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골목을 거닐었다. 일상에 기분 좋은 자극을 줄 만한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를 만났다.
경주 황리단길 황남동
1_노워즈
빈티지한 외관만 보고선 황남동에서 가장 트렌디한 공간을 자칫 지나칠 수 있으니 주의.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심한 듯 러프하게, 불규칙하지만 교묘하게 잘 짜인 인테리어에 반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공간만큼이나 초감각적인 오라를 뽐내는 주인이 운영하는 ‘노워즈(No Words)’는 여행차 우연히 들렀다가 경주의 매력에 푹 빠진 서울 남매가 차린 카페다. 진하고 고소한 맛을 즐긴다면 화이트 커피를 추천, 커피 본연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당일 가장 좋은 원두를 선별해 내려주는 필터 메뉴를 추천한다.
2_어서어서
경주를 아끼고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경주 사람, ‘어서어서(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서점 대표 양상규. 그는 황리단길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가장 ‘경주스러운’ 책을 추천할 때, 혹은 동리목월문학관 관장님 같은 마을 어르신에게 칭찬을 받거나 젊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책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 어서어서는 시, 에세이, 독립 출판물을 취급하는 문학 전문 서점이자 경주와 책을 사랑하는 서점 주인이 오래도록 소망하던 꿈 보따리를 풀어놓은 보금자리 같은 곳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과 오래도록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그는 실제로 매주 화요일 독서모임을 열고 있다.
3_고도
2월 오픈을 앞둔 카페 ‘고도’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골목의 뉴페이스는 아니다. 황남동이 ‘황리단길’이라 불리기 전부터 일찌감치 골목 입구 첫 번째 터를 차지한 브런치 카페 ‘노르딕’의 주인이 손님들의 열띤 성원에 힘입어 근방에 차린 두 번째 공간이다. 거리를 오가며 가볍게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기 좋고, 볕이 좋은 카페 앞 마당에 눌러앉아 눈앞에 펼쳐진 대릉원을 바라보며 수다를 즐기기에도 제격인 위치에 있다. 이 집의 시그너처 메뉴이자 진한 풍미가 일품인 라테는 잊지 말고 마셔보길.
4_빛꾸리
‘집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가장 와닿는 공간 ‘빛꾸리’는 일제 강점기 때 지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간판 없는 한옥 카페다. 섬세하고 멋스러운 전통 자기와 인테리어 소품, 보기 좋은 만큼 맛도 좋은 수제 전통차와 건강한 다과 메뉴는 대표가 평소 즐겨 배운 취미 생활과 감각적인 취향에서 비롯했다. 카페를 만들기 위해 컵과 그릇을 사들이고 공간을 인위적으로 꾸민 것이 아닌, 일상을 꾸리는 그녀의 손길이 자연스레 묻어 있는 집이기 때문. 집주인은 빛꾸리가 많이 알려지지 않길 바란다. 손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취미가 일이 되고, 여유를 잃는 것이 두려워서다. 그럼에도 황남동에서 멋스럽기로 손꼽히는 전통 한옥 카페와 마주하고 싶다면 슬쩍 다녀와보길.
5_배리삼릉공원
황남동에 자리한 가게 주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경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지극 정성으로 아끼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중 대놓고 경주 사랑을 과시하는 ‘배리삼릉공원’ 은 경주와 관련된 아이템만을 고집하는 선물 가게다. 신라금관 머리띠부터 첨성대 모양의 향초, 다보탑이 그려진 성냥, 성덕대왕신종 배지, 조선왕조실록 엽서 등 경주 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림들이 한데 모여 있다. 판매하는 제품 중 숍의 대표 이형진이 제작에 참여한 굿즈도 꽤 인기 있는 편인데, 가죽 공방과 협업 제작해 경북관광기념품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가죽 마그넷’ 이 대표적인 예. 경주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배리삼릉공원 숍 자체가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6_카페 더 클램프
‘카페 더 클램프’ 의 첫인상은 거대한 중국 가옥 같았다. 황남동, 그것도 경주 한옥들 사이에서 자칫 실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건축가 김성신의 설명을 들어보니 금세 의문이 풀렸다. 카페 더 클램프는 일반적인 한옥보다는 건축가의 현대적인 재해석이 가미된 복합 건축물에 가깝다. 건물은 조선 말기, 외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덕수궁의 2층 전각 석어당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복층의 웅장함과 개방감을 더하기 위해 층고를 최대로 올리고,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난간을 만들어 이색적인 느낌을 더했다. 주인이 세계 각지를 돌며 수집한 듯한 다양한 인테리어 장식과 소품도 흥미롭다.
7_황남주택
“처음 황리단길에 놀러 왔을 때가 생각나요. 카페나 밥 먹을 곳은 많은데 간단하게 술을 즐길 만한 곳은 없더라고요. 여행엔 술이잖아요.”한때는 관광객이었던 조혜진 대표가 경주 사람인 남편과 결혼해 함께 한옥 맥줏집을 차리게 된 계기다. 쓰러져가는 폐가에 그녀의 아이디어와 손길을 더하니, 한옥이 가진 고유의 정갈한 분위기는 유지한 채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메뉴로 무장한 독특한 맥줏집이 탄생했다. 이 공간이 더욱 정감이 간 이유는 술안주에 있다. 오징어와 어묵탕부터 기억 저편의 이름 쫀듸기, 꾀돌이, 아폴로와 같은 불량 식품까지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이 방문하는 이곳 황남주택은 지나가다 들러 가볍게 한잔하기 좋은 친구네 집 같다.
8_아니마
경주에서 태어나 세계 3대 요리학교인 CIA를 졸업한 한정욱 셰프가 운영하는 이탤리언 레스토랑 ‘아니마(Anima)’ 경주점은 고향인 경주에서 천년 고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즐기는 양식 가게를 차리는 것이 꿈이었던 대표가 울산 1호점에 이어 지난 12월 황남동에 문을 연 두 번째 야심작이다. 황리단길 외곽에 들어선 이곳은 메인 골목에 비해 비교적 한가로운 분위기다. 매일 아침 반죽해 뽑은 생면 파스타와 엄선한 고기로 셰프가 직접 커팅해 만든 스테이크, 그리고 고급스러운 디저트, 다양한 종류의 빈티지 와인, 메뉴 고민을 덜어주는 세트와 코스까지. 연인, 친구, 가족 누구와 들러도 만족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여름엔 테라스를 개방할 예정이라고.
터줏대감 인터뷰
양상규 어서어서 서점 대표
“저는 경주가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의 젊은 친구들이 하나둘 이곳을 떠나더라고요. 안타깝긴 했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갔죠. 젊은 사람들이 황량한 시골 바닥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 외엔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었던 건 사실이니.” 조용한 장소에 서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는 청년 양상규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황리단길’이었다. 경주도 젊음과 활기로 가득 찬 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고,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순간의 유행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내실을 채우고 싶었다. 관광객들이 맛집과 카페에서 줄만 서다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잠시 들러 구경만 해도 좋으니 여유롭게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은 황리단길 한가운데 문학 전문 서점 ‘어서어서’로 결실을 맺었다. “황리단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사실 부끄러웠어요. 억지스럽잖아요. 동네가 대릉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대릉원길’이 조금 더 그럴듯하지 않나요?“ 인터뷰를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진심을 툭 뱉어 버린 그의 말은 현재 황리단길을 대표하는 인기 서점의 주인이자, 동네의 터줏대감이기에 가능했다. 이름이야 어찌 됐건 이 동네엔 개선이 시급한 사항이 있다며 주차 환경, 인도 설치 두 가지를 거듭 강조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가 가장 기쁘다는 서점 주인 양상규는 이 거리를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람으로서 황남동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 디지털 에디터
- 배그림
- 포토그래퍼
- 이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