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디자인 위크 유랑기 - 밀란, 파리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유럽 디자인 위크 유랑기 Vol.1

2021-10-22T03:22:15+00:002021.10.22|FEATURE, 컬처|

마침내 올해, 팬데믹으로 굳게 닫혀 있던 전시장과 국경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9월에. 밀라노를 기점으로 파리, 헬싱키, 런던까지 한 달간 유럽에서는 디자인 축제가 바통터치를 하며 이어졌다. 네 도시의 디자인 스폿들을 21일간 돌아본 어느 관찰자의 리뷰가 여기 있다. 

2020년은 디자인 페어를 기다리는 업계 종사자들에게 희망고문의 해였을 것이다. 디자인 위크의 일정은 일찍이 공지됐지만, 막상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면 소식이 잠잠하고, 혹여 일정에 관한 자세한 게시물이 뜨더라도 며칠 후면 삭제되는 식이었다. 2019년까지만 해도 매년 1월부터 9월까지 밀라노, 파리, 헬싱키, 런던 등 ‘디자인 수도’란 타이틀을 한 번쯤 가져본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떠들썩한 디자인 축제가 벌어졌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휩쓸면서 2020년 개최 예정이었던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됐는데, 시간이 흘러 올해 9월이 되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시장과 국경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니 올해 유럽 디자인 위크의 시작점이자 가장 다양한 볼거리가 한 상 차려지는 밀라노와의 ‘밀당’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탈리아에 업무상의 이유로 들어와서 120시간 안에 떠날 경우,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조항에 맞춰 만반의 준비를 하다가 8월 말 ‘백신 접종을 마쳤다면 웰컴!’이라는 문구를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 편히 짐을 꾸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듯 열렬히 재회를 고대했을까. 밀라노와 파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헬싱키로 날아온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가 입을 열었다. “디자인 위크 규모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줄어들었죠. 하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디자인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잖아요. 이게 디자인 페어의 본질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 교류, 이는 패션쇼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시, 축제의 본질이자 그토록 우리가 디자인 축제의 귀환을 바란 이유일 것이다.

코로나19는 당연히 디자인 페어의 형식과 트렌드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시장들은 열린 공간으로 동선이나 부스를 설계하는 데 온 힘을 다한 듯했다. 전 세계적인 룰이 되어버린 ‘최소 거리두기 2미터’를 지키기 위해 입장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포토제닉하기보다는공기 순환을 고려한 오픈 부스 형태의 디자인이 주를 이뤘으며, 토크 행사는 실외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진행됐다. 지속 가능성 이슈도 빠질 수 없다. 전시 매대, 임시 시설물은 재활용 판지나 완전 분해 후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최소한의 탄소 배출을 위한 공간 디자인이 다각도로 시도된 것이다. 또한 종이 사용 절감과 접촉 최소화 차원에서 QR코드를 활용한 디지털 브로슈어 전송도 일반화됐는데, 간혹 질 좋은 실물 브로슈어를 건네는 곳을 만날 때면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다양한 브랜드에서 급증한 재택근무 생활자의 고민을 어루만져주는 가구를 대거 출시한 점도 눈에 띄었다. 가장 자주 목격된 가구는 책상이 아니라 의외로 소파였다. 재택근무를 할 때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게 만드는 침대를 대신할 근사한 선택지이자, 책상보다 편안한 가구이니까. 색상은 뉴트럴 계통, 소재는 캐시미어 블랭킷처럼 촉감을 극도로 끌어올린 합성 면으로 제작된 소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안겨줬다. 가벽 역할을 하면서 공간을 분리하거나 분위기 전환을 유도하는 스페이스 디바이더를 선보인 브랜드도 다수 있었다. 회사도, 학교도, 외부 활동도 멈춘 코로나19 시대에는 집이나 회사에서 각자의 공간을 사수하는 일이 시급했을 것이다. 스페이스 디바이더는 유럽식 병풍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소파에 비해 소재, 패턴, 크기 등 디자인이 훨씬 다양하기 때문에 액자에 끼운 포스터나 그림을 대체할 인테리어 아이템으로도 훌륭하다.

팬데믹 이후 마침내 재회하게 된 유럽 각국의 디자인 축제들. 작년 4월에서 6월로 연기되었다 결국 취소 소식을 알려야 했던 디자인계 최대 행사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부활부터 파리, 헬싱키, 런던에서 열린 디자인 축제를 꼼꼼히 들여다봤다. 디자인으로 유럽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은 현장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장면을 전한다.

MILAN DESIGN WEEK 95~10 
1961년 시작된 자타공인 디자인 위크의 터줏대감. 본전시라 할 수 있는 가구 박람회 ‘살로네 델 모빌레’, 밀라노 도심 곳곳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 ‘푸오리 살로네’로 구성된다. 

한계를 넘어서ㅣ슈퍼살로네 2021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본전시 살로네 델 모빌레가 특별판 ‘슈퍼살로네’ 로 돌아왔다. 단지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 부스 형태를 벗어난 전시장 레이아웃. 주최측이 선택한 ‘월 디스플레이’ 방식은 참관객이 한곳에 몰려 있거나 붐빌지언정 동선이 엉키지 않게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참가한 브랜드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이전과는 다르게 남다른 크리에이티브를 펼쳐야 하는 상황. 대형 모니터를 설치해 미디어아트나 영상으로 시선을 압도하거나, 제품의 컬러 팔레트를 활용해 전시하거나, 식물을 적극 활용한 플랜테리어 스타일이 주를 이뤘다. 그러니 몰테니&C.처럼 자사의 라운지 체어로 기내 인테리어를 색다르게 완성한 브랜드가 카메라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이 밖에 전시장 매대, 쓰레기통을 재활용 골판지로 만들거나 전시가 종료된 이후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로 제작해 기후 변화,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전시 부스 디자인을 적용한 것도 반갑고 의미 있는 변화. 여러모로 올해 첫선을 보인 슈퍼살로네는 내년 4월 돌아올 살로네 델 모빌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거리를 밝힌 패션 브랜드ㅣ에르메스, 디올, 발렌티노, 구찌, 베르사체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과 경험’은 사람들이 디자인 전시를 찾는 가장 큰 이유이자, 푸오리 살로네를 글로벌 미디어가 주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년 푸오리 살로네에 참여하는 다양한 브랜드 중 가장 큰 주목을 받곤 하는 에르메스는 올해 참관객을 이집트 페트라 어딘가에 있을 법한 에르메스 공예 마을로 순간 이동시켜 짧지만 강렬한 여행 경험을 선사했다. 테라코타 색상의 모래 위를 차박차박 걸을 때 나는소리와 감각은 여행의 몰입도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각기 다른 그래픽 패턴으로 외관을 장식한 5개의 파빌리온은 에르메스의 새로운 홈컬렉션으로 채워졌다. 언제든 찻장을 가득 채울 의향이 충만한 플레이트와 티웨어 세트도아름다웠지만 돌, 가죽, 종이, 고리버들, 캐시미어 등의 재료와 공예 기술이 접목된 오브제들이 한층 돋보이는 전시였다. 한편 디올은 이번디자인 위크를 기념해 루이 6세 시기 디자인된 클래식 체어 ‘메달리온’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한국의 가구 디자이너 양승진을 포함해 17명의 아티스트와 협업한 17개의각기 다른 메달리온은 의자의 창의적 잠재성을 새롭게 환기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의자는 크리에이티브를 표현하기 좋은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과거 한 전시장에서 만난 모 가구 디자이너의 말을 재확인한 전시였다. 발렌티노는 극장을 테마로 했던 2021 F/W 액트 컬렉션 패션쇼에서 영감을 얻어 부티크 내부를 빈티지한 레드 컬러로 새롭게 단장했으며, 구찌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콘셉트의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고, 베르사체는 가죽과 대리석, 금빛 컬러가 조화를 이룬 홈 컬렉션을 선보였다.

 

곽철안, 김충재, 강재원, 스튜디오 차차의 ‘Archetypes’ 전시를 만날 수 있었던 알코바 현장.

디자인 플랫폼으로 변신한 옛 군사 병원ㅣ알코바

푸오리 살로네는 람브라테, 토르토나 등 여러 디자인 지구에 걸쳐 개최되는데, 그중 브레라는 일종의 ‘허브 지역’으로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난다. 구글 지도에 저장해둔 브레라의 수많은 스폿을 뒤로하고 알코바 전시장을 찾아가면서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랐다. 스스로 디자인 플랫폼이라 소개하는 알코바는 매해 이색적인 장소를 찾아 전시자와 참관객을 끌어모으기로 유명한데, 올해는 1920년대부터 문이 닫혀 있던 옛 군사 병원이 이들의 무대였다. 수녀들의 집, 예배당, 세탁소가 있던 건물에 50개의 갤러리, 디자이너, 예술가의 전시가 꾸려졌는데, 공예부터 디지털 아트까지 그 경계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녹아든 점이 인상 깊었다. 올해는 유독 반가운 이름도 찾았다. <Archetypes> 전시로 참가한 곽철안, 김충재, 강재원, 스튜디오 차차였다. 오브젝트 오브 커먼 인터레스트와 이테이지 프로젝트 갤러리의 협업 프로젝트는 참관객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가장 자주 장식한 전시 중 하나였고, 스위스 차세대 디자이너 10명으로 구성된 전시는 잘 고른 패브릭 하나가 공간 구성에 어떤 힘을 주는지 깨우쳐줬다.

 

밀라노 닐루파르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아트 퍼니처.

오브제 그 자체의 즐거움 | 닐루파르 갤러리

푸오리 살로네에는 밀라노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다양한 아트 갤러리가 참여하기도 한다. 그중 닐루파르 갤러리는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 가장 긴 입장 대기가 있기로 소문난 스폿이자 매해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전시를 선보인다고 회자되는 곳이다. 닐루파르 갤러리의 설립자이자 컬렉터 니나 야샤르는 디자인, 아트 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인물로 꼽힌다. 잡지 <젠틀우먼>과의 인터뷰에서 니나는 자신의 패션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옷들은 분명 입기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 때문에 저는 그런 옷도 곧잘 입죠.”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전시장을 둘러보면, 실용성보다 디테일이나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과 오브제가 즐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올해 닐루파르 갤러리에서 선보인 기획 전시에서는 과연 며칠에 걸쳐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오드리 라지의 3D 아트 작품과 이쯤 되면 가구를 캔버스 삼아 그린 회화가 아닐까 싶은 베단 로라 우드의 가구컬렉션을 만날 수 있었다.

 

PARIS DESIGN WEEK 99~18 
밀라노와 마찬가지로 장내와 장외 전시로 나뉜다. 파리 디자인 위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메종&오브제는 매년 1월과 9월 연중 2회 열린다. 마레 지구를 포함해 프랑스 전역 200여 곳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도 놓칠 수 없는 이벤트다. 

뉴트럴의 향연ㅣ메종&오브제 2021

밀라노의 살로네 델 모빌레가 실내를 구성하는 가구 위주의 전시라면, 메종&오브제는 가구를 포함해 그보다 작은 각종 인테리어 소품을 위주로 하는 전시다. 전시장에 도착하면 메인 브랜드가 밀집한 6관으로 향한다(코로나19로 인한 규모 축소로 올해는 7, 8관 전시가 없었다). 덴마크 리빙 브랜드 펌 리빙은 부스를 거실, 침실, 아이 방으로 나누어 뉴트럴 컬러의 가구로 구성된 하나의 집을 보여줬다. 침대의 헤더, 거울, 오브제 등에 곡선을 사용해 신체 친밀감을 높인 것이 특징. 네덜란드의 이치홀츠, 벨기에의 PH 컬렉션 같은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뉴트럴 컬러의 활용과 촉감을 강조한 재료의 강세는 이어졌다. 아시아에 비해 재택근무가 일반화된 유럽에서는 갑갑한 실내 생활의 고충을 눈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베이지, 아이보리, 네이비와 같은 뉴트럴 컬러로 해결했던 걸까? 매년 주최측이 직접 선별한 신제품을 큐레이션해 선보이는 전시 <What’s New-Share>에서는 ‘Artistic, A Sculptural, New-Rustic’을 키워드로 선정했다.

 

파리가 주목하는 디자인 신의 젊은 피ㅣ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

빅 브랜드의 자본력 아래 계획적으로 출시된 새로운 컬렉션을 구경하는 것만큼 라이징 스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는 경험도 디자인 위크의 큰 즐거움 중 하나. 올해 메종&오브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진 디자이너의 전시에 대한 갈증은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란 6 젊은 국제 디자이너를 위한 플래그십 행사로, 디자인 학교를 갓 졸업 한 학생은 물론 경력 8년 미만의 신 진 디자이너가 자신들의 프로토타 입을 발표하는 실험 허브라 할 수 있다. 올해는 20개 팀이 모여 합동 전시를 열었는데, 각각 디자인 완성도가 높아 특별한 부스 장식이나 장치가 없었음에도 전시가 충분히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벨 마랑의 조카인 에밀리 마랑의 프렌치 클리셰, 컨템퍼러리 디자인 플랫폼 아도르노도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순도 100% 프렌치 감성ㅣ피에르 고날롱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갤러리 오너 피에르 고날롱의 기획 전시가 열리는 대저택 ‘호텔 드 술리’로 가는 길에는 유혹이 많았다. 구글 지도는 보주 광장 쪽에서 들어가는 입구로 안내했는데, 볕 좋은 주말의 광장은 그 자체로 그림처럼 빛이 났고, 마침 그 주변을둘러싸고 빈티지 마켓이 한창이었으니 말이다. 광장 한쪽 끝에 자리한 전시장 입구는 허름하고 작았다. 스피크이지 바의 문 같다고느낄 만큼. 그런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프랑스 대저택의 우아하고 럭셔리한 라운지가 펼쳐졌다. 내부는 피에르 고날롱이 기획한 컬렉션으로 채워졌는데, 전시 아이디어는 베니스의 포르투니팔라초, 파리 외곽에 있는 자신의 집 등 그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장소에서 비롯했다고. 프렌치 감성 순도 100%의 전시였다.

 

프랑스-스웨덴 문화 교류 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Amitié’.

스칸디나비아, 프렌치 디자인의 조우ㅣ스웨덴 문화원

디자인 위크로 들썩이는 마레 지구를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마주친 스웨덴 문화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올해 프랑스-스웨덴 문화 교류 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전시 <Amitié>가 열리고 있었다. <Amitié>는 올 초부터 진행된 전시 및 행사로, 디자인 위크 기간에 맞춰 가장 큰 규모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스웨덴 국경 밖에 있는 유일한 스웨덴 문화원이라고. 내부에서는 30개 이상의 갤러리, 디자이너,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팀이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기획한 7개의 소규모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직선보다는 곡선을, 산업 재료보다는 자연에서 소재와 아이디어를 얻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섬세하고 화려한 프렌치 디테일을 살린 작품들이 눈에 들었다. ‘디자인은 정보를 행동으로, 의심은 확실성으로, 아이디어는 비즈니스로 전환할 수 있다’는 문장 또한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