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다는 것
역사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작품에 경의를 표하며 탄생한 몽블랑의 특별한 만년필과 소설가 김영하, 배우 문가영,
밴드 실리카겔, 화가 이목하의 만남. 각자의 여정을 충실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 그들이 만년필 한 점을 매개로 다양한 영감을 공유해주었다.
‘만년필’은 단 세 글자로 여러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그저 펜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필기도구라는 점을 아는 것 외에 다른 인지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데, 만년필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격, 낭만, 클래식, 작은 공예품과 같은 디자인, 잉크만 채워주면 언제까지나 자기 소임을 다하는 영속성. 여기에, 역사 속 탁월한 예술가들과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의 만년필이라고 하면 또 어떨까? 예술가의 혼이 내 글자에 마법을 부려줄 것만 같다. 올해 몽블랑(Montblanc)은 장인 정신과 예술적 상상력을 결합한 만년필을 여러 점 선보였다. ‘마이스터스튁 80일간의 세계일주’, ‘마스터 오브 아트 오마주 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작가 에디션 오마주 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레이트 캐릭터 오마주 투 퀸’ 등. 각각 그 제품명이 지닌 무게감만큼 만년필 하나에 품을 수 있는 디테일을 최대치로 담아냈다. <더블유>와 몽블랑은 각 분야 예술가들과 함께 이 특별한 만년필을 기념하고 영감을 나누는 캠페인, ‘저니 오브 라이팅(Journey of Writing)’을 전개했다. 지난봄부터 늦가을까지, 계절이 흐르는 동안 시간차를 두고 천천히 지속된 일이다. 이 여정을 함께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어릴 적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며 여행자의 꿈을 키운 소설가 김영하, 연기라는 예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읽는 사람이자 쓰는 사람이기도 한 배우 문가영, 지금 한국에서 밴드 음악의 계보를 가장 뜨겁게 이어가는 중인 실리카겔, 캔버스에 고유한 초상 세계를 펼치고 있는 화가 이목하. <더블유>와 몽블랑은 새로운 만년필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각 인물의 인터뷰 영상과 화보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우리 만남의 계기가 된 건 만년필이지만, 관심사와 작업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깃거리가 흘러나왔다. 각자의 여정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들은 만년필 한 점을 매개 삼아 여정의 순간을 공유해주었다. 거기 책갈피를 꽂아두는 마음으로, 지면에 그 기록을 남긴다.
소설가 김영하 X 마이스터스튁 80일간의 세계일주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베스트셀러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는 고백한다. 김영하가 어릴 적부터 품은 꿈은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험지’를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어린이치고 원대한 꿈이다. “아마 그런 꿈을 꾸게 해준 게 쥘 베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모험 소설이라는 장르를 메이저로 끌어올린 작가죠.”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수수께끼 같은 저 바깥세상을 향해 호기심을 피웠을 어린 김영하. 그는 약 30년 간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매해 어딘가로 떠났다. 이야기꾼인 그의 입에서 캄보디아 내전이 채 끝나지 않은 시절에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경험이 흘러나올 때는 장편영화 하나가 재생되는 듯했다.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80일 안에 세계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는 내기를 걸고 지구 횡단 모험을 떠난다. 그 여정 중 온갖 사건 사고를 겪는다.’ 단 두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러한 긴 모험 소설은, 김영하를 소설가이자 여행자로 만든 최초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올해 4월 출시된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튁 80일간의 세계일주’ 컬렉션에는 소설 속 여행기에 얽힌 각종 요소가 녹아 있다. 만년필 펜촉 부위인 닙을 들여다보면 폭이 1cm도 되지 않는 그 공간에 열기구와 숫자(포그가 요코하마를 떠나 런던에 닿은 날짜)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펜의 몸통인 배럴과 캡을 채운 패턴은 기차의 연기 구름을 연상시킨다. 만년필을 주머니에 꽂을 수 있게 해주는 클립에는 소설 속 포그와 아우다의 사랑, 또 포그의 내기를 상징하는 빨강 래커 하트가 포인트로 자리잡았다. 김영하만큼 이 컬렉션과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그는 상당한 만년필 애호가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에 관심을 두면 깊고 넓게 파고드는 ‘박학’과 소년 같은 호기심이 낳은 ‘다식’은 우리가 김영하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의 책상엔 수많은 만년필이 있다고 한다. “일반 펜에는 잉크를 채울 일이 없죠. 만년필은 잉크를 처음 채워 넣는 순간부터 특별해요. 잉크라는 것이 여기 존재하고, 그걸 넣고,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점점 옅어지고, 다시 잉크를 더 채우고…. 그 과정이 저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줘요. 저는 만년필의 배럴 색에 맞춰 잉크를 채워두는 편이에요. 녹색 배럴 펜이면 녹색 잉크를 넣는 식이죠.”
<더블유>의 요청으로 김영하는 촬영장에 평소 쓰는 노트를 비롯해 여러 물건을 가지고 왔다. 소설가가 기꺼이 열어준 은밀한 구상 노트에는 아이디어 메모뿐 아니라 펜으로 그린 그림도 있었다. “저는 낙서를 많이 하는데, 버릇 중 하나가 커피잔을 그리는 거예요. 늘 책상 위에 커피잔이 있어서 그런지. 뭐가 잘 안 풀릴 때도 커피잔을 그리면서 시작해요.” 김영하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로 디자인한 머그잔 정도는 ‘굿즈 생활자’인 김영하에게 기본 아이템일 것이다. 그는 2003년 멕시코 여행을 하면서 폭스바겐 비틀 택시를 자주 봤는데, 비틀 일러스트를 입은 머그는 책 사은품으로 인기 있었다. “여행 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리곤 해요. 꽤 시간 들여 그릴 때도 있고요. 저만의 뒤풀이 같은 거랄까요.” 여행길에서 풍경 좋은 곳에 앉아 예쁜 노트에 무언가 쓰고 있는 소설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물론 영감은 여행지에서 바로 불현듯 나타나지 않는다. 낯선 곳을 헤매는 시간과 그곳에서 끄적거리는 순간이 쌓이면, 여행 후 어느 날 찾아오는 게 영감이다.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온 소설가는 이제 작업하기 좋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고 책상 앞에 앉을 것이다. 그럴 때 김영하가 가장 많이 입는 옷은 동네 빈티지 가게에서 구입한, 길이가 길어 안정감을 준다는 스트라이프 튜닉이다. 이번 캠페인 영상을 촬영하면서 에디터는 촬영팀이 준비해둔 근사한 옷 대신 김영하가 집에서 가져온 그 튜닉을 입어달라고 했다.
김영하는 여전히 손으로 꾹꾹 눌러 쓰거나 흘려 쓰는 그 감각을 선호하는 쪽이다. “키보드로 타이핑할 때는 어떤 키를 누르든 감각이 균일하게 들어와요. ‘ㄱ’을 치든 ‘ㅏ’를 치든 키감이 다를 게 없죠. 그런데 종이에 쓸 때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느낌이 있어요. 글자의 위치도 있고, 쓸 때마다 글씨체도 다르고, 매번 다른 경험이 되죠. 그렇게 전해지는 느낌들을 아주 좋아해요.” 무엇이든 직접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손으로 감각하고 생산해내길 좋아하는 그는 아침마다 캡슐커피 대신 핸드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커피 한 잔을 완성한다.
이 향긋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하루가 있다면, 지난 4월의 김영하는 6년 만의 산문 신작인 <단 한 번의 삶>(복복서가)을 낸 직후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때로 어떤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아, 이건 이 작가가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로구나. 내겐 이 책이 그런 것 같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신작을 내기까지, 김영하는 지금껏 흘러온 자신의 여정을 한마디로 쓰자면 ‘좌충우돌’이라고 한다. 대신 이제는 두 가지 축이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어쩌면 그 축은 10대 시절부터 그의 가장 원초적 충동이었다. “저는 작가가 될 줄 모르고 작가가 된 사람입니다. 어떤 작가가 될지 모르는 채로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라디오 진행도 해보고, 영화 일을 해보기도 하고. 이런 것도 써보고, 저런 것도 써보고. 한때는 ‘여행가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했죠. 그 여러 가지 가능성이 모두 소거된 가운데 결국 하는 일이 글쓰기예요. ‘나는 작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좌충우돌한 일생이었구나’ 싶어요. 이제 제 주변에 남은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글 쓰는 것과 여행하는 것.”
헤어 · 메이크업 | 장해인 · 어시스턴트 | 김수림
배우 문가영 X 작가 에디션 오마주 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돌이켜보면 문가영은 자꾸 놀라게 만드는 사람이다. 문가영이 독어로 유려하게 말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신선해서 놀랐고,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점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어디까지 읽는가’ 궁금해하며 놀랐다. 작년 3월 문가영의 첫 산문집 <파타(PATA)>(위즈덤하우스)가 나왔을 때는 ‘마침내!’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신강림> 속 문가영과 <사랑의 이해>나 <서초동> 속 문가영의 격차가 새삼 놀라웠다면, 문가영이 돌체앤가바나의 앰배서더가 되어 검정 레이스 너머로 몸을 드러냈을 때는 그 무심한 관능에 어찌할 도리 없이 놀란 기억이 있다. 당분간 더 놀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올여름 문가영이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저는 평소에 쓸 때, 만년필로만 써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 정도로 만년필을 좋아해요. 오늘 촬영장에 가져온 노트들도 다 만년필용 노트예요. 일반 종이에 쓸 때와 잉크가 번지는 것도, 색의 뚜렷함도 다르거든요. 펜촉의 굵기도 제각각이니 만년필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별나게 굴 수밖에요.”
드라마 <서초동>을 마친 후 다독가는 갈증 채우듯 여러 책을 해치웠다고 한다. 이번 대상은 주로 서머싯 몸이었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케이크와 맥주>, <인생의 베일>… 쭉 읽었네요. 독서 방식이 좀 바뀌었어요. 전에는 그냥 좋은 것을 찾아가거나 책 속에 인용된 또 다른 책을 읽어보는 식이었는데, 이제는 저희 언니가 언젠가 지나가듯 한 말대로 해보고 있죠. 마음에 드는 한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거요. 언니가 저보다 책을 더 많이 읽어요.”
문가영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재밌는 인연이 있다. 2023년 드라마 <이로운 사기>에 특별 출연하면서 <파우스트>의 마지막 문장을 팔에 타투로 분장했다.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 감독님이 저에게 많은 부분을 열어주셨어요. 하고 싶은 걸다 해보라고 하셨죠. 타투가 굳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 인물에 어울리는 타투를 하고 싶었어요. 감독님, 작가님과 상의해서 고른 문장이 그거예요.” <파우스트>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었다. 문가영은 책을 사두고서 긴 시간에 걸쳐 띄엄띄엄 읽었다고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는데, 괴테가 20대 초반에 그 작품을 쓴 거로 알아요. 청춘답게 질주하는 듯한 느낌과 문체가 기억나요.”

괴테는 문학가이자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업적을 남긴 지성인이었다. 7월 출시된 몽블랑의 ‘작가 에디션 오마주 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리미티드 에디션은 과학과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괴테의 면모를 힌트처럼 몸 곳곳에 심어두었다. 캡 디자인은 실험용 유리병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고, 클립은 잎사귀 모양이다. 닙에 각인된 ‘Faust’는 1790년 <파우스트> 오리지널 판본에 쓰인 서체를 따랐다. 캡과 배럴은 블루 그레이 색조에 대리석 질감인데, 괴테의 바이마르 자택에 있는 벽지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서초동>의 변호사 강희지처럼 그 펜을 쥐고 있던 문가영은 만년필 혹은 잉크의 세계 이야기만 해도 한참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제가 만년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쓰던 만년필을 누군가에게 줄 때 그 의미가 아주 크고 남다르다고 느껴서예요. 저도 <사랑의 이해> 작가님이 쓰던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어요. 만년필을 꾸준히 모으면, 언젠가 소중한 이에게 건네줄 수도 있겠죠. 대대로 물려줄 수도 있고요. 참 낭만적이죠.”
그러니까 문가영은 배우이면서, 읽는 사람이자 쓰는 사람이다. 문가영이 잠시 내어준 그녀의 독서 노트에서는 귀여운 글씨의 기록이 여러 갈래로 뻗어가고 있었다. “재미난 점이 있어요. 20대 초반에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저희 아빠가 어릴 적부터 쓰신 독서 노트가 정말 많대요. 아직도 그것들을 가지고 계시죠. 그런데 저희 언니도 독서 노트를 쓴다는 거예요. 그때까진 그 점을 서로 몰랐어요. 누가 독서 노트를 쓰라고 저에게 알려준 것도 아니거든요. 그제야 세 사람이 썼던 독서 노트를 나란히 두고 보니, 우리 스타일이 비슷하더라고요(웃음).”
문가영과 독서가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점이 알려진 이후, 그녀는 종종 딜레마에 처했을 것이다. 문가영이 ‘올여름 서머싯 몸을 집중적으로 읽었다’고 말하면, 이는 어느 순간 ‘문가영, 서머싯 몸 추천’으로 둔갑할 수 있다. 책 읽는 행위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인 셀럽에게서 그 생활의 일부가 노출되었을 때, ‘일부’는 그 사람의 사상이나 취향을 판단하기 위한 증거로 확대될지도 모른다. 지켜보고 관심 갖는 사람이 많은 삶을 사는 가운데, ‘쓰기’는 좀 더 은밀하고 사적인 행위다. <파타>는 산문집이라지만 소설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형식의 책이었다. 책을 낼 때 문가영은 오래전부터 써둔 글 중 일부를 발췌 및 수정해 완성했다.
평소 무엇을 쓰는지, 왜 쓰는지 묻자, 어쩐지 그녀의 산문집과 닮은 대답이 돌아왔다. “진실을 쓰고, 거짓을 써요. 제 이야기이면서 아니기도 한 이야기를 쓰고요. 조금은 모순적이면서 양가적 감정을 지닌 문가영으로서 쓰는 것 같은데요? 저는 제 모습이 아닌 배역으로 드러내는 게 직업이다 보니 저라는 사람에 대해 표현하는 법을 잘 몰랐어요. 워낙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표현을 안 하는 점도 있었고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게 글쓰기 말고는 없더라고요. 제가 글을 안 썼으면 굉장히 괴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말이에요. 저는 살려고 써요, 정말로.”
헤어 | 백흥권 · 메이크업 | 이윤영 · 스타일리스트 | 강윤주 · 어시스턴트 | 나혜선
밴드 실리카겔 X 그레이트 캐릭터 오마주 투 퀸

실리카겔은 최근 몇 년간 뜨거운 기세로 일종의 ‘현상’을 일으킨 밴드다. 그들의 여정은 2015년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을 시작으로 지속되고 있었고, 실리카겔은 어느덧 신에 바람을 일으킨 강력한 현재라거나 한국 록의 미래로 호명되곤 했다. 여전한 뜨거움 속에서, 실리카겔은 잠시 록 밴드 계보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보면 전설적인 이름을 여럿 만난다. 11월 출시된 몽블랑의 ‘그레이트 캐릭터 오마주 투 퀸’ 스페셜 에디션은 밴드 퀸을 기념한다. 1970년대 초 데뷔 후 하드 록, 글램 록, 팝, 오페라 등을 결합해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밴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이름이 만년필에 깃든다면, 그 펜으로 써 내려갈 때마다 글자에서 멜로디가 자랄까?
“영국 록에 호기심을 갖게 만든 몇몇 밴드가 있어요. 저에겐 퀸이 그중 하나였죠. ‘이렇게도 할 수 있다고?’ 싶었으니까요. 클래식 록의 계보를 쭉 따라 듣다 보면, 퀸은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밴드라는 점을 알 수 있어요. 후대의 밴드들에게 굉장히 큰 영감을 주는 중요한 뮤지션이죠. 브라이언 메이라는 기타리스트 역시 너무나 전설적인 존재예요. 일렉트릭 기타의 성배 같은 대표적 앰프 브랜드 중 ‘복스’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자기 캐릭터화했어요. 저도 정말 좋아하는 텍스처를 가진 앰프예요. ‘레드 스페셜’이라는 핸드메이드 기타는 오직 그분만 사용하는 기타고요. 그 유명한 기타 역시 캐릭터로 자리 잡으면서, 스토리의 하나가 됐어요. 그런 점에서 브라이언 메이는 단지 아티스트로서의 업적 외에도 또 다른 업적이 있는 거죠(김춘추).”
“밴드들을 보면 드러머가 음악 내에서 지휘자 역할을 짊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퀸 음악을 들으면 로저 테일러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면서 노래도 잘 부르고, 곡도 써요. 외모도 날렵하고 멋졌죠. 퀸이 데뷔한 시절이 격변기였다고 생각하거든요. 악기도 많이 개발되고, 드럼 세트에 마이크 기능을 이용하는 일도 가능해지고, 좀 다른 음악을 하던 이들이 밴드 쪽으로 넘어오기도 하면서요. 그런 변화들 가운데서 로저 테일러는 드러머가 할 수 있는 것을 많이 해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김건재).”
“아주 간단하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퀸 음악에는 오페라틱하고 장대한 음악과 ‘Another One Bites The Dust’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리프로 찌르는 음악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냥 제 생각으로는 그래요. 저는 리프로 끌고 가는 쪽을 더 좋아합니다. 존 디콘의 베이스 소리가 워낙 잘 들려서 좋은 걸 수도 있지만, 그 단순함에서 오는 매력이 분명 있어요. 물론 퀸은 그 두 가지 스타일을 다 잘해낸 밴드죠. 실험적인 것도 잘하고, 고전적인 록 팬들도 놓치지 않았고요(최웅희).”
“보컬리스트로서 프레디 머큐리는 워낙 명불허전이라 제가 딱히 언급할 여지는 없을 거예요. 저는 그가 ‘아이콘’이 된 점을 그의 큰 성취 중 하나라고 봐요. 비주얼적으로도 수염과 민소매 티, 마이크 스탠드를 뽑아 들고 다니며 무대를 활보하는 모습 같은 특징이 있었죠. 피아노 위에는 마시다 만 위스키 잔이 즐비했고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장면이 낭만적으로 보였어요. 그는 멤버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존재였던 것 같아요. 그 점이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내가 가진 재능으로 멤버들을 자극하고, 저 역시 멤버들에게서 그런 자극을 받고 싶거든요. 밴드들에게 프레디 머큐리는 좋은 선례를 남겨준 사람이에요(김한주).”

펜을 쥐고 손으로 쓰는 일에 대하여, 김건재는 학부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음악 공부를 할 때 무수히 ‘사보’를 했던 이야기다. “제 경우 연필로 악보 그리는 걸 안 좋아했어요. 손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리다 보면 연필 자국이 종이에 번지는데, 그게 싫었거든요. 잉크펜으로 열심히 악보를 그렸어요. 요즘엔 악보를 아이패드로 보는 사람이 많아요. PDF로 내려받아 보는 거죠. 그렇게 변환할 수 있는 사보 프로그램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건 실제로 종이에 악보를 그리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손으로 적어 공유하는 게 더 빠르고 직관적인 방식이에요.”
뮤지션에게 ‘음악적 쓰기’의 하나로 악보 작업이 있다면, 가사 작업은 소리와 떼놓을 수 없이 함께 가는 행위다. 시나 산문과 달리 멜로디를 입고 화성의 품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 노랫말들. 그러니까, 세상에는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No Pain’ 중)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워허 워허 후 워허 워우워어’(‘Babyface’ 중)라는 가사도 있다. 멤버 중 김한주는 기고를 하거나 혼자 글을 쓰곤 한다. “수시로 수첩에 메모를 해두는 편이에요. 그리고 가사를 쓸 때든 그러지 않을 때든 제가 예전에 써둔 단어나 문장, 여러 가지 표현을 자주 찾아봐요. 그런 것들이 아주 큰 영감을 줘요. 글뿐 아니라 오선지에 적어둔 음표들에서도 도움을 받을 때가 있죠. 그럴 때면 기록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요.”
퀸을 주제로 태어난 만년필의 딥 블루와 골드 색 조합은 1991년 발매된 퀸의 베스트셀러, 앨범 커버를 떠오르게 한다. 퀸의 팬이라면 닙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이 그 앨범 커버에도 등장한 퀸 로고라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마이크, 베이스, 드럼 키트와 기타를 표현한 패턴은 캡과 배럴에 걸쳐 리드미컬하게 표현되었다. 펜 하나에 담긴 퀸과 밴드 음악에 관한 디테일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헤어 | 구예영 · 메이크업 | 김윤정 · 스타일리스트 | 신민철 · 어시스턴트 | 나혜선, 김수림
화가 이목하 X 마스터 오브 아트 오마주 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인물을 그리는 젊은 화가, 이목하. 이목하의 작업실에 있는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그림인지 사진인지 헷갈리는 여러 이미지가 얼기설기 띄워져 있었다. 이목하가 그린 그림을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축소해 놓는다면 빛바랜 인물 사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목하의 대형 작업을 봐도, 보통 유화 물감을 사용할 때 생기는 물감 덩어리나 두툼한 마티에르, 붓질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수채화를 그리듯이 아주 투명하고 묽게 유화를 활용해요. 언젠가 여러 투명한 색상을 겹겹이 중첩하다 보니, 밑에 깔려 있는 색들이 투과되면서 특별한 색감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발견했어요. 그 현상을 계속 강화시키면서 지금의 그리기 방식을 완성했어요.” 디지털 인쇄기의 출력 방식과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는 회화 작업. 이목하는 ‘웹상에서 우연히 만나는 셀피를 수집해 사람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결국 저와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살면서 겪은 강렬한 감정이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의 큰 범주를 정해놓고서, 그에 어울릴 만한 사진을 수집해요. 그림으로 옮기고 싶은 적합한 이미지를 찾으면, 그 사진의 주인과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허락을 받은 후 작업에 들어가요.” 단지 사람을 최대한 ‘진짜’처럼 정교하게 그려낸 초상화였다면 시선을 특별히 붙들진 못했을 것 같다. 사진 속 동시대 여자들의 모습은 이목하의 해석과 작업 방식을 거치며 보다 다층적인 뉘앙스를 띤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이목하는 르누아르의 그림들에서 재밌는 발견을 했다.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는 화려하게 우아한 그림들을 남겼다. 광채에 가까운 빛을 묘사하는 그의 방식이 파격적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림 안에서 빛이 하는 역할이라고 하면,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점 같거든요. 저는 빛의 대비가 강해졌을 때 생기는 그림자나 어둠을 가지고 사람의 복잡한 내면을 이야기하려는 편이에요. 르누아르는 빛의 가장 밝은 면을 보여주면서, 색채들을 가지고 긍정적인 감정을 묘사한 화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킨 풍경 안에서 행복한 감정이 피어나는 식의 장면 묘사가 기억나요.”

4월 출시된 몽블랑의 ‘마스터 오브 아트 오마주 투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독특하고 재밌는 디자인의 만년필이다. 전반적인 모양은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이 사용했다는 전통적인 연필 스타일을 닮았다. 그 시대의 두꺼운 연필을 구현하기 위해 캡과 배럴을 올리브나무로 제작했다. 르누아르가 그의 정원에 있는 올리브나무를 사랑했다고 한다. 제법 두툼하고 묵직하다. 거기에 여기저기 물감 얼룩이 묻은 것처럼 짙은 녹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의 터치가 들어가 있다. 인상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붓 터치와도 비슷한 느낌인데, 그 터치와 나무가 만나니 자연스레 화가들의 팔레트가 떠오른다. “작업을 하다 보면 연필이나 붓에 물감이 많이 묻거든요. 팔레트 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요. 연필은 저한테도 익숙한 도구인데, 르누아르와 그 시대 화가들이 작업실에서 연필을 굴려가며 사용했을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네요.”
화가에게 손은 그림을 밀고 나아가는 추진력이다. 이목하는 SNS에서 얻은 사진을 보며 캔버스 위에 붓으로 여러 겹 차곡차곡 쌓아간다. 단색의 그림 하나를 완성한 후, 다시 또 다른 색상의 그림을 쌓길 반복한다. 그 중첩이 깊이와 묘한 색감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제 그림을 모두 늘어놓고서 어떤 색깔이 가장 도드라지는지 파악해본다면, 아마 파란색일 거예요. 제일 처음 붓을 잡고 쓰는 색깔은 늘 보라색이고요. 그림자의 검은색 너머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몽환적인 색이죠.” 이목하가 파란색을 언급할 때, 르누아르에 관해 알려진 이 인용구가 떠올랐다. ‘어느 날 아침, 우리 중 누군가가 검은색이 부족해 파란색을 사용했고, 그 순간 인상주의가 탄생했다.
전 시대의 회화 관습을 벗어나, 빛과 색과 순간적 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표현한 인상주의 화가들. 이목하는 그렇게 처음으로 자기 표현을 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그 시도가 시대를 거치며 점점 더 강한 자기 표현을 추구하는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을 새삼 곱씹었다. “르누아르는 모네를 비롯한 여러 동료 화가들과 스튜디오를 함께 사용한 거로 알아요. 굉장히 개성 강한 작가들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그림체나 작업에 있어서는 서로 섞이지 않고 자기만의 표현 방식을 고수했죠. 각자 자아가 뚜렷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미술 학교 다닐 때를 떠올려봤어요. 친구들과 한 공간에서 작업하다 보면 화풍이 섞일 수 있거든요. 한 시기를 같이 보낸 이들의 그림에서 비슷비슷한 것들이 보이는 거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과 절대 섞이지 않는 개성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어요. 이미 자기 표현 방법을 구축해놨던 거예요. 그랬던 친구들이 결국 지금도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저 역시 이목하만의 표현 방식을 찾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이에요.” 한국의 젊은 회화 작가가 다수 등장하는 가운데 이목하는 분명히 떠오르는 이름이다. 화가로서 자기만의 언어로 쓰는 이목하의 본격적인 여정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헤어 | 장해인 · 메이크업 | 임정인 · 어시스턴트 | 나혜선
- SPONSORED BY MONTBLANC
- 포토그래퍼
- 장정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