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에만 머무르지 않는 아프레 스키 트렌드

신지연

더 이상 설산에만 머무르지 않는 아프레 스키(Après Ski) 트렌드.

슬리브리스 푸퍼 재킷, 트랙 재킷, 트랙 팬츠, 큼직한 고글은 발렌시아가, 흰색 카고 팬츠는 캐나다 구스, 슈즈는 몽클레르 그레노블 제품, 글러브는 에디터 소장품.
슬리브리스 톱, 트랙 재킷은 꾸레쥬, 주황색 푸퍼 재킷은 스톤 아일랜드, 뛰어난 통기성을 지닌 스키 빕 팬츠, 스노 부츠는 몽클레르 그레노블 제품.
울 소재 니트 톱, 스커트, 퍼 숄은 미우미우, 힐은 발렌시아가, 스키 팬츠는 몽클레르 그레노블 제품.
스포티한 저지 톱, 레깅스, 그래디언트 고글은 루이 비통 제품.

최근 몇 시즌 사이 아프레 스키(Après Ski) 패션은 눈 덮인 정상에서 화려한 런웨이 조명 아래로 무대를 옮겼다. 루이 비통은 1980년대풍 터틀넥과 플리츠 스커트 셋업 위에 산맥의 능선을 연상시키는 지그재그 셰브런 패턴을 더했고, 발렌시아가는 오버사이즈 푸퍼 코트를 선보였으며, 아크네 스튜디오는 전통적으로 스웨터에만 쓰던 노르딕 패턴을 스키 리프트처럼 길게 늘어진 스카프에 적용해 슬림한 그레이 팬츠와 매치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오버사이즈 니트 위 진한 브라운과 아이보리 톤의 페어아일 눈꽃 무늬를 더해 한층 드라마틱한 겨울 감성을 완성했고, 몽클레르 그레노블은 캐러멜 색상의 풍성한 시어링 재킷에 볼륨감 넘치는 스커트를 매치하며 고급스러운 설원 룩을 제안했다. 독특한 실루엣으로 주목받는 브랜드, 듀란 랜팅크는 순백의 니트 드레스를 구조적인 곡선 실루엣으로 빚어내 눈더미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입체적인 형태미를 강조했다. 슬로프에서부터 리조트 안, 그리고 런웨이 위까지, 드넓은 영역으로 확장된 스키복 트렌드. 여기까지 읽은 누군가는 스키 슬로프가 처음부터 눈으로 덮인 런웨이나 다름없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새하얀 설산이 패션 무대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 여성 스키복은 산악인들의 옷차림에서 출발했는데, 20세기 초 여성들은 개버딘 코트와 브리치(Breeches), 그 안에 니커보커(Knickerbockers)를 받쳐 입고 매우 풍성한 롱스커트를 걸친 채 산을 내려오곤 했다. 패션복이라기보다는 보호복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키복의 패션화는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린 제1회 동계올림픽에서 시작되었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스키의 매력이 대중화되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파투, 에르메스, 샤넬, 비오네 등 파리의 하이패션 하우스들이 슬로프에서도 우아하면서 실용적인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하이웨이스트 팬츠 슈트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크리스찬 디올의 멘토로 알려진 프랑스 디자이너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은 아르데코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미니멀한 스타일의 칼럼 실루엣 투피스 슈트를 최초로 선보였고, 모자와 장갑, 스카프까지 완벽하게 세트로 매치하는 스타일을 제안했다. 한편, 이탈리아 디자이너이자 열렬한 스키어였던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는 1928년 ‘Pour le Sport’ 컬렉션을 통해 알파인웨어에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불어넣은 독보적인 룩을 선보였다. 달러 기호를 연상시키는 클립 장식의 울 재킷, 뾰족한 후드가 달린 타이트한 니트 스웨터, 중절모를 떠올리게하는 티롤리안 모자와 거북무늬 고글은 생모리츠의 패션 엘리트들 사이에서 단숨에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여담으로 스키아파렐리의 딸 고고(Gogo)는 다운힐 스키 챔피언이기도 했다.

맥시 푸퍼 재킷은 발렌시아가 제품.
맥시 푸퍼 재킷은 발렌시아가 제품.
연두색 니트, 코듀로이 팬츠, 스니커즈는 디올 맨, 스키 팬츠는 몽클레르 x 에이셉 라키, 화려한 패턴 머플러는 꼼데가르송 셔츠, 파란색 울 스카프는 아크네 스튜디오 제품.
퍼 시어링 재킷은 펜디, 레깅스는 돌체엔가바나, 힐은 톰 포드 제품.
캐시미어 케이프, 셔츠, 슈트 재킷, 타이, 슈트 팬츠, 로퍼는 로로피아나 제품.

1948년에는 독일의 명품 스키웨어 브랜드 보그너(Bogner)가 최초로 나일론과 울을 혼용해 만든 스트레치 소재를 사용한 스키 팬츠를 선보이며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마릴린 먼로, 제인 맨스필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유명 인사들도 모두 발 아래 스트랩으로 고정되는 슬림한 스키 팬츠를 착용했다. 이 패션은 곧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고,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다운힐 레이서 (Downhill Racer)> 같은 영화들은 유럽 상류층 스키 휴양 문화를 반영한 중세기 샬레 스타일의 화려함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특히 1963년 개봉한 <셔레이드(Charade)>의 오프닝 장면에서 오드리 헵번은 프랑스의 메제브 마을 테라스에서 우아하게 야외 식사를 즐기며,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가 디자인한 초콜릿 브라운 컬러의 니트 점프슈트와 발라클라바, 피에르 말리의 대형 거북무늬 선글라스를 착용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퍼 시어링 모자는 제이디드 런던, 크롭트 재킷, 팬츠, 플랫폼 부츠는 릭 오웬스 제품.
오버사이즈 스카프는 몽클레르 지니어스, 푸퍼 발라클라바는 몽클레르 X ee72 by 에드워드 에닌풀 제품.
슬리브리스 푸퍼 재킷, 트랙 재킷, 큼직한 고글은 발렌시아가 제품.

1960년대에 들어서자 찾아온 우주 시대. 달 탐사 성공을 계기로 우주 개발 시대에 접어들며 패션계 또한 우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에 설원은 더욱 대담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물들었다. 광택이 매력적인 실버 루렉스 소재와 비닐 소재가 스키 룩을 정복했고, 피에르 가르뎅과 앙드레 쿠레주, 크리스챤 디올은 배우 소피아 로렌이나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같은 아이콘을 위해 유쾌하고 미래적인 스키웨어를 디자인했다. 이 시기 패션 하우스들은 슬로프에서 자주 포착되던 셀럽들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프랑스 리조트를 퍼 코트와 부츠 차림으로 거니는 제인 버킨(Jane Birkin), 올 화이트 룩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시어링 코트를 걸치고 스키 리조트 메리벨에서 시간을 보낸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 같은 인물들이 그 예다. 이 시기 ‘미드센추리 스키 트렌드’를 가장 생생하게 포착한 미국 사진가 슬림 애런스(Slim Aarons)의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사교계 인사와 재벌, 유명 인사들의 일상을 포착해 작품을 만드는 그에게 당시 상류층의 휴양지였던 설원은 더할 나위 없는 촬영 장소였다. 그의 사진 속에는 모피를 두른 유럽의 백작부인이 생모리츠에서 썰매를 타는 장면, 점프슈트를 입은 스키어들이 스위스 그슈타트의 회원제 ‘이글 클럽(Eagle Club)’에서 식사하는 모습, 심지어 스키를 탄 웨이터가 쟁반 위에 새 한 마리를 올려 나르는 장면까지 담겨 있다.

설산의 리조트는 여전히 최신 유행을 주시하고, 또 이를 선보이는 무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진화하며 그 영역이 한층 넓어졌다는 사실. 포근한 인타르시아 니트, 벨트 장식의 패딩 재킷, 과장된 실루엣의 퍼 코트, 고글을 연상시키는 선글라스 같은 스키 아이템들은 더 이상 아늑한 산장에서 따뜻한 음료를 즐길 때만 입는 옷이 아니다. 추운 겨울, 움츠러든 일상에 생동감과 화려함을 불어넣는, 그야말로 필수 키 아이템이 된 것이다.

포토그래퍼
최나랑
Lindsay Talbo
모델
천쯔, 위승민
헤어
홍현승
메이크업
임정인
어시스턴트
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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