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디자인 위크 유랑기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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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올해, 팬데믹으로 굳게 닫혀 있던 전시장과 국경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9월에. 밀라노를 기점으로 파리, 헬싱키, 런던까지 한 달간 유럽에서는 디자인 축제가 바통터치를 하며 이어졌다. 네 도시의 디자인 스폿들을 21일간 돌아본 어느 관찰자의 리뷰가 여기 있다.

2020년은 디자인 페어를 기다리는 업계 종사자들에게 희망고문의 해였을 것이다. 디자인 위크의 일정은 일찍이 공지됐지만, 막상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면 소식이 잠잠하고, 혹여 일정에 관한 자세한 게시물이 뜨더라도 며칠 후면 삭제되는 식이었다. 2019년까지만 해도 매년 1월부터 9월까지 밀라노, 파리, 헬싱키, 런던 등 ‘디자인 수도’란 타이틀을 한 번쯤 가져본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떠들썩한 디자인 축제가 벌어졌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휩쓸면서 2020년 개최 예정이었던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됐는데, 시간이 흘러 올해 9월이 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시장과 국경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니 올해 유럽 디자인 위크의 시작점이자 가장 다양한 볼거리가 한 상 차려지는 밀라노와의 ‘밀당’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탈리아에 업무상의 이유로 들어와서 120시간 안에 떠날 경우,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조항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하다가 8월 말 ‘백신 접종을 마쳤다면 웰컴!’이라는 문구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 편히 짐을 꾸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듯 열렬히 재회를 고대했을까. 밀라노와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헬싱키로 날아온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가 입을 열었다. “디자인 위크 규모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줄어들었죠. 하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디자인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잖아요. 이게 디자인 페어의 본질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 교류, 이는 패션쇼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시, 축제의 본질이자 그토록 우리가 디자인 축제의 귀환을 바란 이유일 것이다.

코로나19는 당연히 디자인 페어의 형식과 트렌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시장들은 열린 공간으로 동선이나 부스를 설계하는 데 온 힘을 다한 듯했다. 전 세계적인 룰이 되어버린 ‘최소 거리두기 2미터’를 지키기 위해 입장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포토제닉하기보다는공기 순환을 고려한 오픈 부스 형태의 디자인이 주를 이뤘으며, 토크 행사는 실외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진행됐다. 지속 가능성 이슈도 빠질 수 없다. 전시 매대, 임시 시설물은 재활용 판지나 완전 분해 후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최소한의 탄소 배출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 다각도로 시도된 것이다. 또한 종이 사용 절감과 접촉 최소화 차원에서 QR코드를 활용한 디지털 브로슈어 전송도 일반화됐는데, 간혹 질 좋은 실물 브로슈어를 건네는 곳을 만날 때면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다양한 브랜드에서 급증한 재택근무 생활자의 고민을 어루만져주는 가구를 대거 출시한 점도 눈에 띄었다. 가장 자주 목격된 가구는 책상이 아니라 의외로 소파였다. 재택근무를 할 때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침대를 대신할 근사한 선택지이자, 책상보다 편안한 가구이니까. 색상은 뉴트럴 계통, 소재는 캐시미어 블랭킷처럼 촉감을 극도로 끌어올린 합성 면으로 제작된 소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줬다. 가벽 역할을 하면서 공간을 분리하거나 분위기 전환을 유도하는 스페이스 디바이더를 선보인 브랜드도 다수 있었다. 회사도, 학교도, 외부 활동도 멈춘 코로나19 시대에는 집이나 회사에서 각자의 공간을 사수하는 일이 시급했을 것이다. 스페이스 디바이더는 유럽식 병풍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소파에 비해 소재, 패턴, 크기 등 디자인이 훨씬 다양하기 때문에 액자에 끼운 포스터나 그림을 대체할 인테리어 아이템으로도 훌륭하다.

팬데믹 이후 마침내 재회하게 된 유럽 각국의 디자인 축제들. 작년 4월에서 6월로 연기되었다 결국 취소 소식을 알려야 했던 디자인계 최대 행사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부활부터 파리, 헬싱키, 런던에서 열린 디자인 축제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디자인으로 유럽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은 현장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장면을 전한다.

HELSINKI DESIGN WEEK 99~19 
헬싱키 디자인 위크는 매년 주제에 따라 행사의 메인 허브 역할을 하는 장소가 바뀐다. 올해 편집매장 겸 갤러리인 ‘글라스하우스 헬싱키’를 주 무대로 펼쳐진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주제는 ‘지혜: 지금 디자인하는 것 이 현명한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전시, 토크, 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발리사리섬을 무대로 펼쳐진 제1회 헬싱키 비엔날레 풍경. 올해 축제의 주제는 ‘동일한 바다(The Same Sea)’였다. ©MAIJA TOIVANEN

발리사리섬을 무대로 펼쳐진 제1회 헬싱키 비엔날레 풍경. 올해 축제의 주제는 ‘동일한 바다(The Same Sea)’였다. ©MAIJA TOIVANEN

발리사리섬을 무대로 펼쳐진 제1회 헬싱키 비엔날레 풍경. 올해 축제의 주제는 ‘동일한 바다(The Same Sea)’였다. ©MAIJA TOIVANEN

대자연을 무대로ㅣ헬싱키 비엔날레

핀란드에서는 최초로 열린 제1회 헬싱키 비엔날레는 헬싱키 항구에서 30분 거리의 발리사리섬에서 열렸다. 호수와 숲의 나라 핀란드는 4만 개 이상의 섬을 가진 나라로, 휴가철 이 섬들은 바다와 호수 수영, 사우나, 숲을 즐기는 이들로 채워지곤 한다. 그런데 발리사리섬은 조금 별난 특징이 있다. 수도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기에 군사 시설이 남아 있고 개방과 폐쇄를 반복하면서 독특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즉, 전시와 축제를 벌일 장소로 제격이라는 얘기다. 올해 주제는 ‘동일한 바다(The Same Sea)’다. 상호 연결성과 의존성에 관한 메타포로, 우리는 이 행성에 공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생존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한국 작가 전경우, 권하윤을 포함해 40개국에서 온 작가들은 발리사리섬을 캔버스 삼아 기후 변화는 물론 경계와 정체성, 공감과 커뮤니티 등 다채로운 관점으로 첫 비엔날레의 주제를 풀어냈다.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허브 장소였던 ‘글라스하우스 헬싱키’. 디자이너 한나 나노넨의 개인전 등 총6개의 전시가 동시 진행됐다. ©MIKAEL NIEMI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허브 장소였던 ‘글라스하우스 헬싱키’. 디자이너 한나 나노넨의 개인전 등 총6개의 전시가 동시 진행됐다.

예술, 디자인, 지속 가능성의 삼위일체ㅣ 글라스하우스 헬싱키

기존 백화점을 리브랜딩해 문을 연 글라스하우스 헬싱키는 올해 열린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허브 장소였다. 언뜻 편집매장을 겸업하는 갤러리로 보이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소비를 장려하는 커머셜&미디어 플랫폼으로 시즌리스 상품을 큐레이션하고 패션과 사회과학 분야까지 아우르며 전시를 기획한다. 이번 헬싱키 디자인 위크 기간에는 디자인 포럼 핀란드가 선정한 올해의 디자이너 한나 아노넨의 개인전, 알토 대학교 디자인 팩토리의 <디자인+지속 가능성> 전시 등을 포함한 여섯 개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됐다.

헬싱키의 갤러리 겸 숍 ‘로칼’에서 만난 안트레이 하르티카이넨의 나무 조각. ©TARAN WILKHU

핀란드 디자인&아트 신의 첨단ㅣ로칼

지금 핀란드 디자인과 아트 신이 궁금할 때면 로칼(Lokal)의 웹사이트를 체크한다. 사진작가인 카트야 하겔스탐이 운영하는 갤러리 겸 숍인데, 30년간 업계에서 단련된 감각으로 핀란드 곳곳에 숨겨진 보석 같은 작가나 디자이너를 발굴해내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번 디자인 위크를 기념해 로칼이 선택한 작가는 안트레이 하르티카이넨다. 로칼에서 만난 안트레이의 얼굴과 그의 작품에는 조용하고 진중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핀란드 예술가 마을 피스카스에서 보낸 지난 10년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이 차분한 관찰자는 나뭇잎이 바람에 어떻게 떨리는지, 빛이 땅에 어떤 형태로 반사되는지를 보면서 나무를 깎고 작업을 해왔다고.

LONDON  DESIGN FESTIVAL 918~26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을 포함해 런던 시내 곳곳의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중심으로 열린다. 올해는 브롬프턴, 킹스 크로스, 클러큰웰, 이즐링턴, 쇼디치 등 10개의 디자인 디스트릭트가 참가했다. 

네비아 웍스의 파빌리온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 ©ED REEVE

암호는 ‘존 마데스키’ㅣ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은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을 관람하는 것으로 그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뮤지엄 곳곳에서 특별 전시를 관람할 수 있고 페스티벌에 관련해 전반적인 안내를 도와주는 스태프들이 여럿 상주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뮤지엄 중앙 통로에 자리한 존 마데스키 정원으로 향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년 페스티벌 주관처가 가장 큰 힘을 쏟는 파빌리온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올해는 런던 베이스의 스튜디오 네비아 웍스의 작품 ‘Between Forests and Skies’가 설치됐다. 저탄소 알루미늄 소재로 만든 파빌리온은 물과 햇빛에 표면이 반사되면서 그 구조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지붕 면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알루미늄판에 기둥 모양으로 칼집을 내 27개의 다리를 만들고 세운 간단한 구조란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전시가 끝난 이후 이 파빌리온은 100% 재활용될 예정이다.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기간에 맞춰 그리니치 지역에 공식 오픈한 디자인 디스트릭트.

런던에 둥지를 튼 새로운 핫 스폿ㅣ디자인 디스트릭트

런던의 남동쪽 스카이라인에 변화가 생겼다.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기간에 맞춰 공식 오픈한 디자인 디스트릭트는 그리니치 지역에 새로 생긴 크리에이티브 중심 상업 지구다. 건축가 8팀이 설계한 16개 빌딩의 내외관은 흥미롭고 귀여운 디테일이 넘쳐난다. 거대한 비누방울 안에 차려진 푸드 코트는 또 어떻고. 디자인 디스트릭트는 올해 페스티벌을 통해 성공적으로 신고식을 치른 상태. 내년 페스티벌에서는 이 빌딩들이 어떻게 활용될지 사뭇 기대된다.

런던 첼시에 자리한 ‘더 콘란 숍’의 윈도 디스플레이 전시 .

디자인 애호가들의 잔치 | 더 콘란 숍

더 콘란 숍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설립자 테렌스 콘란 경이다. 그는 런던 디자인 뮤지엄의 설립자이면서, 지난해 별세하기 전까지 20세기 후반 영국 홈 데코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열고 개척해온 인물이다. 비록 테렌스는 떠났지만 더 콘란 숍은 여전히 디자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첼시점에서 열린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기념 파티는 발 디딜 틈 없이 떠들썩했다. 파티의 흥을 더욱 돋운 것은 프랑스 작가 다미앵 풀랭과 협업한 윈도 디스플레이 전시 <Magical Value of Shapes>. 오색찬란한 컬러 플레이와 더 콘란 숍의 새로운 컬렉션으로 흡사 디자인 테마파크에 온 기분이었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신정원(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COURTESY OF SALONE DE MOBILE. MILANO, MAISON&OBJET, NILUFAR GALLERY, HCOURTESY OF MAISON&OBJET, FACTORY, PIERRE GONALONS, CENTRE CULTUREL SUÉDOIS, HELSINKI BIENNIAL, GLASSHOUSE HELSINKI, LOKAL, V&A MUSEUM, THE CONRAN SHOP.ERMES, DIOR, VALENTINO, 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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