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치오 카텔란과의 180일

권은경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제18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과 동행했다.

2023년 서울에서 진행한 개인전으로 그 파급력을 증명한 아티스트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그가 제18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과 동행했다. 약 6개월간의 교류를 거쳐 카텔란이 하나씩 꺼내놓은 아이디어는 이번 캠페인의 강렬한 시각 요소로 곳곳에 넘실거렸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가 생애 첫 작품, ‘Family Lexicon’(1989). 그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화려한 실버 프레임 액자에 웨딩 사진을 담아 두는 문화에 착안, 자화상을 이용해 특정 신을 연출했다. 사진 속 청년 카텔란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아 ‘하트’를 만든 상태다.

‘제18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 Love Your W’를 위해 기꺼이 협업

아티스트로 나선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을 소개한다. 예술, 사회, 정치 등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전반적인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작업으로 반향과 소동을 일으켜온 논쟁적 미술가. ‘더는 못하겠다’는 듯이 은퇴 선언을 하고서 5년이 지나자 18K 골드로 만든 황금 변기(‘아메리카’)를, 다시 3년 후에는 전시장 벽에 덕테이프로 고정한 바나나 한 개(‘코미디언’)를 작품으로 선보이며 소셜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명성을 환기한 인물. 그리고 2023년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 국내외 아티스트 중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가장 화제를 일으킨 것이 분명한 현대미술계의 스타. 그가, <더블유>의 중요한 연례 행사인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에 참여하고자 약 6개월에 걸쳐 이메일과 전화 통화로 교류하고 미션을 수행했다. 최근 몇 년간 이 캠페인에 협업한 아티스트로는 다니엘 아샴과 카우스가 있다. 그들 모두 캠페인에 어울리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제시하려고 새로운 작업을 해주었다. 인플루언서 수준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사는 아티스트가 <더블유>의 제안을 받아들고 어떤 식으로든 드로잉에 관한 생각에 빠졌을 장면을 상상하면 고마움과 신기함이 교차한다. 그렇다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잠시 시계를 되돌려 카텔란과 <더블유>의 첫 만남부터 돌아본다. 우리가 서울에서 만나 화보 촬영을 진행한 건 지난 2월이다. 카텔란이 리움 미술관에서 2023년 1월 31일부터 7월 16일까지 대규모로 연 개인전의 오프닝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그날의 유쾌한 흔적과 귀한 인터뷰는 <더블유> Vol.3에 실렸다. “저는 제 전시를 위한 작업과 매거진 <토 일렛 페이퍼>를 만드는 작업을 번갈아 진행하며 살아왔어요. 아티스트 활동만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보여주기에 충분치가 않아요.” 획기적인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매거진의 발행인답게, 화보 촬영 당시 카텔란은 최대한 어색함을 이겨내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만의 궁리를 하는 듯 보였다. 작품에 쓰인 것과 비슷한 덕테이프를 직접 머리에 둘러보기도 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톰 브라운 재킷을 뒤집어 안감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입어보면 어떨지 물어보기도 하면서. 많은 언론사가 그의 히트작인 ‘코미디언’(2019)을 의식해 바나나를 포트레이트 촬영 소품으로 쓰려 하면 그가 거절한다고 들었지만, <더블유>가 회색 덕테이프로 칭칭 둘러싼 바나나를 건넸을 때는 그 바나나로 전화 통화를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카텔란에게서 ‘나는 모델이고, 에디터와 사진가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표정이 잠시 스쳤던 것 같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에게 <더블유>의 중요한 캠페인을 소개하고자 첫 메일을 띄운 건 이른 봄이다. 반응 속도는 놀라웠다. 아티스트에게서 ‘OK’ 답변과 실질적인 제안까지 한 번에 받았으니. “캠페인에 이 작품을 활용하는 건 어때요? 제가 작가로서 제일 처음 작업한 거예요.

1, 2, 3. 제 18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의 협업 아티스트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더블유>에 일러스트 작업으로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인사말을 보내기보다 이런 작은 시도를 스스로 하는 데서도 그의 재치 있는 면모와 성격이 드러난다. 카텔란의 작품 세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스타일의 그림이라 신선하다.

1989년에 만들었죠. 참, 우리 서울에서 촬영할 때 굉장히 재밌었어요.” 카메라 앞에서 정적으로 서 있기보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아이디어를 내고 잰걸음으로 돌아다니던 그 모습처럼, 카텔란은 능동적으로 <더블유>와 소통해 갔다. 카텔란이 ‘전업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작업한 첫 작품이자, 이후에 남긴 많은 자화상의 시작점이 되는 ‘패밀리 렉시콘(Family Lexicon)’은 미디어에 흔히 노출되는 그의 작품이 아니기에 더욱 놀랐다. 사진 속 청년 시절의 카텔란은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든 모습이다. 사실 이 사진은 원래 작품의 구성 중에서 일부만 취한 것으로, 그가 맨 처음 선보인 ‘패밀리 렉시콘’은 고급진 테이블 위에 자화상이 든 액자와 고풍스러운 촛대 등등을 함께 세팅해 연출한 일종의 디오라마 작업(어떤 풍경을 바탕으로 특정 장면을 만들거나 배치하는 것)이었다. 과거 이탈리아의 중산층 사이에선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실버 프레임 액자에 웨딩 사진을 담아 진열해 두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힘들게 자란 것으로 알려진 카텔란이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풍경과 문화를 전유해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그는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말하길 꺼리는 편인데, <더블유> 인터뷰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공황 발작 증세가 올 것 같다고 털어놨다). 다만 액자 속에 든 인물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기념하기보다 홀로인 채 ‘사랑’과 함께있다. 아티스트 생활 시작 단계부터 단순한 물건과 간단한 구성만으로 무언가를 암시하고, 전통이나 제도를 비틀어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장기를 발휘한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리고 이런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는 가슴팍에서 두 손을 모아 하트를 만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더블유>의 캠페인과 직관적으로 잘 어울린다는 점을 스스로 알아챘다. 청년 카텔란의 이미지는 이달의 커버를 장식한 건 물론, 제18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의 키 비주얼로 성실하게 함께했다. 갈라 디너와 홀리데이 파티 초대장부터, 행사장을 방문한 셀럽들이 사진과 영상 촬영을 할 때 배경으로 쓰인 가로 12m, 세로 7m 사이즈 무대에도 흑백 이미지의 거대한 카텔란이 자리했다.

사랑이 두렵지 않다, NOT AFRAID OF LOVE, 2000, PHOTO | 강혜원.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놓고 말 못하는 문제를 뜻하는 표현, ‘방 안의 코끼리’. 카텔란은 코끼리와 KKK가 떠오르는 복면만으로 인종 갈등 문제를 표현한 바 있다. 작품명은 ‘사랑이 두렵지 않다’(2000).

<더블유>는 카텔란의 동의하에 그 이미지를 프린팅한 티셔츠와 머그잔을 소량 제작해 사전 바이럴을 위한 콘텐츠로 활용했고, 한동안은 카텔란의 이미지에 인스타그램 사용자 각자의 모습을 합성해 재치 있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인스타그램 필터를 릴리스하기도 했다.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에서는 여러 온 오프라인 활동이 전개된다. <더블유>는 자선 모금을 통해 한국유방건강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한 해 활동에 마침표를 찍는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아티스트가 가세하고, 수많은 셀럽이 뜻을 함께함으로써 주목도가 높아진 덕분에 이 의미 있는 후원을 18년째 지속할 수 있었다. 카텔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1월 24일 행사장에 참석하기 위해 일정을 살피던 그가 결국 한국에 오지 못하게 된 후, 우리는 그에게 간단한 영상 촬영을 부탁했다. 갈라 디너에 모인 140명 정도의 참석자와 <더블유> 오디언스에게 이번 캠페인의 협업 아티스트로서 간단히 인사를 건네는 내용의 영상 말이다. “저는 카메라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거나 영상 인터뷰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어요. 영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해본 적도 없고요.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렇게 제 소개를 대신하려고요.” 그가 보내온 것 중 하나는 4컷 웹툰이 연상되는 일러스트다. 각 일러스트에 그는 이런 내용의 말풍선도 달아놨다. “저는 63년 전, 베니스 근처의 작은 마을인 파두바(Padua)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 처음 가본 때는 1995년이에요. 그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이 늘 친절하고 사랑스러워요. <더블유>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 저에게 영감을 주는 대단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유방암에 대해 더 알아가는 기회도 되었죠.” 이어, ‘Love Your W’라는 캐치프레이즈에 화답하는 듯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아포리즘이 등장한다. “당신만의 꿈을 실현하길.” “사랑이 삶을 구한다!”

그, 2001, 플래티넘 실리콘, 유리섬유, 머리카락, 옷, 신발, 101x41x53CM, PHOTO | 김경태.
코미디언, 2019, 생 바나나, 덕테이프, 가변크기,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PHOTO | 김경태.

긴 세월 동안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업을 관통해온 소재는 억압, 불안, 사랑, 권위와 질서, 삶과 죽음, 나와 가족, 그리고 ‘우리’다. 그는 이미지를 통해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이고, 그런 아티스트에게서 태어난 작품은 논쟁 혹은 토론과 한 세트처럼 어울려 다녔다. 이를테면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조각으로 보여준 ‘아홉 번째 시간(La Nona Ora)’이나 무릎 꿇은 채 공손히 회개 중인 듯한 히틀러의 기묘한 모형인 ‘그(Him)’, 전시장 앞에 정말로 노숙자가 누워 있는 것처럼 연출한 실물 크기의 조각 등이 그렇다. 미술사는 물론 사회 문화적인 현실이나 실생활에서 무언가를 차용해 작업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그의 스타일이다. 그 유명한 바나나 작품인 ‘코미디언’은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12만 달러에 판매되었고,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된 황금 변기 ‘아메리카’는 매일 인증샷을 찍기 위한 관객들을 줄 세우다가 어느 날 통째로 도둑맞으며 뉴스 거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바나나가 억대에 팔리는 게 현대미술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인가’라고 의아해하지만, 카텔란은 앤디 워홀에게서 차용했을 바나나 하나에 중요한 쟁점과 모순을 담아낸다. 점차 썩어갈 운명인 바나나가 어떻게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을 나누어 판단하고, 그 작품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짓는 존재는 누구인가? 제도에 대한 담론과 토론을 같이 끌어내는 것이다.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여러 재능 중에서도 직관력만큼은 탁월하게 뛰어나, 바나나 하나로 전 세계에 바이럴을 일으키는 카텔란의 감각은 얼마나 얄미울 정도인가?

2023년 2월 리움미술관에서 <더블유>와 화보 촬영을 한 카텔란. 당시 책에 실리지 않은 사진이다. PHOTO | 강혜원.

카텔란이 촬영했다는, 원숭이들이 점프 연습을 하는 영상 캡처 이미지. 그는 우리에게 영상으로 대신 말한다. ‘점프를 두려워 말라’.

자기 소개와 인사를 부탁한 <더블유>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응답한 카텔란은 일러스트와 더불어 영상 한 편을 건넸다. 1분짜리 흑백 영상이다. 영상을 재생하자, 거대한 야자수 나무가 우거진 숲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잠시 후 나무 위를 오르는 원숭이들이 보인다. 나뭇가지 끝까지 올라 자세를 바로잡는 듯하더니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길고 큰 점프를 하는 원숭이. 한 마리가 점프하면, 뒤이어 다른 원숭이가 점프한다. 그 몇 마리 원숭이는 가족이 아닐까?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점프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카텔란은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찍은 영상이에요. 저는 이것이 가족에 대해, 배움에 대해, 무엇보다 ‘점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해주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감각해진 나머지 더는 나와 타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던 카텔란이, 이번에는 원숭이들의 점프에서 가족과 배움과 도약을 발견했다. 그 절묘한 순간을 포착해 <더블유>에 전달한 것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가치 있게 여기는 메시지를 공유한 것이라 생각한다. 쉬운 ‘말’ 대신 평소 보여줄 일 없던 일러스트 작업과 뜻이 담긴 영상으로 화답하는 그에게서, 따뜻함과 비주얼리스트의 면모를 동시에 느낀다.

“저는 63년 전, 베니스 근처의 작은 마을인 파두바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 처음 가본 때는 1995년이에요. 그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이 늘 친절하고 사랑스러워요. <더블유>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 저에게 영감을 주는 대단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유방암에 대해 더 알아가는 기회도 되었죠.”

카텔란이 보내온 일러스트 작업 4컷 중 하나. 일러스트 속 카텔란은 귀엽게도 ‘W’ 배지를 달고 있다. 그의 메시지를 기억하자. ‘당신만의 꿈을 실현하길’, ‘사랑이 삶을 구한다!’

아티스트로서 의미가 클 첫 작품을 캠페인의 키 비주얼로 선뜻 제안하고 귀여운 자기 소개를 한 데 이어, 카텔란은 ‘Love Your W’라는 문구를 그의 아이디어대로 재구성해 디자인했다. ‘Love’는 말보다 기호로 전달될 때 그 뜻이 더 와닿는 걸까? 빨간색 하트 문양과 텍스트를 몇 가지 방식으로 조합해 트럼프 카드 느낌으로 경쾌하게 표현한 카텔란 버전의 ‘Love Your W’는 이달 2종 커버 중 하나에 안착했다. 흑백의 청년 카텔란과 함께. 다시, 지난 인터뷰에서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쏟아진 반응을 두고 한 말이 떠오른다. “(은퇴 선언 후) 미술에만 너무 집중하지 않은 덕분에 이후 ‘아메리카’와 ‘코미디언’을 구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업 결과에 만족했어요. 물론 그것들이 성공을 거둔 건 작품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렸기 때문이겠죠. 이제는 ‘삼위일체’를 완성할 준비가 거의 끝났달까요.” 그가 말한 삼위일체란 뒤샹의 ‘샘’을 연상시키는 황금 변기 작품, 또 앤디 워홀의 바나나 다음으로 유명해진 그 바나나 작품 이후 선보일 다음 작품을 뜻하는 게 아닐까? 변해버린 세상의 스타일에 들어맞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3부작’의 마지막 카드 말이다. 그는 예술 작업이란 속도 겨루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도 했다. 느린 호흡으로 문제작을 발표하는 이 아티스트의 여정에서, <더블유>가 의미있는 접점을 가진 것은 꿈같은 행운이다.

사진
COURTESY OF LEEUM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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