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이 사랑했고, 200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으며, 그리고 이젠 가장 쿨하고 무심한 기운으로 스트리트를 점령한 트랙 슈트의 귀환에 대하여.
풋풋한 대학생 새내기였던 2000년대 초반, 트렌드에 합류하기 위해 과감하게 마련한 옷들을 떠올려보면 감춰놓은 흑역사를 들춰보는 양 얼굴이 벌게진다. 당시 패션에 있어선 나름대로 앞서간다는 언니들의 영향으로 교포 스타일에 심취한 나는 골반 바지며, 부츠컷 청바지, 어깨에 딱 끼워 메는 작은 손가방을 패션의 최우선으로 꼽았다. 그중엔 물론 최근 쥬시 꾸뛰르 추리닝도 있었다. 미끄러질 듯 촉촉한 벨벳의 질감, 시그너처인 분홍색(내 것은 진회색이었지만)이 선사한 시각적 강렬함, 엉덩이와 후디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쥬시’ 로고, 그리고 지퍼의 J 이니셜 장식까지. 패리스 힐튼,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를 비롯한 할리우드 ‘잇’ 걸들은 누구나 쥬시 꾸뛰르 트랙 슈트를 입고 캘리포니아 걸의 맵시를 뽐냈다. 촌스럽다 여겨지고, 이제는 까마득하기까지한 이 트랙 슈트에 엄청난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가 있으니, 바로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다. 두 달 전 그의 2017 S/S 쇼의 협업 브랜드로 ‘발탁된’ 쥬시 꾸뛰르는 이제 #TrackIsBack이라는 해시태그를 내세워 챔피온이 그랬듯이 밀레니얼 시대의 재기를 꿈꾼다. 2년 전, 쥬시 꾸뛰르가 미국을 시작으로 스토어를 정리해갈 예정이라는 뉴스까지 발표한 걸 떠올려 볼 때, 브랜드에게 뎀나는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뎀나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쥬시 꾸뛰르를 비롯한 갖가지 트랙 슈트의 귀환은 스트리트 패션의 열풍을 관통한다. 스웨트팬츠, 스웨트셔츠 룩이 그 어느 때보다 쿨해진 시대에 가장 편안한 스웨그 넘치는 ‘추리닝’이야말로 자유 분방함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키 룩이다. 스트리트 문화의 보편화와 패션계에 스며든 힙합 스타들의 파워로 트랙 슈트가 재기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 조성된 것. 특히 여성들이 이토록 트랙 슈트에 열광한 까닭은 슈퍼 ‘잇’ 걸들의 홍보 효과가 한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켄들 제너, 지지&벨라 하디드, 리하나의 파파라치를 살펴보면 이들이 추리닝의 하이패션화에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탄탄한 복근을 자랑하며 에슬레저 트렌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들은 집 앞에서나 공항에서나 패션위크 쇼장 앞에서나 아디다스, 나이키 트랙 슈트 차림이다. 브라톱, 하얀색 티셔츠, 오버사이즈 코트 등 그 어떤 런웨이 의상과 매치해도 전혀 운동복 같지 않은 쿨한 조화가 인상적이다. 리한나는 펜티 푸마 디자인에 직접 나서기도 했는데, 기존의 트랙 슈트를 보다 드레시하게 변형해 트랙 슈트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지 컬렉션을 통해 스트리트풍 트랙 슈트 스타일의 변주로 상업적 성공을 이어가는 카니예 웨스트도 마찬가지. 2017 S/S 뉴욕 패션위크에선 쿨 지수 최상위를 구가하는 알렉산더 왕이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와 벌인 대대적인 협업 컬렉션 쇼를 진행했는데, 그 역시 피날레에서 트랙 슈트의 향연을 펼쳤다. 왕에게는 왕스쿼드가, 리한나는 지지, 벨라 등 금수저 친구들이, 카니예 웨스트에게는 가족과 자신의 힙합 크루가 지원을 보내고 있는 중! 이처럼 현재 패션, 문화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들이 트렌드 최전방에서 트랙 슈트 군단을 이끌고 있으니, 쥬시 꾸뛰르가 기록한 2000년대보다 더 화려한 트랙 슈트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닐까.
자, 이제 트랙 슈트가 대세임은 확실해졌으니 어떻게 추리닝 같지 않게 입을지에 주목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트랙 슈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다.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속 편한(care–free) 애티튜드가 우선이라지만 그렇다고 고시생 패션이라면 절대 허락되지 못할, 까다로운 아이템이라는 점을 명심할 것! 먼저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웨스 앤더슨의 영화 속 차스 테넌바움이 떠오르는 너드풍 트랙 슈트를 고집한 라코스테가 이번 시즌보다 모던하게 변화한 모습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 지퍼를 목까지 채워 올린 남색 트랙 슈트 상·하의에 긴 양털 코트를 걸친 런웨이 모델은 마치 추리닝 차림으로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사러 나선 캐롤라인 베셋 케네디의 2016년 버전처럼 느껴 진다. 벨벳 소재의 통 넓은 팬츠 트랙 슈트는 그 어떤 벨벳 드레스보다 모던하고, 우아하다. 땅에 끌릴 듯한 긴 스커트, 후디 스타일로 트랙 슈트의 ‘드레스화’를 선보인 베트멍 컬렉션에선 스트리트적인 기존의 특징에서 업그레이드한 아방가르드적 시도도 엿보였다. 스포츠웨어와 라운지웨어를 넘나드는 트랙 슈트는 리얼웨이에서 더욱 유용하다. 트랙 슈트의 고유함과 반대되는 볼드한 요소를 상반되게 연출하는 게 관건. 상의 위에 화려한 퍼 베스트나 코트를 입거나 자수 장식 보머 재킷을 걸치고 화려한 주얼 장식 힐이나 클러치를 연출하는 식이다.
지난 시즌 구찌와 끌로에, 베트멍 등 하이패션 런웨이에 등장한 트랙 슈트 열풍은 이번 시즌 찾아온 전성기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패션은 돌고 돈다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 다시 히트를 쳤던 어떤 트렌드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주류와 비주류를 오가며, 엄격한 하이패션이자 개성과 자유가 핵심인 스트리트 코드가 녹아 있어야 한다는 동시대적 움직임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것 이야말로 트랙 슈트가 아닐까? 문득 이 기세를 몰고 영광의 회생길에 들어설 다음 트렌드 아이템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미다스의 손 뎀나 바잘리아가 어떤 마법의 터치로 예상 밖의 것에 선풍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을지 말이다. 패션 테러리스트의 아이템으로 꼽히기도 했던(하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어그 부츠에게 조심스레 한 표를 던져본다. 쥬시 꾸뛰르 트랙 슈트와 완벽한 하모니 를 이룬 그 전성기를 회상하며!
- 에디터
- 백지연
- PHOTOS
- JASON LLOYD-EVANS(스트리트), INDIGITAL(런웨이), GETTY IMAGES, SPLASH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