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포츠담에서 개인전 두 개를 동시에 치르고 있는 화가, 노르베르트 비스키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나의 베를린

2019-12-24T17:09:19+00:002019.12.25|FEATURE, 컬처|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의 역사와 기억을 바탕 삼아 고유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 노르베르트 비스키(Norbert Bisky).  그의 캔버스에서는 무수한 색상이 충돌하며 역동적이고 화려한 리듬을 만든다. 베를린과 포츠담에서 개인전 두 개를 동시에 치르고 있는 그를 만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동하고, 앵포르멜, 추상회화, 팝아트가 주요 예술 사조로 떠오르면서 독일 회화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한 배경에서 전통성과 정체성을 새롭게 재확립하기 위해 독일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신표현주의 회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처럼 국제적 흐름을 수용하고 새로운 매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추상회화의 흐름도 한편에 있었다. 그렇게 신표현주의와 추상회화의 바람이 뜨겁게 지나가고, 이렇다 할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상태가 지속된 독일에서 ‘노르베르트 비스키(Norbert Bisky)’는 독일 회화의 계보를 이을 이름으로 부상했다. 2000년대 초부터 독일 언론에서 ‘포스트모던 신사실주의’라는 언급과 함께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그는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Le FNAC), 독일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Museum Ludwig) 등 유수의 미술관 컬렉션에서 작품을 공개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다.

2019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도시가 크고 작은 미술 이벤트로 뜨거운 동안에도 각종 미술 관련 미디어에서 노르베르트 비스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70년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동독 체제 아래에서 보낸 그의 배경 때문이다. 억압과 저항의 무거운 역사를 바탕으로 거침없이 드러나는 개인의 감정과 사실적인 표현 방식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화풍으로, 강렬하면서도 엄숙하다. 멀리서 보면 다양한 색의 대비와 사용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불편한 현실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그림. 노르베르트 비스키는 그런 작업을 통해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변화야말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2019119일부터 2020223일까지 포츠담의 빌라 쇠닝겐(Villa Schöningen)에서 <RANT>전을, 1110일부터 216일까지 베를린의 성 마테우스 교회(St.MatthäusKirche)에서 <POMPA>전을 하는 그를 동베를린 구역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에 위치한 넓은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POMPA’전이 열리는 성 마테우스 교회 전경. ‘갤러리가 된 교회’라는 점부터 독특하다. 교회에 걸린 그림들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오르게 한다.

지난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행사가 지속된 일주일 동안 두 도시에서 전시를 시작했다. 개인전 두 개를 동시 진행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다. 장벽 붕괴 20주년 때는 이번처럼 대중의 관심이 크지 않았다. 30년이라는 세대 기간을 맞이하면서 동서를 갈라놓은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독일이 통일되었는지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고조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어린 시절 동독에서의 기억과 그 이후의 변화와 삶을 말하는 전시를 선보이면 무게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준비 과정이 개인적으로 특별하고 의미 깊었다.

개인전을 하는 두 곳은 어떤 공간인가? 단순한 갤러리와는 달리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인데. 우선 포츠담에 있는 빌라 쇠닝겐은 서베를린에서 불과 80~1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그 바로 앞에는 냉전 시대에 동서간 스파이를 교환하던 장소인 글리니케 다리가 있다. 그만큼 정치성이 강하다. 동독을 탈출하려는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던 슬픔의 장소이기도 하고. 이를 고려해서 포츠담에서는 동독에서의 경험과 이를 바라보는 나의 현재 시각을 담아낸 작업을 선보였다. 반면에 서베를린 지역에 속한 성 마테우스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한 독일 역사에서 저항의 상징인 곳이다. 교회에서 800m 떨어진 곳에 동독과 서독의 경계가 있으니 독일 분단 역사도 담고 있는 구역이다. 이곳에서는 독일의 20세기 역사와 독일 통일 이후의 이야기를 주목하는 작업을 주로 선보였다.

포츠담 전시 제목은 <RANT>, 베를린 전시 제목은 <POMPA>다. 낯선 단어인데, 무슨 뜻인가? RANT’는 영어 뜻 그대로다. 싫어하는 것 혹은 분노를 느끼는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독에서 자라며 보고 느낀 것에 관한 분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난 기억을 더듬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분명한 분노 말이다. 사실 나는 동독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동독에서의 기억이 좋지 않다. ‘POMPA’는 라틴어로 행렬, 행진을 뜻하는데, 로마 제국 때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시위 혹은 행렬에서 기원한 말로 알고 있다. 회화라는 매체가 보수적이고 전통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참조할 수 있는 요소를 찾기도 하는데, 마침 이번 전시의 내용을 적절하게 함축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성 마테우스 교회 전시는 작품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천장에 작품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거울이 설치되어 작품이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시작한 설치 아이디어인가? 2018년에 베니스에서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의 작업을 보여주는 큰 전시가 있었다. 대부분의 그림이 천장이나 그만한 높이에 걸려 있어서 작품을 보려면 항상 고개를 위로 하고 봐야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그 경험을 떠올렸다. 교회 목사님께 천장에 작업을 걸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가 흔쾌히 재밌을 것 같다고 수락했다.

당신의 활발한 작업 활동의 시작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을 것 같다. 동독을 떠나 서베를린 미술 대학교 진학, 그리고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표 작가인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를 사사한 것. 동베를린에도 미대가 있었지만, 교수나 학생들의 작업 분위기가 여전히 올드했다. 무엇보다 섹시하지가 않았다 (웃음). 당시 나는 트렌디한 미술에 관심이 컸다. 서베를린의 미대에서는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20세기 추상미술, 팝아트, 잭슨 폴록, 드 쿠닝, 백남준 등의 작업을 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게오르크 바젤리츠를 만나고 그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운이 좋은 일 중 하나다. 그의 반에 들어가고 싶어서 줄을 서는 학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5년간 그에게서 작업뿐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을 배웠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작업을 하지 말라’고 자주 조언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개인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초상화 ‘M’의 모델은 동독 인민 교육상이었던 인물이다. 작가의 분노가 투영된 작품.

이번 개인전에도 소개된 ‘M’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당신 개인의 기억과 유독 밀접하다고 들었는데. M은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의 부인이자 동독 인민 교육상이었던 마르고트 호네커(Margot Honecker)의 초상화다. 10대 학생의 교육을 책임지던 그는 겉으로는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춘 지도자의 모습을 했지만, 실상은 유소년 감옥에서 시행된 고문과 협박을 조장하고 방치한 장본인이다. 나 역시 학생 때 그 여자의 교육 계획에 따라 군사 교육이나 사회주의 사상을 억지로 배워야 했다. 타인에게는 자유를 제한하면서 그 여자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고, 당연히 그 점을 시민들에게는 숨겼다. 분노를 유발하는 그 얼굴은 내 동독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들 중 한 조각이다.

기억과 경험뿐 아니라, 분노와 같은 감정도 캔버스 위의 여러 구상 인물에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특히 헐벗은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표현을 보면 작가의 솔직한 생각 외에 겹겹의 의미와 코드가 읽힌다. 주로 남성을 많이 그리는 편이다.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남성상이 시대를 거쳐 변화하니, 그 표현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나일 수도 있고, 나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와 상징적 코드를 담아내기보다는 개개인의 존재와 성격을 담아내고 싶었다.

당신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단연 색감이다. 특히 서로 다른 색이 부딪치면서 캔버스 밖으로까지 강렬한 느낌을 뿜어내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완전하게 보색인 대비를 좋아한다. ‘완전하고 정확한 보색 대비’를 사용하는 게 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나? 매번 도전하는 기분이다. 충돌하는 색상들 때문에 작품이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당혹스러워하는 관객도 있더라. 하지만 그런 특징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꽤 현실적이지 않나? 우리 모두가 늘 함께 잘 어울리는 건 아니니까. 언제 어디서나 갈등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고양이의 도약’ 정도의 뜻을 지닌 작품명 ‘Katzensprung’. 그의 작품에 묘사된 인물들은 대개 동적인 모습을 취한다.

작업 외적으로는, 그러니까 당신의 일상에서는 어떤 색을 취하며 사는가? 선호하는 의상 색이 있다거나. 캔버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나에게 색은 바이탈 사인과도 같다. 색은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주고, 우리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검은색이나 회색보다는 화려한 색상을 선호한다.

작업실에 쌓여 있는 CD가 눈에 들어온다. 작업할 때 음악을 잘 틀어놓는가? 베를린의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해서 디제이 헨리크 슈바르츠(Henrik Schwarz)나 올리퍼 콜레츠키(Oliver Koletzki) 등 독일 일렉트로닉 컨템퍼러리 음악을 즐겨 듣는다. 작업할 때는 무브먼트가 필요한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전반적인 과정은 어떻게 되나?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처음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생각과 이어지는 사진 이미지를 찾아, 그걸 바라보면서 페인팅으로 어떻게 변환시킬지 고민한다. 이런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작업을 완성한다. 처음에 생각했던 이미지와 굉장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작업 활동에 모티프가 되는 당신과 독일 사회의 역사 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평범한 일상과 삶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부모님 혹은 남동생의 죽음도 나에게 일어난 일 중 하나이고. 주변 이웃의 일상,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이 나에게, 그리고 내 작업에 중요하다.

포츠담 빌라 쇠닝겐, ‘RANT’전 전경.

당신의 아버지는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SED)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라고 들었다. 아버지는 정치를 하기 전에 포츠담 바벨스베르크 영화학교의 학장이셨다. 많은 지식인이 더 나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정치 영역으로 진출했다. 아버지도 스스로를 ‘개혁적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며 사회주의가 틀리지 않은 선택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과 믿음은 틀린 것으로 판명됐지만 말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예술이라는 언어로그 30주년을 이야기하며 뭘 느꼈나? 독일이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기뻤다. 30년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우리는 무엇을 돌아봐야 하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나는 예술이라는 것이 상처와 아픔을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여러 문제와 아름다움을 함께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

만약 장벽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베를린 장벽이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아마 독일을 떠났을 것이다. 동독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았을까?(웃음)

다행히 장벽은 무너졌고, 당신은 화가가 되어 전시차 뉴욕, 런던, 파리 등 세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닌다. 당신에게 베를린은 어떤 도시인가?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베를린이 바로 그렇다. 언제든 와서 살 수 있고, 개인이 사회의 변화에 작은 부분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열린 곳. 그 점이 이 도시만의 매력이다. 끔찍하게 어둡고 추운 겨울은 손에 꼽는 단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