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리얼 퍼와 가죽을 쓰지 않고는 하이엔드 패션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20주년을 맞이한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는 여전히 지속 가능한 패션을 지지하고 실천한다. 자신의 신념과 그 가치를 입증하면서. 어제와 오늘, 나아가 내일도 그녀가 용감한 여정을 멈추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모든 것이 멈춘 시기. 전 세계적인 봉쇄 기간에 스텔라 매카트니의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었다. 2021 S/S 시즌, 스텔라 매카트니의 론칭 20주년을 맞이해 자신이 사랑하고, 알고, 믿고 있는 것을 정리한 ‘A to Z 성명서’를 발표한 것. ‘Accountable(책임 있는)’부터 ‘Zero Waste(제로 웨이스트, 포장재를 적게 사용하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는 등 폐기물을 줄이려는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26개의 알파벳에서 파생한 26개의 키워드는 그녀가 이끌어온 지속 가능한 패션의 가치와 신념을 대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스텔라 매카트니가 만들어온 변화와 파트너십을 상징하는, 다양한 글로벌 아티스트와의 예사롭지 않은 협업 프로젝트로 강렬한 시각적 메타포를 제공했다. 그 매혹적인 결과물을 오롯이 더블유 코리아에 선보이며 인터뷰를 나눈 스텔라 매카트니. 슈퍼스타를 부모로 둔 금수저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세 아이의 엄마이자 환경 운동가, 나아가 시대의 혁신가로 발돋움한 지난 20년의 스토리를 듣다 보면 그녀가 ‘강철 스텔라(Stella Steel)’로 불리는 이유를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20주년을 기념해 26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선보인 ‘A to Z’ 프로젝트 이미지.
론칭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꼽는다면 언제인가?
Stella McCartney 운이 좋게도 기억에 남는 수많은 순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순간은 지난 2012년과 2016년, 영국 올림픽 국가 대표팀의 유니폼을 디자인했을 당시다. 그런 뜻깊은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고, 내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선수들이 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영국인은 자국에 대한 뜨거운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이슈였다. 특히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 성능의 유니폼을 만들어야 하는 동시에 국민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을 해야 했기에 더욱 특별한 순간이었다.
알파벳을 이용해 각각의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코로나 시기의 성찰이 가져다준 아이디어라고 들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록다운 기간에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발전시키게 되었나? 코로나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나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더불어 내가 지닌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것이 잠시 멈춘 이 순간, 내 안에 깊이 잠재되었던 빛나는 창의력을 발휘해 세상과 맞서 싸우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이 인터뷰를 읽고 있는 독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회사가 아닌 집에서 컬렉션을 디자인하고, 팀원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브랜드 창립자로서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했다. ‘우리가 왜 이것을 하고 있지?’ ‘패션업계에서 하고 있는 일을 왜 우리 모두가 따라 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은 무엇이 다시 돌아오길 원하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보다 의식적이고 책임감 있는 소비를 꿈꾸며, 지속 가능성이라는 돌파구를 찾아내고 제안하는 새로운 패션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스텔라 매카트니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총 26개의 알파벳을 이용해 각 알파벳에 해당하는 26개의 룩을 선보이는 동시에 26명의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문구와 룩, 그리고 아티스트를 선정하고 매칭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봉쇄 기간 동안, 나는 26명의 아티스트에게 연락해 각각의 알파벳을 고르고 이를 자유롭게 시각화하는 작업을 함께하고 싶다고 전했다. 대다수는 나의 오랜 친구들이고 또 일부는 패션을 향한 여정 속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기꺼이 ‘A to Z’ 프로젝트에 동참하기로 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각의 아티스트들이 표현한 26개의 알파벳에서 파생한 단어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이끄는 목적의식의 시각적인 표본이기도 하다. 그 단어들이 표방하는 가치들이 곧 출시될 스텔라 매카트니 2021 S/S 컬렉션에 정교하게 스며들어 있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풍부한 스토리를 제공하는 스텔라 매카트니의 2021 S/S 컬렉션. 재생 캐시미어, 비동물성 소재, 재활용이 가능한 식물성 원료 기반의 코바 페이크 퍼 등의 친환경 소재를 사용했다. 특히 빈티지 원단을 재활용한 리미티드 에디션이 흥미롭다. 아래는 ‘A to Z’ 성명서를 바탕으로 한 룩북 이미지로 스텔라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단어들을 표현했다.
이번 시즌에도 역시 재활용 소재와 업사이클링 원단을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특히 코로나 시대에 공장이 모두 문을 닫았을 때는 지속 가능한 신소재 개발과 생산이 결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그 지속가능한 움직임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번 컬렉션에 투영되었나. 창의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순간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순간과 강하게 맞서 싸우고 한 걸음 내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마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브랜드의 창립자로서 과연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되뇌며 컬렉션의 본질을 두고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 다음 그동안 우리가 사용해온 모든 소재와 원단을 다시 살펴보았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지만, 실은 많은 양의 새로운 원단을 구매하기가 꺼려지기도 했다. 나아가 우리가 디자인과 제품 생산을 거쳐 유통까지의 과정을 과연 어떻게 담당하고 있는지, 보다 더 창의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법은 없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모든 창고를 살펴보았고, 현재 어떤 원단과 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는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핵심 재료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논의했다.
2021 S/S 컬렉션에는 스텔라 매카트니의 미래적인 청사진이 매혹적으로 담겨 있다. 이번 ‘A to Z 성명서’가 표방하는 26개 단어 중에서도 특히 ‘Accountable, Conscious, Sustainability, Repurpose, Organic, Zero Waste’ 등은 모두 당신이 실천해온 지속 가능한 윤리적인 패션에 관련된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우선 ‘Accountable(책임 있는)’을 뜻하는 알파벳 ‘A’는 최근 더욱 중요한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지구를 보호하는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환경 보호를 잘 이행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시즌이 끝나고 남은 각각의 퍼-프리-퍼(Fur Free Fur) 소재를 통해 패치워크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퍼-프리-퍼의 흥미로운 점은 이 소재가 바닥이 나는 순간 제품의 생산도 정지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리미티드 에디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정판이라는 것인데, 쓰고 남은 원단을 재활용해 이처럼 특별하고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낸다는 사실이 정말 흥분된다.
그다음으로 ‘Timeless(영원함)’를 뜻하는 알파벳 ‘T’ 또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브랜드 목표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이 지속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대로 영원히 입을 수 있는 무언가가, 심지어 너무나도 잘 만들어졌다면 그것이야말로 불변의 가치가 아닌가. 이는 모든 브랜드가 실천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행위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Zero-Wate(제로 웨이스트)’를 뜻하는 알파벳 ‘Z’는 사실상 컬렉션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소재를 찾는 대신 이미 사용했던 소재를 재활용해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나에게 ‘제로 웨이스트’로 탄생한 드레스는 마치 순수한 마법과도 같다. 이전 컬렉션에서 사용된 소재를 무려 10가지나 재사용했으니 말이다. 아마 스텔라 매카트니에서 만든 것 중 가장 우리가 꿈꿔왔던 드레스일 것이다. 이토록 흥미진진한 드레스의 제작 방법은 무척이나 현대적이다. 가늘고 얇은 소재는 시스루의 레이스로 재탄생했으며, 지난 컬렉션들의 아카이브 프린트를 표현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의 관례 중 하나가 자신이 만든 프린트는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게끔 외부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용 가치가 없어진 막대한 양의 원단들이 재고 창고에 쌓이기보다는 소각되거나 땅에 매장된다. 이는 환경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굉장한 낭비다. 스텔라 매카트니에서는 이런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 창고 안에 쌓인 모든 원단은 놀랍고도 아름다운 한정판 드레스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만든, 그리고 앞으로 만들 드레스는 모두 한정판 드레스가 된다. 소재나 프린트가 바닥나면 다른 프린트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드레스는 저마다 개성 있는 숨결을 내뿜을 것이다. 다시 말해 수집할 가치가 높다는 말이다.
‘A to Z 성명서’에는 환경 이슈뿐 아니라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명확한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일례로 ‘Grateful, Humour, Intimacy, Joy, Kind, Mindful, Womanhood, Kiss, Youth’ 등의 키워드를 통해 당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물론이다. 나는 ‘A to Z’ 성명서를 통해 지속 가능한 가치뿐 아니라 브랜드의 주요한 DNA를 보여주고자 했다. 패션은 재미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 예로 알파벳 ‘K’를 통해 ‘Kind(친절한)’의 가치를 내세웠다.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모두가 이 가치를 상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는 나와 당신,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지키는 선량한 시민이 되고자 하는 스텔라 매카트니가 아주 중요시하는 가치이다. 그리고 자연 친화성이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Humor(유머)’를 뜻하는 ‘H’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파벳 중 하나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중요한 DNA 중 하나인 유머는 브랜드의 시작부터 함께해왔다. 환경이나 동물 보호와 관련된 무겁고 진지한 메시지를 조금 이나마 가벼운 톤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죄책감이나 위협감을 주기보다는, 유머러스한 접근 방식을 통해 사소한 행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인생은 짧으니, 때론 가볍게 웃어 넘기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좋지 않을까.
26명의 협업 아티스트들의 면면도 화려하고 다채롭다. 우선 제프 쿤스(Jeff Koons)나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같은 대가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젊은 신예들이 눈에 띈다. 저명한 예술가들 사이에 신진 아티스트를 협업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이번 컬렉션을 위해 각각의 아티스트를 선정한 이유와 그 과정을 소개해달라. 그들 중 몇몇은 내가 항상 존경했던 분들이고, 또 이 어려운 시기에 커리어를 쌓을 좋은 기회를 함께할 신진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우선 제프 쿤스는 내가 제일 먼저 협업을 제안한 사람이다. 그를 알고 지낸 지는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제프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많다. 그는 나를 여기저기 데려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베르사유와 퐁피두에서 열린 그의 전시에도 데려갔다. 이러한 제프의 친절함과 상냥함,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Kindness(상냥함)’를 뜻한다.
그리고 올라퍼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2018년에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는 런던 블룸버그 빌딩 바깥에 그린란드에서 가져온 빙하 시계를 설치했고, 나는 빌딩 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지속 가능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었다. 그 이후 그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는 점이 신기하다. 항상 그와 무언가를 얘기하는데 말이다. 그는 베를린 스튜디오에서 나에게 종종 영상통화를 걸어, 그가 이해한 ‘O’에 대한 흥미로운 열변을 쏟아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부정 속에서 긍정을 찾는 여행을 택했다. 어느 길을 가야 할지 결정하는 우리의 일상 속 고민이 지닌 긍정적인 가치 말이다.
한편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예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은 매우 신선했다. 나는 이번 협업을 통해 그들에게 개성과 창의성을 표현할 기회를 부여하고 그들이 학창 시절 열망한 전설적인 아티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우선 나는 JR의 작품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젊은 사진가들을 대상으로 무료 미술 수업을 제공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그의 에너지를 존경한다. 따라서 그의 학생들에게 ‘A to Z’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JR은 그의 윤리적인 행보를 절대 공론화하지 않는데, 이 점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나는 그의 유능한 제자들을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에게 의뢰했고,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매체나 수단을 통해 중요한 이슈들을 개성 넘치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JR은 그의 젊은 학생들과 함께 알파벳 ‘P’를 통해 ‘Progressive(진보적인)’를 사진으로 부드럽게 전달했는데, 이 사진을 통해 공동체와 협업의 중요성을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이처럼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는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전달하고 싶다. 특히 지금 같은 힘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 같이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한다.
당신의 컬렉션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아티스트들의 이미지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신디 셔먼의 위트 있는 포트레이트 콜라주, 우르스 피셔의 천진난만한 발상이 깃든 사진, 에르테의 간결하고 몽환적인 일러스트 등 ‘다양성의 시대’에 어울리는 다채로운 비주얼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들과 서로 교감하며 시너지를 내기까지, 그들과 나눈 영감과 메시지에 대해 듣고 싶다. 26명의 다채로운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그들 모두 제각각의 개성을 바탕으로 알파벳과 성명서를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 중 신디 셔먼과는 뉴욕 멧 갈라쇼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쭉 친구로 지냈다. 사실 신디는 유머와는 거리가 매우 먼 사람이다. 오히려 말을 신중하게 내뱉는 타입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만의 시니컬한 유머가 담긴 작업은 더욱 흥미를 끌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최근 그녀의 작업물에 나의 컬렉션이 자주 등장했다. 나와 신디는 통하는 점이 많기에 그녀는 ‘스텔라 걸’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신디의 ‘E for Effortless’ 속에 담긴 굉장히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유머를 사랑한다.
한편 ‘Desire(욕망)’의 알파벳 ‘D’는 작고한 영화 세트 디자이너이자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르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나는 그를 부모님과 함께 탄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그림에 미쳐 있던 열두 살의 작은 꼬마였는데, 그가 나를 그의 아카이브에 초대해주었을 때 사탕보다 더 달콤한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그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 북을 어디선가 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에르테의 반짝이는 데코 스타일과 그와의 값진 추억은 나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아가 알파벳 ‘D’를 ‘Desire(욕망)’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신과 쇼걸 등 이들과 얽히고설킨 신비하면서도 매혹적인 욕망을 그려낸 20세기의 에르테. 이처럼 이 시대의 여성들을 최고로 만족시킬 옷을 디자인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업이 아닐까.
‘A to Z 성명서’의 이미지들을 흥미롭게 살펴보던 중 ‘L is for Linda’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어머니이자 사진작가 인 린다 매카트니(Linda McCartney)의 모습이 특별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이 갖게 되는 일의 원동력과 영감은 무엇인가? 알파벳 ‘L’은 나의 어머니 ‘Linda(린다)’를 가리킨다. 사실 ‘Love(사랑)’라는 강력한 후보도 있어 진지한 논의가 오갔지만 결국 린다로 결정했다. 이 세상에 더는 함께하지 않지만, 나의 어머니 린다는 내 모든 영감의 원천이자 영원한 뮤즈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어머니 ‘린다’는 ‘사랑’ 그 자체이기도 하다.
2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온 당신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며 얼마 전 50주년을 맞이한 브리티시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인터뷰를 떠올리기도 했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50주년, 즉 2051년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스스로 그려내는 ‘스텔라 매카트니의 내일’에 대한 소망을 알고 싶다.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다. 글쎄, 아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그때도 지속해서 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지난 20년 동안 주장해온 모든 것 말이다. 그리고 여러 캠페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나의 신념이 그때 즈음에는 하나의 사회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혀 있으면 좋겠다. 정말로 온 진심을 다해서, 2051년에는 모두가 환경을 의식하며 일상 속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생활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없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처음 이 길로 들어섰을 때 나는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 그 당시 모두가 나에게 가죽이나 모피를 사용하지 않으면 성공적인 럭셔리 브랜드를 이룰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뒤의 나의 모습을 보라. 성공적이고 견실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굳건한 신념을 바탕으로 발전할 스텔라 매카트니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다.
- 패션 에디터
- 박연경
- 사진
- COURTESY OF STELLA McCART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