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 마르지엘라가 들려주는 어제의 유산, 오늘의 전율, 내일의 표정.

낡은 기억의 익명적 환생
저물녘의 상하이, 거대한 성벽처럼 쌓인 컨테이너 박스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감돌면서 쇼가 시작됐다. 반드시 그 시간이어야만 했다. 낮의 이성이 저물고 기묘한 집착이 살아나는 찰나, 차가운 금속 무대 위로 글렌 마틴스가 소환한 사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적막을 깬 것은 음악이 아닌 도자기 드레스가 바닥을 쓸며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었고, 겹겹의 패브릭이 부딪치며 내는 낯선 소리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배경 음악이 되었다. 특히 모델의 마스크 위를 수놓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마주한 순간, 마르지엘라의 세계를 이토록 자유롭게 탐구하는 글렌 마틴스(Glenn Martens)의 창의성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묵직한 유산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신나게 재해석해내는 그의 세계는 경이롭다 못해 질투가 날 정도였다.
지난 4월 26일 공개된 메종 마르지엘라 2026 F/W 컬렉션은 기묘한 오브제들이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를 그려냈다. 이번 쇼는 메종 초기의 제작 방식인 고도의 맞춤복 ‘아티즈널’과 기성복 ‘레디투웨어’를 동시에 선보이며 브랜드의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자리였다. 도자기 인형처럼 움직이는 오브제와 수선이 불가능할 만큼 훼손된 태피스트리, 그리고 20세기 초의 우아함을 재해석한 에드워디안 실루엣은 글렌 마틴스가 새롭게 정의한 브랜드의 정체성을 선명히 투영했다.

컬렉션 전반에는 메종의 핵심 코드가 집요하게 흘렀다. 제2의 피부처럼 밀착되는 세컨드 스킨을 시작으로, 하얀 페인트를 두껍게 칠해 시간의 균열을 만드는 비앙케토(Bianchetto), 이질적 소재를 조합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이 무대를 지배했다. 특히 쇼의 미학적 중추였던 ‘도자기’는 여러 겹의 오간자로 질감을 구현하거나 실제 파편을 신체 곡선에 맞춰 재조합하며 마르지엘라식 복원과 해체 철학을 증명해 보였다.
테일러링 역시 과감했다. 꼬리가 잘린 테일 코트와 트렌치에 결합된 세컨드 스킨, 빈티지 드레스의 흔적만을 남긴 ‘의복의 기억’은 글렌 마틴스식 연금술 그 자체였다. 여기에 비즈왁스로 형태를 고정한 드레스와 가구용 원단을 절개해 만든 극한의 드레이핑은 시각적 경이로움을 더했다.


한편 액세서리 군에서도 수집품의 향연은 계속됐다. 발등을 드러낸 ‘레벨 컷아웃 부츠’와 아웃솔 위에 본체가 떠 있는 듯한 ‘플로트 슈즈’ 등 혁신적인 풋웨어가 런웨이를 채웠고, 내부 골격을 노출한 신제품 ‘링크 백’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기에 사용자의 흔적을 담아가는 ‘5AC’와 베개와 소파의 안락함을 패션의 영역으로 소환한 ‘글램 슬램’은 사물의 본질을 뒤틀어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브랜드의 오랜 철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번 쇼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첫 중국 쇼인 동시에, 총 12일간 4개 도시를 순회하며 브랜드의 암호를 조명하는 <메종 마르지엘라/폴더(folders)> 프로젝트의 시작점이었다. 상하이의 아티즈널을 시작으로 청두의 타비, 그리고 선전의 비앙케토까지. 각 도시를 돌며 브랜드의 아카이브 폴더를 하나씩 열어가는 이 여정은 마르지엘라의 정체성, 그리고 글렌 마틴스의 미학을 아시아에 각인하는 밀도 높은 기록이 될 것이다.
1. 창의적 실험실

상하이 쇼 다음 날인 4월 2일부터 6일까지, 얀당 로드(Yandang Road)에서는 메종의 창의적 근간을 해부하는 <아티즈널: 크리에이티브 래버러토리(Artisanal: Creative Laboratory)> 전시가 펼쳐졌다. 쇼 장소에서 영감을 받은 오픈 스트리트 형태의 컨테이너 공간은 파리 아틀리에의 실험 정신을 상하이의 거리로 고스란히 이식해놓은 듯했다. 이번 전시는 메종 팀이 엄선한 58벌의 쿠튀르 룩을 통해 마르지엘라의 과거와 현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본다. 1989 F/W시즌의 상징적인 ‘도자기 플레이트 웨이스트 코트’부터, 불과 전날 밤 런웨이에 올린 2026 F/W컬렉션의 ‘밀랍 처리 에드워디안 드레스’까지, 시대를 초월한 큐레이션은 아티즈널 라인이 단순히 화려한 옷의 나열이 아닌, 메종의 모든 창의적 언어가 태동하는 ‘실험실’임을 증명한다. 전시작 내부를 채운 업사이클링, 해체주의, 트롱프뢰유, 그리고 일상의 사물을 변형하는 작업 방식들은 발견된 소재가 어떻게 예술적 복식으로 재구성되는지의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손으로 직접 빚어낸 의상과 액세서리들은 메종 마르지엘라가 추구해온 수공예적 가치와 미학적 탐구가 현재 진행형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메종의 유산이 또 다른 창작자를 만나 동시대적 영감을 주고받는 과정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사건이다. 서적 속에서만 보던 전설적인 피스와 런웨이에서 직관했던 룩들이 교차하는 순간, 잊고 잇던 희열과 전율이 되살아났다. 이는 마르지엘라의 아카이브가 박제된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라는 시간 위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며 생명력을 얻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기록이었다.
2. 하얀 캔버스 위에 쓴 마침표

비앙케토(Bianchetto)는 흰 페인트를 덧입혀 본래의 층위를 지우고 사물의 본질적 형태만을 남기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독보적 기법이다. 시간이 흐르며 칠이 갈라지고 마모되는 과정을 통해 사용자의 습관을 투영하는 이 방식은, 불완전함 속에서 고유한 서사를 발견하는 메종의 ‘진행형 미학’을 상징한다. 지난 4월 11일부터 12일까지 선전 난산구에서 열린 <비앙케토: 아틀리에 익스피리언스>는 이 철학을 온전히 체득하는 몰입형 체험 현장이었다. 화이트 랩 코트인 ‘블루즈 블랑쉬’를 입은 참가자들은 아틀리에 팀의 가이드에 따라 자신의 옷을 비앙케토 피스로 변형해나갔다. 덧칠해진 페인트 위로 네 개의 스티치가 선명하게 새겨지는 순간, 사적인 물건들은 메종의 코드를 입고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상하이에서 선전으로 이어진 4월의 물리적 여정은 이제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 기록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전시의 설계도와 설치 과정이 담긴 공식 드롭박스 폴더는 프로젝트 종료 후에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며 모두에게 열린 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얗게 칠해진 비앙케토의 표면처럼, 그리고 여전히 채워지고 있는 디지털 폴더의 빈칸에는 어떤 흔적이 채워질까? 이 모든 여정은 결국 열린 결말로 남는다.
3. 발자국에 새겨진 시간

상하이의 미학은 청두로 건너가 ‘타비(Tabi)’라는 사적이고 친밀한 암호 해독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 9일~13일, 청두 제3번가 미술관에서 개막한 <타비: 컬렉터스 전시>는 타비를 단순한 신발이 아닌, 개인의 삶과 습관이 투영된 매개체로 조명했다. 자이언티를 포함해 마르타 데 메그니, 멘테, 왕 즈위, 시어스터 게이츠, 제러미 그랜트, 판도라 그레슬, 엘레오노르 기뇨, 모어까지 전 세계에서 모인 9인의 컬렉터는 각자의 손때 묻은 워드로브를 전시장으로 기꺼이 옮겨왔다. 이들이 공유한 타비의 흔적은 소유자의 정체성에 따라 제품이 어떻게 변모하고 길들어가는지를 입체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1989년 오리지널 부츠부터 최근의 아티즈널 피스까지 망라한 전시는 타비가 메종의 실험 정신을 담는 가장 유연한 캔버스임을 재확인시켰다. 박제된 아카이브가 아닌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함께 숨 쉬며 낡아간 타비의 모습은, 메종의 유산이 찰나의 유행을 넘어 하나의 견고한 ‘태도’로 정착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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