코프’를 일종의 시나리오 라이팅 툴로 사용하며 8000년을 넘나드는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세계관을 손쉽게 요약하자면 ‘사형 집행자 데저트 이글이 추방당한 신들을 데리고 황량한 사막을 횡단한다. 그리고 그들이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던 죄목은 다양성과 급진적인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 게임은 총 2~5명의 플레이어가 서로 카드를 주고받으며 약 50분간 진행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는 파티 게임적 요소도 있지만, 세계관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경계의 끝에 놓인 가치들, 우리는 어디까지 무언가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게임으로 완성된 것 같다.

생명안전지도 | 2018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 <더블 네거티브: 화이트 큐브에서 넷플릭스까지>에 참여한 적 있다. 당시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 ‘[신규] 생명 안전지도’를 출품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부에서 국민 안전과 예방을 위해 필수적인 안전 정보를 지도상에 통합해 제공하는 서비스 ‘생활안전지도’ 형태를 전유한 작업이었다. 서울, 특히 광화문이나 종로를 거닐면 조현병적인 문장과 마주할 때가 잦았다. 시위 팻말, 벽 낙서, 간판 등에서 미묘하게 어떤 경계에 있는 문장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들을 모두 매시업해 다층적인 형태의 지도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영상이었다. 명칭은 ‘생명안전지도’지만 그것이 생명을 돌봐준다기보다 정작 죽음을 말하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싶었다. 백윤석, 김한주, 멜트미러가 모여 거의 처음으로 함께한 작업이었는데, 특히 김한주는 군에 있을 당시여서 휴가를 나올 때마다 틈틈이 음악 작업을 해준 기억이 난다.

우리의 공통점 | 실제론 일곱 명 다 성격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다들 젠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예술, 디자인 신에서 만난 여느 작업자들과는 다른 무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각이 안 잡혀 있다’라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그렇기에 인간미가 있어 좋은 것 같다. 작업자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소위 ‘구린’ 걸 접했을 때도 단순히 구리다고 배척하지 않고 아예 한 발 나가 그 밑에서 생각해버리는 이상한 구석도 있다. 결국 이게 우리만의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까운 미래에는 | 옛날에만 해도 게임이 출시되면 엄청나게 두꺼운 매뉴얼북이 함께 발간되곤 했다. 마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게임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요새는 효율적인 문제 때문에 매뉴얼북이 없어지는 추세지만 언젠가 오로지 게임 매뉴얼만 있는 매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또 올해 안으로 2017년 웹 전시 <PXTND>에 출품한 컴퓨터 게임 ‘Fog’를 발전시켜 출시하는 게 목표다. 돌이켜보면 ISVN으로서의 작업물이 심심찮게 쌓인 것 같다. 이들을 묶어 정리하는 차원에서 전시도 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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