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키 매디슨, 정호연이 숀 베이커와 만든 도넛 강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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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베이커(Sean Baker)와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이 <더블유>의 ‘디렉터스 이슈’를 위해 다시 뭉쳤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달콤함을 쟁취하고자, 귀여운 강도단으로 변신한 이들이 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아노라>의 주인공 마이키 매디슨,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정호연이 설탕 냄새로 가득한 한 도넛 가게를 점령하며 나섰다. 이들의 웃기고, 동시에 진지한 모습은 <아노라>로 최고의 한때를 보낸 영화감독 숀 베이커가 담아냈다. 과연, 이 사랑스러운 강도단의 반란은 성공할 수 있을까?

코너 셰리가 입은 럭비 셔츠는 Linder Sport, 팬츠는 Levi’s 제품. 정호연이 입은 드레스는 JW Anderson, 슈즈는 N21 by Alessandro Dell’ Acqua 제품. 마이키 매디슨이 입은 드레스는 JW Anderson, 슈즈는 The Row 제품. 랜들 박이 입은 셔츠는 Comme des Garçons Shirt, 빈티지 티셔츠는 Levi’s, 팬츠는 Linder Sport, 에이프런은 Alias Costume Rental 제품.

영화 <아노라>로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감독 숀 베이커(Sean Baker)와 배우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이 <더블유>의 특별한 화보 프로젝트 ‘디렉터스 이슈’를 위해 다시 뭉쳤다. 특별한 장면을 담기 위한 배경으로 그들이 선택한 곳은 캘리포니아 버뱅크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복고풍 도넛 가게 ‘도넛 헛(Donut Hut)’. 가게 앞 인도에는 낡은 가죽 시트와 룸미러에 매달린 주사위 장식이 인상적인 1970년대산 포드 핀토가 삐딱하게 주차되어 있다. 순진한 도넛 가게의 주인으로 변신한 배우 랜들 박(Randall Park)은 빨간 피크닉 테이블을 닦으며 역할에 몰입 중이다. 그리고 마이키 매디슨이 작렬하는 햇볕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며 도주 차량의 조수석 문을 쾅 닫았다. “좋아요, 마이키. 당신은 지금 임무를 수행 중이에요. 이 도넛 가게를 접수하는 거예요! 가능한 한 많은 도넛을 먹어버리는 거죠!” 숀 베이커가 그녀에게 말했다.

모니터를 통해 매디슨의 연기를 지켜보던 베이커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베이커 옆에는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인 사만다 콴(Samantha Quan)이 치와와 믹스견 ‘번슨(Bunsen)’을 안고 서 있다. 베이커는 이번 화보의 콘셉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매일 이 가게를 습격하는 엉뚱한 도넛 강도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불쌍한 가게 주인은 어디선가 나타난 이 화려한 강도들에게 맞서야 하고요.” 베이커는 매디슨의 캐릭터에 장식용 사탕 가루를 뜻하는 스프링클을 활용해 ‘스프링클리나(Sprinklelina)’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공범으로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정호연과 2024년 독립영화 <스낵 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신예 배우 코너 셰리(Conor Sherry)를 캐스팅했다. 베이커는 이번 화보를 준비하며 단 한 가지 연출 지침을 세웠다.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와 좀비 드라마 <워킹 데드> 사이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이번 화보에선 좀비들이 사람 대신 도넛을 찾아 헤맬 예정이에요. 요즘 제 영화에 코미디 요소를 가미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거든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가보는 거죠.” 베이커가 웃으며 말했다.

도넛 가게는 베이커의 영화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다. 2015년 선댄스 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화 <탠저린>에서는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으며, 2021년 영화 <레드 로켓>에서는 사이먼 렉스(Simon Rex)가 맡은 한물간 포르노 스타가 17세 계산원 ‘스트로베리’를 처음 만나는 장소로 활용됐다. 하지만 베이커는 도넛 가게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전 도넛을 먹지도 않는답니다.” 베이커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번 화보가 자신의 영화 속 일부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으면 좋겠다며 2017년 영화 <플 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솜사탕 같은 포근한 색감을 담아낸 촬영감독 알렉시스 자베(Alexis Zabé)에게 연락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했다. “사람들이 이번 화보를 보고 제가 새 영화를 찍었는지 궁금해했으면 좋겠어요.”

마이키 매디슨과 정호연, 코너 셰리가 도넛 가게에 들이닥쳤다. 매디슨은 유리창을 두드리고, 정호연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셰리는 좀비처럼 손톱을 세우며 걷기 시작했다. 베이커는 도넛과 핑크 글레이즈, 초콜릿으로 가득한 진열대 뒤에서 연출에 집중했다. “누가 호연에게 지금 하고 있는 팔동작이 정말 멋지다고 좀 전해줘요.” 그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키가 약 160cm인 매디슨을 조금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베이커는 매디슨이 올라설 수 있는 받침 상자를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 저한테 키가 작다고 하신 거예요?(웃음)” 매디슨이 농담조로 말했다.

마이키 매디슨이 입은 스윔수트, 스커트, 슈즈는 Miu Miu 제품. 정호연이 입은 드레스, 슈즈는 Louis Vuitton 제품.

처음에 매디슨은 베이커가 자신에게 <아노라>의 ‘애니’ 역을 제안한 사실을 전혀 믿지 못했다. “누구도 저를 생각하면서 대본을 쓴 적이 없었거든요.” 촬영용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간 매디슨이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매디슨이 오디션 없이 배역 제안을 받은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에이전트에게 정말로 자신에게 제안이 온 것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전에 상처받은 적이 꽤 있었거든요.” 매디슨이 설명했다. 당시 매디슨은 드라마 <베러 씽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에 출연하며 적당히 인지도를 쌓은 상태였다. 하지만 베이커는 캐스팅에 유명 배우를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스타그램이나 플로리다의 슈퍼마켓, 텍사스 걸프 해안의 거리 등에서 신인 배우 또는 비전문 연기자를 발굴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실제 2021년 영화 <레드 로켓>에 등장한 한 여성 배우는 베이커가 자동차 시동 문제를 해결해준 뒤 캐스팅한 인물이다. “전 절대 ‘이 영화에 누구를 넣을까?’라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요. ‘제니퍼 로렌스에 디카프리오를 붙여야겠어’ 같은 식의 발상은 제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베이커가 말했다.

<아노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매디슨은 역할을 위해 폴댄스를 배우고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녀가 연기한 ‘애니’는 거칠고 연약하면서도, 강단 있고 유머 감각을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다. 매디슨은 시나리오상 ‘애니가 댄서로서의 유연함을 보여준다’는 지문을 보고 이 대목을 최고의 댄스 장면으로 확장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녀가 준비한 안무를 처음 본 베이커는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영화의 주요 장면으로 연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장면은, ‘애니’가 ‘이반’ 앞에서 오후 햇살을 배경으로 스트립쇼를 펼치는 인상적인 시퀀스다. 베이커는 이를 매디슨이 직접 선택한 브룩 캔디의 곡 ‘Drip’에 맞춰 뮤직비디오처럼 촬영했다. “꽤 수위가 높은 노래죠. 그리고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렸고요.” 베이커가 웃으며 말했다.

도넛 가게 내부는 15평 정도의 좁은 공간으로, 파리채, 밀대, 산처럼 쌓인 핑크색 과자상자들, 설탕과 버터밀크 통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도넛 강도단이 내부로 들이닥치자, 본격적인 난장판이 시작됐다. 매디슨은 도넛 트레이에 달려들어 도넛을 입으로 밀어 넣었고, 정호연은 금속 조리대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 가게 주인을 괴롭혔다. 바닥은 금세 스프링클과 반죽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바로 그거예요! 그 광기 어린 표정을 기다렸어요” 베이커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매디슨의 악마 같은 표정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곤 가게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는 연출을 더하고 싶다며 물었다. “혹시 가게 안에 유선전화가 있나요?”

<아노라>는 재치 있는 대사와 연출 덕에 장면장면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높은 영화다. 1971년 누아르 영화 <프렌치 커넥션>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긴장감으로, 심지어 도넛 가게 장면에서조차 불쌍한 주인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베이커는 어릴 적 경험으로 인해 낙후된 도심 근교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모종의 불안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뉴저지 교외에서 자란 베이커는 특허 변리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맨해튼 미드타운 사무실로 함께 출근하곤 했는데, 어린 베이커가 링컨 터널을 지나 마주한 1970년대 후반의 42번가는 포르노 상점과 성인용품 관련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정글 세계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10세도 안 된 어린이에게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매우 강렬한 경험이었죠.” 한편, ‘마피아의 땅’으로 불린 뉴저지 북부는 나무가 늘어진 평화로운 주택가 뒤에 어딘가 수상하고 불법적인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호연이 입은 셔츠는 Isabel Marant 제품. 코너 셰리가 입은 티셔츠는 Bottega Veneta 제품. 마이키 매디슨이 입은 드레스는 Chanel 제품.

베이커의 영화 대부분은 조용히 입소문을 타며 성공했지만, 작년과 올해 시상식 시즌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정말로 사람들이 제 영화를 봤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베이커가 말했다. 단순히 본 것에 그치지 않고, 진심으로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노라>는 이후 올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총 5개 부문을 석권했다. 대부분의 영화감독에게 이런 성공은 기대 이상의 예산과 유명 주연 배우, 더 많은 기회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지만, 베이커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대형 스튜디오와 함께 영화를 제작하는 대신 규모는 작아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선택해왔다. 5관왕이라는 쾌거를 통해 그에게 집중된 관심은 오히려 베이커가 지금껏 해온 방식 그대로 나아가면 된다는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해주었다. 그 방식이란, 하나의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자신의 작업에 대해 최대한의 통제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 베이커는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이번 <더블유> 화보를 준비하면서 친구의 영화 편집까지 병행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전 한 번에 하나 이상의 일에 창의력을 쏟는 게 잘 안 돼요.” 그가 말했다.

그럼에도 베이커는 자신의 영화를 촬영하는 것처럼 치밀하고 섬세하게 이번 화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1931년 범죄 영화 <바이스 스쿼드>를 향한 오마주부터 매디슨이 퇴마를 당하는 설정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심하고, 여러 장소를 직접 둘러본 끝에 그는 각각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세팅을 하루 종일 꼼꼼하게 이어갔다. 심지어 한 장면에서는 배경으로 보이는 도시 쓰레기통 전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촬영 전날 도착한 정호연은 숨을 몰아쉬며 “단편영화를 찍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매디슨이 핑크 글레이즈 도넛 하나를 주워 베개를 베듯 그 위에 머리를 얹으려 했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정도까지는…” 베이커가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숀!” 매디슨이 도로에 엎드린 채 외쳤다. 그 모습에 차를 몰던 운전자들이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베이커는 <아노라>의 성공이 할리우드의 일반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그는 다음 프로젝트에서 상업성을 지금보다 덜어내고, 더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캐스팅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하기를 원했다. “혹시 제니퍼 로렌스가 이 기사를 본다면, 제가 그녀를 안 좋아하는 줄 알까 봐 걱정이에요. 전 그녀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캐릭터를 구상할 때, 제 마음을 울리고 그 역할이 누구를 통해 살아 숨 쉴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볼 뿐입니다.

디렉터
Sean Baker
포토그래퍼
Alexis Zabé
헤어
Bryce Scarlett(@Wall Group)
메이크업
Nina Park(@Kalpana)
그루밍
Anna Bernabe(@Phytosurgence)
네일
Emi Kudo(@Dior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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