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과 남길 것 Vol.1

W

말하고 싶고 말해야 하는 2021년의 이야기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을 향한 애정과 호기심의 눈길로, 혹은 우리를 둘러싼 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봤다.

NFT와 메타버스라는 꿈

엔터테인먼트들의 행보를 보니, 이제 아이돌 앨범에 들어가는 포토 카드마저 NFT가 적용된 디지털 포토 카드(디포카)로 바뀔 모양이다. 먼저 디포카라는 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처음엔 앨범을 사면, K팝 플랫폼 앱에서 디포카 10장 한 팩을 뽑을 수 있는 쿠폰을 줄 거다. 구성은 노멀 카드 9장과 레어 카드 1장. 당연히 버전 A, B, C 정도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두 모으려면 앨범 한두 장 가지고는 안 된다. 1,000장 중에 하나꼴로 슈퍼 레어(SR), 10,000장 중에 하나꼴로 슈퍼 슈퍼 레어(SSR) 카드도 있을 테고. 서로 팔거나 교환할 수 있는 장터도 열릴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디포카는 흔한 캐릭터 수집 게임이다. 다만 여기에 ‘NFT’가 붙는다. 그럼 뭐가 좋을까? 그건 일종의 진품 증명서다. 은행 앱 공인인증서처럼, ‘진짜’라는 인증을 외부에서 해주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진품 보증이 되니까 사고팔기도 편하다. 더 비싸게 되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BTS의 첫 SSR NFT 디포카라면, 훗날 꽤 비싼 값을 쳐주지 않을까?

게임 같은 세상인 메타버스에서 NFT를 게임 아이템화하여 사용자에게 귀속시키면, 소유하거나 되팔 수도 있는 사용자의 자산이 된다. 사실은 자산이 될 거라는 ‘믿음’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메타버스에서 NFT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래서 메타버스를 만드는 회사는 사용자에게 게임 머니를 비트코인으로 줘서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하고(Play to Earn, P2E라고 부른다), 메타버스 내 아이템에 NFT를 붙여 팔 수 있는 자산으로 바꿔주려 한다. 게임 아이템에 NFT 하나 붙이면 돈 가치가 생기다니, 이건 완전 마법 아닌가? 당연히 너무 좋은 얘기는 거짓말이다. NFT나 비트코인이 없어도 이런 메타버스는 이미 있다. 1998년에 출시된 온라인 게임, 리니지가 대표적 예다. 과거부터 존재한 리니지와 지금 NFT와 결합된 메타버스는 ‘아이템 거래’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리니지에 비싼 아이템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리니지해서 빌딩 세웠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돈은 늘 그 시스템을 만든 회사가 번다. 게임사는 게임 아이템을 팔아서 벌고, 아이템 거래소는 수수료를 받아서 벌고, 남은 이익은 전문 되팔이들이 가져갈 거다. 이 과정에서 ‘유일하고 독보적인 가치’를 만든 사용자들, 이를테면 그 가치를 믿고 지지한 아이돌 팬들에게 돌아갈 혜택이 과연 있을까? 글 | 이요훈(IT 칼럼니스트)

잘 봐, 진짜 언니들 싸움이다

잘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춤 좀 춘다는 여자들을 모아 춤으로 승부를 겨룬다. 기획 의도만 보자면 ‘이게 왜 이렇게까지 잘됐지?’라거나 ‘이걸 지금까지 왜 아무도 안 했지?’라는 질문이 절로 나오는 엠넷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는 첫 방송을 시작한 8월 24일 이후 비드라마 화제성 순위 1위를 꾸준히 지키며 붐을 일으켰다. 되리라 생각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댄서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연출과 자기표현에 강하다.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바탕으로 표정이나 패션, 신체적 특징마저도 춤으로 승화한다. 한마디로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몸 하나로 오랫동안 세상과 맞서 싸워온 ‘악마의 스타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서는 무대 위에는, 댄서들이 자신의 빛으로 더 빛나게 만들어줘야 할 주인공이 늘 함께였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건 걸스 힙합에서 K팝 안무까지 이미 전공 분야에서는 한 손에 꼽히고도 남을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댄서들이었지만, 한 번만이라도 ‘백업 댄서’가 아닌 ‘댄서’라 불리고 싶었다. 뛰어난 스타성에 돈 주고도 못 살 서사까지 얹혔으니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채널 특유의 구성과 편집, 매회 터져 나온 심사위원에 대한 볼멘소리도 댄서들이 보여주는 ‘진짜’의 에너지에 모조리 압도당했다. 잘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승부욕을 아낌없이 불태우고, 승부가 끝난 뒤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라는 우아하고 강인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넨다. 거기에 이제 이런 여자들을 사랑할 준비가 된 세상까지. 2021년은 마흔일곱 명의 춤추는 여자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의 해였다. 글 | 김윤하(음악 평론가) 

<오징어 게임>이 쏘아 올린 공 

‘재주는 한국이 부리고 돈은 넷플릭스가 챙긴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제작사와 나누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지만 넷플릭스는 제작사에 제작비의 10%를 상회하는 비용만 지급했을 뿐, 추가 수익을 배분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좀 이상한 질의라고 생각했다. 콘텐츠가 벌어들인 수익을 배급사와 제작사가 나눠 갖는 셈법은 한국 극장가 말고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한국 영화는 극장 매출에서 부가가치세 10%와 영화발전기금 3%를 빼고 극장과 투자배급사가 5:5로 수익을 나눈다. 배급사가 극장 매출의 10%를 배급 수수료 명목으로 챙기고, 투자배급사의 몫 중에서 총제작비를 제하고 남은 순수익을 투자배급사와 제작사가 6:4로 배분한다. 영화가 흥행하면 제작사가 돈방석에 앉는 것도 순수익의 지분이 무려 40%나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을 제외한 할리우드, 중국 등 전 세계 영화 산업에서 제작사는 기본적으로 투자사로부터 프로덕션 피(fee)만을 지급받는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도 프로덕션 피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넷플릭스는 총제작비의 5~10%에 상회하는 금액을 제작사에 지급하는 대가로 영화를 유통할 수 있는 권리를 챙긴다. <오징어 게임> 또한 이러한 셈법에 따라 제작비의 10% 상회하는 프로덕션 피를 받은 것이다. 작품, 감독, 제작자에 따라 OTT로부터 보장받는 순수익률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사에 프로덕션 피를 5% 정도밖에 주지 않는 이유는 제작비에 대한 리스크를 직접 감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OTT는 개별 콘텐츠에 지불한 비용에 대비한 이익을 산출하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극장처매출을 집계하는 방식이 아닌, 이용자들의 구독료로 운영되니까.

별도의 수익 배분 없이 프로덕션 피만 지급하는 셈법을 두고 한국 제작사는 글로벌 OTT의 외주 프로덕션 기능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모두가 넷플릭스 투자를 문의하기 위해 줄을 선 지금은 그런 우려가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오징어 게임> 같은 성과가 계속 나온다면 계약서에 별도의 수익을 요구하는 옵션이 추가될 수도 있다. 마침 최근 한국을 방문한 넷플릭스 정책총괄 부사장이 “한국의 창작자들이 만든 콘텐츠 성공은 과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추가 수익 배분을 논의 중”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는 말이다. 글 | 김성훈 <씨네21> 기자

퀸의 귀환

이 모든 배우를 드라마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랍기만 한 2021년 하반기에, 얘기할 것이 고작 시청률밖에 없을까? 6명의 배우가 가진 힘을 새삼 상기해본다. 

전도연의 선택과 배짱
전도연이 오랜만의 복귀로 대중의 사랑을 구하려 했으면 <인간 실격>의 이부정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폐지 줍는 늙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아버지보다 가난해질 것 같다고 울먹이는 40대 여성의 이야기에 개운한 결말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도무지 드라마를 끊지 못하고 끝까지 따라가다가 알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죽음을 결심하냐고 비웃을 작은 일들’ 로 무기력과 울화를 오가는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음을. 당신이 잠깐씩 숨통을 틔우는 순간을 만나 다행이라고, 그렇게 작은 다행들을 새기는 드라마의 가치를 낮은 시청률로 지우진 못하겠다. 이부정은 어지간한 배짱 없이는 도전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닮은 구석은 외면하고 싶어지는 인물이고, 이전에 살아오던 일상을 더는 지속하지 못하고 삶에서 들떠 있는 상황이라 생활감을 부여하기도 쉽지 않다. 전도연의 연기를 읽어내는 중요한 채널인 이마와 미간도 앞머리로 다 가려버린 게 이부정이다. 그럼에도 이부정이 또렷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현금지급기에서 단기카드대출로 오만원권 두 장을 뽑는 장면에서 언제나 돈의 무게를 고스란히 실감케 하는 전도연의 지난 작품들이 떠올랐다. 헤어진 애인에게 빌려준 돈 350만원을 받으러 갔던 <멋진 하루>, 술집 외상값을 수금하러 가던 <무뢰한>, 아이의 유괴범에게 건넬 870만원을 인출하던 <밀양> 등등. 맡은 캐릭터 모두는 자연인 전도연과 닮았는데, 각각은 서로 닮은 구석이 없는 점이 늘 놀랍기도 하다. 자기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마주치고 또 모른 채 스쳐 지나는 장면을 문득 상상해본다. 전도연은 그렇게,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한 세계의 구성원을 늘려가는 게 아닐까. 글 | 유선주(TV 칼럼니스트) 

전지현뎐
스타에게 장점은, 뒤집으면 뼈아픈 굴레다. 전지현이라는 ‘밀레니엄 아이콘’의 등장 이후 산업은 달콤한 이미지만 빼먹으려 했고, 매니지먼트는 신비주의 마케팅으로 몸을 사렸고, 그 안에서 전지현은 헤맸다. 전지현의 재도약이 그가 처음으로 캐릭터를 능동적으로 구애해서 따낸 <도둑들>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별(★)들이 떼로 등장하는 영화를 선택한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 판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이었다. 뭐랄까. 전도연이 연기력으로 내로라하는 남자 배우들을 꼼짝 못하게 한다면, 전지현은 아우라로 상대를 압도한달까. 이어 <베를린>에서 ‘감정 연기가 가능키나 하냐’는 편견의 꼬리표를 지웠다면, <암살>에선 누군가의 연인이나 누이가 아닌 하나의 박력 있는 여성으로 작품을 이끌며 여배우의 영토를 넓혔다. 김은희 작가와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캐릭터 확장을 노리는 전지현에게 김은희가 그려내는 입체적인 인물은 이를 가능케 할 메신저. 물론, 이 만남의 결말은 아직 모른다. <킹덤: 아신전>은 성공 여부를 떠나 언급이 너무 안 돼서 희귀한 경우고, <지리산>의 흥행도 7회를 앞둔 시점인 현재로서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언제나 그렇듯 언론은 그녀의 잠시의 부진을 참고 기다려줄 인내심이 없다. ‘언제적 전지현’, ‘전지현 시대 가나’… 누가 보면 시대물인 줄. 그러나 전지현에 큰 책임을 지우는 이런 분위기는 여전히 그가 산업을 움직이는 절대 스타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새삼스러울 게 있나. 이건 전지현이 늘 해왔던 싸움이고, 심지어 이젠 꽤 잘하는 싸움이며, 앞으로도 그녀가 맞닥뜨리며 넘을 ‘전지현뎐’의 일부일 뿐이다.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지지 않는 여자, 임수정
임수정은 언제나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동시에 예민하고 섬세하며 강한 자아가 그 투명성에 핏발 하나까지 비추어 보이는 배우다. <장화, 홍련>에서 죄의식을 칼날처럼 품은 수미,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길거리를 미친 듯 뛰어다니던 은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싸이코가 아니라 싸이보근데요?”라며 두 눈을 반짝 뜨던 영군. 그러니까 그는 2000년대 한국 영화 속 어딘가 좀 이상한 소녀의 표상이었다. 또한 임수정은 유별나고 까탈스러워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다. “남자들은 자기 할 말 다 하는 여자 안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전 계속 말할 거예요. 저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을 거예요”라던 <내 아내의 모든 것>을 거쳐, “내 욕망은 내가 만드는 거야. 상상도 못했겠지만”이라고 일갈하는 <검블유>까지. 작은 체구에 여전히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서울말 사투리 같은 조곤조곤한 표준어로 뼈까지 차분하게 발라내는 그런 여자. 소녀는 언제까지나 어리지 않고, 이상한 소녀는 지지 않는 여자로 돌아왔다. 띠동갑이 넘는 남자 배우를 상대역으로 마주한 <멜랑꼴리아>는 임수정의 새로운 실험이다. 수학교사 지윤수는 그 특유의 유리알 같은 이중성을 품었다. 초여름 같은 청신함, 그리고 누름돌 같은 무게중심. “찾았다”라며 눈을 빛내는 지윤수에게서 임수정의 새로운 열망을 본다. 구체적인 인간을 이 자리에 불러냄으로써 나아가려는 선택을 본다. 글 | 이예지(프리랜스 에디터)

그래도, 여전히, 송혜교
사랑에 빠지고, 실망하고, 극복하는 행위를 열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길게 늘어뜨리면 참신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송혜교라면 얼마든지 ‘명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가 통속적일수록 송혜교는 빛이 난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냐?” 대체 누가 저런 말을 하냐며 진저리를 치다가도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하는 송혜교의 얼굴을 마주하면 금세 그 장면에 몰입하게 되는 것처럼. 클리셰를 즐길 수 있어야 시청이 가능한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속 송혜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드라마 전체가 ‘오글거림’ 모음집이나 다름없는 <태양의 후예> 속 강모연은 자칫 우스워 보일 수 있는 상황에 무게를 실어 기어코 관객의 몰입을 유도해내는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 송혜교는 드라마가 로맨스를 위해 마련한 인위적인 결핍이나 소모적인 갈등에 황홀한 볼륨을 만든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그런 송혜교의 장기를 믿고 가는 드라마다. 사랑을 장애물이라 여기는 패션 디자이너 하영은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치명적’ 매력의 사진가 윤재국을 만나며 자꾸만 흔들린다. 이 지겨운 만남과 이별의 레퍼토리도 송혜교라는 변수를 통해 예상 밖의 서사를 획득할 것이다. 경계심 가득했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고집이 매달려 있던 입꼬리를 비집고 떨리는 목소리가 흐를 때 나는 다시 송혜교에게 기꺼이 속을 준비를 한다. 글| 복길(칼럼니스트)

고현정의 다면적 얼굴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의 시청자 누구든 고현정과 그녀가 연기하는 정희주가 괜히 포개어지는 듯한 순간을 감지할 것이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독어를 배우려는 이유를 말할 때(“시댁 식구들이 독어는 못할 것 같아서”). 친구가 결혼 생활에 대해 다잡을 때(“남들이 다 너 부러워해, 똑바로 굴어”) 등. 그 묘한 순간들과 더불어 시종일관 위태로운 드라마의 분위기 속에서 정희주의 억눌림과 분출, 후회와 두려움이 뒤섞이니, 이 드라마는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재질의 고현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유독 인상적인 얼굴을 보여준 순간은 정희주가 아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시어머니의 발을 주무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다. “마사지사 부르는 거보다 니가 하는 게 더 시원하더라. 사람은, 잘하는 걸 해야 돼.” 굴욕적인 슬픔과 차갑게 누른 분노가 뒤섞인 표정 이후, 그녀는 촉촉한 눈으로 아들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인다. 이제 와 1995년의 고현정을 소환하긴 그렇지만, <모래시계>의 윤혜린만큼 매력적인 한국 드라마 속 여자를 못 봤다. ‘부자’로서의 부채 의식을 끌어안은 20대를 지나 ‘운명의 소용돌이’라는 고전적인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삶을 겪어내는 여자. 정희주와 윤혜린이 처한 위태로움은 완전히 다른 성격이지만, 감내해야 할 거대한 무엇이 있다는 점에선 통하고,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만약 <너를 닮은 사람>의 끝이 파멸이라면 그땐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글 | 권은경(<더블유> 피처 에디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투명함, 이영애
‘산소 같은 여자’는 여러모로 참 잘 만든 카피다. 우선 화장품 광고의 흔한 카피처럼 외적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 내뿜는, 얼핏 이승보다 저승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묘한 에너지. 그게 핵심이었다. 90년대는 그것을 그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가진 생의 투명함이라 정의했던 것 같지만, 이영애의 ‘산소 같은’ 면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알 수 없는 속내를 드러냈다. 잔물결 하나 없는 특유의 곱고 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생각해보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작품을 선택하기 시작한 이래 평범하거나 돋보이는 외모를 앞세운 역할을 한 적이 없다. 객관적 시선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한국계 스위스인 장교(<공동경비구역 JSA>), 실종된 아들을 찾아 목숨을 걸고 헤매는 엄마(‘<나를 찾아줘>),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너나 잘하세요’ 일침을 날리는 복수의 화신(<친절한 금자씨>).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는 드물게 본격 사랑 이야기를 다룬 <봄날은 간다>에서조차, 이영애는 멜라닌 색소가 부족한 흐릿한 동공으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화면이나 상대방의 눈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게임 하는 게 유일한 낙인 40대 히키코모리 탐정 구경이도 그래서 낯설지 않다. 크고 투명한 눈이 범인을, 시청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곳에서 시작된다.  글 | 김윤하(음악 평론가)  

피처 에디터
권은경
아트워크
허정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