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인 천정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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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중인 천정명을 만났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여행과 서핑,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만 나눴다. 특유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기운은, 그가 일하고 있을 때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지만.

청록색 니트와 레이스 톱, 네이비 팬츠는 모두 Gucci, 샌들은 Giorgio Armani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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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아니 그 전에 인스타그램에서 봤다. 

토크쇼 <택시> 인터뷰 때문에 태국에 갔다. 2000년에는 정글 쪽으로 가서 촬영만 하고 왔는데 이번이 두 번째다. 개인 시간이 꽤 있어서 친구들이랑 같이 가서 쉬다 왔다. 친구들이랑 다니는 여행이 제일 재밌다.

애인이랑 가는 여행보다?

애인하곤 자주 가지도 못했지만 항상 싸우고 결말이 안 좋았다. 친구들이랑 갈 때도 커플이 끼면 계속 싸우더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신뢰가 깊어진 다음에 떠나는 여행이 아닌 다음에야 마음 맞는 친구 서너 명이 가야 훨씬 즐겁다.

여행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라, 어떤 멤버들인가?

운동을 좋아하는 그룹이 있고, 노는 거 좋아하는 친구 그룹이 있다. 대체로 사회에서 일하면서 만났는데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다.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상대와도 여행 가서는 의외의 포인트에서 다투거나 소원해질 수 있다. 여행은 계획이나 식성, 취향 같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맞물리는 체험이라, 겪으면서 분류되고 걸러지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갑작스럽게 만나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라 해도 여행을 같이 가게 되는 건 아니니까.

여행 파트너로서 당신 자신은 어떤 사람 같나?

그때그때 다른데, 같이 여행하는 친구들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상대방에게 유연하게 맞추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즉흥적일 수도 있지만, 코드가 어느 정도 통하는 상대방이 확실하게 어디 가자고 딱 집어주면 따라서 간다.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다른 제안을 하기도 하고.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파트너인 편이다, 내 생각엔(웃음).

페이즐리 무늬의 야상과 셔츠는 모두 Givenchy by Boon the Shop, 데님 쇼츠는 The Kooples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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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랑 같이 즐기는 운동은?

보통 골프 여행을 많이 다니던데.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며 쳐보긴 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제대로 칠 기회가 생겼을 때 친한 형이랑 같이 필드에 나갔더니 내기를 하는 거였다. 스포츠에 내기를 끌어들이는 걸 정말 싫어한다.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골프는 치지 않고 있다. 

내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나?

즐기는 사람도 많은데. 농구나 축구, 다른 어떤 게임을 해도 내기는 절대 안 한다. 승부욕은 강하지만 스포츠 그 자체의 쾌감에 집중하는 편이다. 내기를 거는 건 운동의 순수함을 해치는 것 같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스포츠는?

너무 많다. 고루 즐기는데 요즘은 주짓수, 사이클, 서핑, 수영, 테니스….

주짓수는 처음 들어본다. 어떤 점이 재미있나?

유도나 레슬링처럼 도복을 입고 일대일로 하는 격투기다. 상대방을 잡아서 메치고 태클 걸고 넘어뜨린다. 보통 1시간은 기술을 배우고 나머지 1시간 동안 스파링을 한다. 테크닉 수업이 끝나면 배운 걸 스파링할 때 바로 사용해보는 재미가 있다. 상대방한테 그 앞 시간에 배운 걸 써서 제압하는 성취감이랄까, 즉각적인 보람이 있다. 스파링은 5분에서 10분 정도 하는데,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상대방이 어떻게 들어올까, 내가 어떻게 막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오직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몰입감이랄까 희열 같은 게 굉장하다. 체육관 멤버들도 다양해서 재미있다. 학생부터 일 안 하는 분, 자영업자 등등. 평범해 보이는 분들이랑 스파링하면서 얘기 나누다 보면 검사나 의사, 대기업 임원인 경우도 있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배운다.

어떻게 보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골프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운동 같다.

그런 면도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도장에서 맨몸으로 하는 거니까.

짜임이 성긴 투톤 니트는 Ann Demeulemeester by 10 Corso Como, 그레이 배기팬츠는 Daniel Andersen by 10 Corso Como, 페도라는 Etudes by 10 Corso Como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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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지위나 관계를 내려놓고 한다는 면도 있고. 그런데 격투기를 하다 보면 다치기 쉽지 않나?

다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자신의 신체 능력을 너무 믿고 과격하게 할 때 그렇다. 상대방이 나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굽히면 절대 다치지 않는다.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하게 하는 운동이다.

레슬링 하는 분에게 들었는데, 시합 전에 악수만 해도 내가 이길지 질지 알 수 있다고 하더라.

레슬링이나 유도처럼 서로 몸이 붙는 운동은 다 마찬가지일 거다. 상대방의 신체 어디든 딱 잡아보면 느낌이 있다. 아마 복싱에서 펀치 하나를 맞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것 같다. 그때 억지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잘 굽히고 피하면 이길 수도 있다.

파퀴아오를 제압한 메이웨더처럼? 맞다(웃음). 그렇게 잘피하면 이기지만 재미가 없고 얄밉지. 특히 격투기는 시합하는 스타일 보면 성격이나 캐릭터가 나온다.

서핑도 즐긴다고 들었다.

5년 전쯤 시작했는데, 그때는 국내에 서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2~3년 사이 강원도에 서핑 숍 생기고, 서핑 인구가 많아졌다. 거칠고 도전적인 운동이라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절대 못한다. 외국 바다는 허리까지만 물이 차도 파도가 높은 곳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가 않아서 바다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보드 위에 몸을 싣고 있을 때 노을이 지는 걸 바라보거나, 거친 파도를 잡아서 미끄러지듯 탈 때면 구름 위에 뜬 기분이다. 중독성이 강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서핑의 매력이라던데.

파도가 계속 오지 않으니까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는 365일 파도를 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 파도 어플의 날씨 차트만 보고 있다가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파도를 넓게 지나오면 그걸 쫓아가도 놓치기도 하고, 찾아가면 옮겨가기도 하고. 그렇게 거기서 같이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랑 앉아서 얘기도 나누고 친해지기도 한다. 서퍼들 사이에도 예의범절이 있다.

왕관 패턴의 베스트와 팬츠는 Dolce & Gabbana, 시폰 블랙 셔츠는 Gucci, 앵클부츠는 Berluti, 반지는 모두 Toco by Unipair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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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먼저 잡은 사람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다. 

우선 그 지역 사람들이 파도를 타는 구역은 피해줘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하고. 가장 중요한 규율은 동시에 파도를 잡으면 미묘하게 잠깐이라도 먼저 잡은 사람이 타게 양보해야 한다는 거다. 그걸 무시하고 나중에 온 사람이 타버리면 한두 번 정도는 눈감아주지만 싸움이 되기도 한다. 부산이랑 제주도는 그런 규율이 엄격한 편인데, 요즘 양양에는 타지 사람들이 많아져서 무법 지대라고 들었다.

최근 인스타그램 업데이트는 거의 서핑 사진이더라.

부산에서 서핑 숍을 하는 친한 형들이 강원도에 2호점을 내서, 거기 가서 서핑했다. <하트 투 하트>가 일본에 방영한다고 해서 팬미팅 다녀온 것 빼고는 거의 운동하고, 술 마시고, 영화 보고… 이런 일상이다.

<하트 투 하트>는 어땠나? 이윤정 감독과의 작업이 신선했다고 들었다.

나름 많이 준비해서 갔는데, 전날까지도 아무 말씀 없다가 갑자기 다 바꾸셔서 당황했다. 원래 현장에서 대본을 많이 고치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스크립터 누나가 나랑 <여우야 뭐하니> 때부터 알던 분이고, 이윤정 감독님과 오래 같이 일했다며, 좀 당황스럽겠지만 적응하라고 하더라. 나는 나대로 전날이라도 만나서 리허설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중에 들으니 미리 준비해온 듯한 꽉 짜여지고 딱딱한 느낌이 싫어서 풀어주고 싶었던 거라고 하시더라. 초반에 애먹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 나도 적응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대본을 안 외우고 갔다. 어차피 대사량이 많아도 다 바꾸실 거니까, 뭐. 대신 현장에서 생각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했다.

기하학 패턴의 재킷은 Gucci, 헨리넥 네이비 셔츠는 Christopher Kane by MUE, 그레이 팬츠는 Prada, 버건디색 로퍼는 Unipair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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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에 따라 스트레스 받을 수 있는 상황일 것 같은데.

초반엔 힘들었다. 그래도 워낙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셔서 매 신 들어갈 때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주시는 편이었다. 그걸 안 해주는 감독님도 많은데, 다음 드라마에서 그런 분을 만나면 촬영할 때 생각날 거 같다. 배우들이랑 감독님 스태프들이 같이 얘기하던 그룹 채팅방이 아직 남아 있어서 지금도 대화 나누는데, 먼저 다른 작품 들어간 친구들이 우리 현장이 너무 그립다고들 한다. 

다음에 뭘 할지, 정했나?

확정은 아닌데,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하나를 진지하게 얘기 중이다.

귀여운 얼굴이라서인지, 드라마에서 그동안 보여준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주로 로맨틱 코미디에 캐스팅되는 것 같다. <신세계> 같은 하드보일드 액션에도 언밸런스하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나도 액션 장르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런데 영화 쪽은 한번 했던 사람들과 호흡이 맞으면 패밀리처럼 다음 작품도 계속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 거길 비집고 들어가는 게 진짜 힘들다. 나도 나이 조금 더 들면 선 굵은 액션 같은 걸 하고 싶다. 동안이라는 게 좀 방해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천천히 가는 길이다. 계속 가다 보면 흐름을 또 탈 때가 있겠지. 

파도를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당신은 좋은 서퍼니까.

그거라면 자신 있다(웃음).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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