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진화하는 패션.

1930년대 엘자 스키아파렐리와 살바도르 달리는 오늘날의 패션계에서 수시로 목격하는 예술과의 협업을 처음으로 시도한 장본인이다.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에 입각한 창의적인 스키아파렐리의 의상은 ‘대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파격적이었으며, 달리를 비롯한 당대 아티스트들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그녀는 패션을 또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지금에는 유서 깊은 럭셔리 하우스 브랜드부터 스트리트 문화를 대변하는 스포츠, 캐주얼 브랜드까지, 패션과 예술의 수많은 협업 이슈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들려온다. 컬렉션의 영감을 얻는 것부터 기념비적인 브랜드의 이벤트를 기리는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과 전시, 지속적인 예술 후원 사업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제공하는 무한한 플랫폼이 패션을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드는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패션의 현재와 미래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최근 인터뷰를 위해 만난 SFDF 수상자 정고운과 정지연를 비롯한 다수의 젊은 디자이너들 역시 이런 패션계의 방향성에 주목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만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그 고유성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들은 화려하고 멋진 런웨이 쇼보다 오히려 자신의 독창성을 대변하는 요소를 찾는 데 의욕을 보인다. 그 요소로 당대의 예술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건물이나 공간을 찾고, 브랜드에 어울리는 작품과 함께 갤러리 형식의 쇼룸을 만든다거나 방향성을 공유하는 아티스트와 협력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다 선명히 하는 것이 브랜드의 비전과 완성도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라 여긴다.

파리 시립미술관의 패션 큐레이터 올리비에 사이야드는 ‘패션에서 예술에 준하는 미적 고려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올리비에 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사람들은 패션을 단지 직업으로 여기며 평가절하하죠. 제프 쿤스의 아틀리에는 패션 디자이너 레이블의 회사에 버금가는 규모예요. 우리는 다분히 상업적인 아트에는 과도하게 관대하면서, 패션에 대해선 언제나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죠. 전 디자이너들이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말하길 주저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의 차이가 생긴다고 봐요. 물론 디자이너에게 이젤에 그림을 그리라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진정한 크리에이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몇몇 쿠튀르 디자이너를 제외하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예술과는 차별화되던 패션계의 현실은 오래전부터 계속된, “패션이 예술일까?”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제기하게 만든다. 아방가르드한, 예측 불허의 개성 넘치는 패션쇼로 호시절을 누린 10여 년 전의 패션계를 떠올려보면, 놈코어의 등장과 미니멀리즘의 대두, 스트리트 스타일, 스포티즘의 활약 속에서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시도는 축소된 게 사실이다. 런웨이에서 아트 퍼포먼스를 펼치던 디자이너 듀오 빅터&롤프, 괴짜임을 자처한 앙팡테리 블 장 폴 고티에는 기성복 쇼를 포기하고, 오트 쿠튀르 쇼에 집중하는 행보를 택했다. 그렇다고 이들만이 패션계의 아티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1947년 각광받은 디올 뉴 룩의 인기가 2017년 현재, 수많은 셀레브리티를 앞세운 트랙 슈트로 대체될 만큼 변화한 시대다. 오히려 패션이 접근 가능한, 쉬운 예술의 형태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뒤집어 생각해보자. 디자이너는 예술적 영감의 차용, 오마주,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함께한 협업을 통해 또 하나의 가공되고 재해석된 예술을 창조한다. ‘디자인이란 예술과 마찬가지로 혼돈 속에서 무엇인가를 정제해내고, 그 혼돈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2017 S/S 막스마라 쇼 노트의 한 구절은 브랜드의 정수를 포착해내는 디자이너의 안목에 예술적 시선이 더해졌을 때, 더욱 가치 있는 패션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음악, 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적 영감을 자기만의 방식과 새로운 시각으로 적용한 디자이너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한국을 방문해 우리나라의 고미술을 살펴본 후 차분하고도 정적인 선과 분위기가 인상적인 2016 F/W 시즌 쇼를 펼친 에르메스의 나데주 시뷸스키, 일본 아티스트 미키타이프의 고딕풍 캘리그래피를 활용한 프린트 패턴을 선보인 사카이의 치토세 아베,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로 하우스의 장인 정신을 강조한 토즈 등은 패션을 통해 예술적 코드를 직간접적으로 풀어냈다. 언더커버의 준 다카하시는 독일의 콜라주 아티스트 마티유 부렐(Matthieu Bourel)의 연속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이 프린트된 의상을 통해 입체적인 질감의 소재 활용이 돋보인 컬렉션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프라다는 2016 F/W 남녀 컬렉션을 위해 프랑스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크리스토프 슈맹과 손을 잡았다. 그는 미술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림과 사진, 글쓰기, 디자인, 비주얼 디렉팅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작업을 이어가는 아티스트다. 슈맹의 최근 그림이 프린트된 프라다 컬렉션은 규격화된 액자가 아닌, 화이트 셔츠라는 움직이는 캔버스 위의 작품을 만나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통해 예술적 교류를 펼치는 루이 비통의 킴 존스는 2017 S/S 남성 컬렉션에서 런던의 아티스트 형제, 디노스&제이크 채프먼과 함께 아프리카와 파리를 테마로 탄생한 동물 패턴을 활용한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철학 이론과 예술의 역사, 전쟁과 소비지상주의 등 현실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삼아온 채프먼 형제는 선정적인 주제를 비틀고 파괴하는 형식을 통해 단순하고 직관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개념미술가다.

막스마라는 창립자 아킬레 마라모티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술과 적극 교감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표현한다. 새로운 시즌의 영감 보드만 봐도, 막스마라가 예술에 기반한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발전시키는지 알 수 있다. 막스마라는 2017 S/S 컬렉션을 통해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던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의 라틴아메리카 모더니즘을 차용한 룩을 선보였다. 보 바르디는 ‘트로피칼리아’(Tropicalia, 1960년대 이후 브라질 예술 및 음악 전반에서 일어난 열대주의 운동)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당시 질베르투 질 같은 음악계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앨범을 만든 적도 있는 인물.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비전을 가진 보 바르디는 막스마라가 그리는 여인과 닮았다. 보 바르디가 애정한 동식물상은 이번 시즌 막스마라 프린트의 영감이 돼줬고, 기하학의 완성미가 돋보이는 그녀의 건축 세계 역시 막스마라 컬렉션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됐다. 지난해 막스마라는 뉴욕 휘트니 뮤지엄의 신관 오픈 1주년을 기념한 ‘휘트니백 애니버서리 에디션’ 가방을 론칭했고, 지난 12월엔 상하이에서 아티스트 리우웨이(Liu Wei)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캡슐 컬렉션, ‘모노폴리스’를 공개하기도 했다.

젊은 피가 넘치는 런던 패션위크의 강점을 꼽으라면, 타 도시에 비해 트렌드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는 데 비중을 두는 디자이너가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술적 접근에 있어서도 보다 대범하고 자유롭다. 건축가 데이비드 힉스의 노트에서 영감을 받은 J.W. 앤더슨, 아티스트 아그네스 마틴의 줄무늬와 체크보드 모티프를 코트에 입히고, 디자이너가 직접 그린 그림을 옷에 프린트한 슈림프, 레바논의 최초의 추상화가이자 조각가인 살루아 라우다 슈케어(Saloua Raouda Choucair)와 미국의 추상인상파 화가인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의 작품에서 영감 받은 프린트와 실루엣을 선보인 유돈 초이 컬렉션이 그 예다. 햔편 디자이너 주도의 예술 차용과는 반대로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도 있다. 영감을 소통하는 방식의 진화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디올은 런던의 디올 하우스 오픈과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를 기념하기 위해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각가 겸 디자이너, 화가인 마크 퀸(Marc Quinn)에 의뢰, 아이코닉한 가방과 작은 가죽 소품을 그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런던 익스클루시브 한정판을 제작했다. 무슈 디올이 자신의 패션쇼에 참석한 방문객을 위해 마련한 나폴레옹 2세 의자 스타일의 카나주 모티프 레이디 디올 백이 아트 작품으로 거듭난 사례다. 마크 퀸 외에 영국의 제이슨 마틴(Jason Martin), 이언 대븐포트(Ian Davenport), 매트 콜리쇼(Mat Collishaw), 미국의 매슈포터(Matthew Porter), 대니얼 고든(Daniel Gordon),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등과 함께 조각, 그림, 비디오 아트, 콜라주 아트워크 등 창의적인 협업을 펼쳐온 디올. 그런 행보를 보여왔기에 디올의 아카이브가 예술적 풍요로움으로 넘쳤던 게 아닐까.

아트 바젤, 아트 비엔날레에 패션 브랜드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단순한 아카이브 전시가 아닌, 패션 큐레이터의 미학적인 관점이 투영된 흥미진진한 패션 전시가 날로 늘고 있다. 패션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패션 관련 전시를 찾는 일반인도 많아지는 추세다. 무엇을 입고, 어떤 인테리어를 좋아하고, 어떤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등 예술적 취향이 묻어나는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시대인 것. 어쩌면 패션이야말로 이 모든 예술적 영역을 넘나드는 허브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감성을 공유하는 예술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예술의 접목을 넘어, 조력자로서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지속적으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해간다면, 영감의 화수분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