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장품이 내 화장품이라고 왜 말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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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숨겨놓고 만나는 연하의 애인 같은 거다. 치열하게 사랑하지만 결코 당당해질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관계. 다음은, 홈쇼핑 화장품에 빠진 어느 30대 여성의 이야기다.

1. CROQUIS by Lee KyungMin 스윙 스타일러 02.2. SEP 아가디르 토털 파운데이션.3. LEADER’S 리더스 인솔루션 링클 오프.4. VICTORIA 스웨덴 에그팩.5. SEP 다이아몬드 젤 라인 섀도.6. CROQUIS by Lee KyungMin 퍼펙트 파운데이션.7. GENIC 셀더마 안티링클&화이트닝 하이드로겔 아이 패치.8. SECRET KEY 스네일+EGF 리페어링 에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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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저마다 남자를 등급 매기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등급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한다. 내 경우 차별 대우는 데이트 전날 붙이는 마스크팩에서 정점을 이뤘다. 횡성 한우 꽃등심 같은 1등급 남자를 만나기 전날 밤엔 SK-II 페이셜 트리트먼트 마스크를 정성껏 펴 붙였다. 하지만 군부대에나 공급되는 3등급 저질 육우 남자한테는 1천원짜리 시트팩도 과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한 쓰나미가 불어닥쳐 이 확고한 원칙을 뒤엎어 놓았다. 태풍의 핵은 ‘하유미팩’이었다.

TV를 켜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오양? 교오양 있는 게 그르구 살어?”하던 그 목소리였다. 김수녕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이 뇌리에 쏙 박히는 음성은금세습자지마냥 얇은 내 귀에 붙어 팔랑대며 주문을 재촉했다. ‘제닉 셀더마 안티링클 하이드로겔 마스크’라는 풀 네임 따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하유미팩’이, 그렇게 나에게 왔다. SK-II 마스크는 1세트 6장에 9만5천원, 하유미팩은 1세트 60장에 9만9천원, 게다가 눈 밑 시트 30장이 덤! 이 짐승 같은 용량의 팩의 더 놀라운 점은 붙이고 잔 다음 날 아침 피부에도 짐승 같은 회복력을 선사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코튼 소재의 마스크가 유액에 흠뻑 젖어 있는 팩들과 달리 맨들맨들 쫀득한 겔 제형인데, 붙이고 자면 전체적으로 얇아지며 얼굴에 흡수되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촉촉해지는 것과 더불어 모공까지 작아 보인건,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1등급 남자 데이트용으로 합당한 팩이었다. 홈쇼핑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개미지옥이다. 그전까지 나는 브랜드 신봉자에 가까웠다. 집에 생수는 떨어질지언정 에스티 로더 ANR은 떨어지는 법이 없었고, 기초는 시슬리와 라프레리, 색조는 샤넬이 비싼 만큼 값을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홈쇼핑 화장품은 새로운 매트릭스였다. 가격과 품질의 물리 법칙에 대한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브랜드 네임 대신 7차례 방송 연속 매진이, 광고 캠페인 대신 품절임박 사인이, 스타 모델 대신 게시판의 사용후기가 이 세계를 지배했다.

처음 선을 넘기가 힘들지, 다음부터는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었다. 리더스 인솔루션 링클 오프는 하유미 언니 목소리 대신 유명 피부과의 이름이 신뢰감을 줬다. 피스톤을 누르게 되어 있는 주사기 모양의 앰풀 패키지 디자인이 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눈가에 찔끔 짜서 펴 바르며 기대하는 마음이 안들었다고는 못하겠다. 한창 유행하던 달팽이 크림은 성형외과 의사인 친구가 병원에서 재생용으로 쓰던 제품이라는 말에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질렀다. 아끼지 않고 양껏 바를 수 있어 좋았다. 왕실에서 사용한다는 스웨덴 에그팩은 평소에는 비누로 사용하고, 가끔 촘촘한 망으로 거품을 내서 팩으로 썼다. 6개들이 3상자가 한 세트, 써도 써도 줄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환갑 때까지 다른 클렌징 폼은 못 쓸 기세라 주변에 나눠주면서, 깨닫게 됐다. 내가 화장품을 좋아하는 데는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고 써보는 바로 그 구매와 실험의 과정이 포함된 거라고. 그러니 짐승 같은 용량은 홈쇼핑 화장품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홈쇼핑 기초 제품들이 입소문이나 샘플 사용 후에 반했다면, 색조 제품을 구매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건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의 이름이다. 손대식&박태윤 콤비의 셉(SEP)은 쇼적으로 재밌어서 방송을 사수한 경우였다. 반짝반짝 그루밍된 외모에서 튀어나오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독설의 아이러니한 매력이랄까. 마스카라 뭉친 속눈썹을 ‘파리 다리’라 부르는 식의 리터칭 안 된 직설화법으로 여자들의 화장에 대해 놓는 따끔한 일침이 중독적이었다. 실제로 사용해본 셉의 제품들은 특히 피부 표현이 탁월했는데, 아가디르 토털 파운데이션은 촉촉하게 물을 머금은 피부 표현과 탁월한 보습력 때문에 수년을 함께했던 텁텁한 비비크림에서 갈아탄 제품이다. 솔직히 메이크업 베이스부터 아이라이너, 볼터치까지 세트로 구성된 홈쇼핑 색조 제품을 A부터 Z까지 다 써서 풀메이크업 할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C나 T쯤의 단계에서 단품으로 맘에아주 쏙 드는 제품을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돈 번 장사 같았다(전체 라인을 산다고 해봤자 브랜드 제품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을 합친 가격밖에 안 되니까).이경민 크로키의 경우 스윙 스타일러가 그런 물건이었다.

홈쇼핑 화장품은 나에게 숨겨놓고 만나는 연하의 비밀 애인 같은 존재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집착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선 샤넬 마크가 찍힌 콤팩트를 꺼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했으니까. “왜 말을 못해, 이화장품이 내 화장품이라고 왜 말을 못해!” 오늘도 현관 앞에는 택배 상자만 차곡차곡 쌓여간다.

에디터
황선우, 뷰티 에디터 / 김희진
포토그래퍼
KIM KI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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