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이슈 06 – 배헤윰

W

배헤윰의 색면추상에 성큼 다가서려 하면, 작품은 한 발짝 슬며시 미끄러지듯 물러난다. 작가만의 고유한 사고 체계를 강렬한 색채와 과감한 색면 구성으로 구현해낸 그림들. 올해 프리즈 서울의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 작가로 선정된 배헤윰을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작년 한 해 가장 분주히 미술 현장을 달린 국내 젊은 화가를 꼽자면, 단연 배헤윰이 떠오른다. 휘슬 갤러리에서 치른 개인전 <Combo>, 동시대 한국 미술의 최전선에 있는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체전 <젊은 모색 2021>, 컬렉터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아트부산 페어 현장까지. 1987년 출생, 올해로 36세를 맞는 배헤윰은 프리즈가 올해 처음으로 시도하는 ‘포커스 아시아’ 섹션의 선정 작가이기도 하다. 포커스 아시아는 2010년 이후 아시아 지역에 개관한 신생 갤러리 10곳을 선정하여 앞으로 미술 신에서 활약할 유망 작가의 솔로 쇼를 선보이는 프로젝트다. 주최 측의 심사를 거쳐 아시아 총 8개국의 갤러리가 선정됐고, 배헤윰은 휘슬 갤러리와 함께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지난 4년간 꾸준히 탐구해온 회화적 주제의 연장선에 놓인 신작 1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린과 마젠타 등 강렬한 보색 대비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정지된 사각 캔버스 속 굽이치듯 접힌 색면. 배헤윰이 전개하는 색면추상 작품에는 구체적인 상상을 이끄는 도상 따위의 힌트가 최대한 소거되어 있다. 마치 관객에게 수수께끼 게임을 시작하자고 말을 거는 듯한 그림들. 관객은 ‘Launch’, ‘Resolute Tracker’ 등 다소 구체적인 작품 제목을 손에 쥔 채 추상의 틈을 비집고 구상을 찾으려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이다. 알 듯 모를 듯 교묘하다는 뜻을 지닌 ‘Tricky’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작업을 선보이는 배헤윰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바둑 용어 ‘복기’를 가져와 설명한다. 바둑에서 복기란 앞서 놓은 수를 하나씩 다시 두면서 대국의 연쇄적 흐름과 맥락을 곰곰이 반추해보는 일. “저는 드로잉을 많이, 반복해서 그려요. 무엇을 그리겠다는 목표를 두고 거기에 맞추기보다 자유롭게 하는 편이에요. 사실 원한다면 참고할 것도 많고 자료화할 것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떤 특정 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경유하는 대상 없이 오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리는 작법을 쓰고 있어요. 그렇기에 대국 진행 과정을 이미지화해서 이를 혼자 다시 기억해내는 바둑의 복기 방식과 여러모로 유사하죠. 또 그림을 그릴 땐 최대한 고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림을 그린다’라고 여기기보다 ‘그림이 나타난다’, ‘그림이 나에게 제안해준다’고 생각하죠.” 배헤윰의 작품 앞에서 어떤 형상을 발견하고 해석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모를 결심’을 할 때 비로소 관객은 그림 속 그만의 사유 체계에 초대될 수 있다.

Yet Labelled Symptom(2022). 130.3×89.5×4cm. 프리즈 서울에 출품되는 신작. 강렬한 색감 대비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 정지된 사각 캔버스 속 굽이치듯 접힌 색면이 돋보인다.

HEJUM BÄ, YET LABELLED SYMPTOM, 2022, OIL ON CANVAS, 130.3X89.5X4CM. ©HEJUM BÄ 

배헤윰은 대학 졸업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떠나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갔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그러니까 다소 타자화된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봤을 때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낀 한국의 현주소는 이곳만큼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 즉 ‘미디어 리터러시’가 높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거리를 걸으면 디지털 사이니지로 흘러나오는 이미지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채 흡수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정보 속에 살아가는 시대. 배헤윰은 요즘 시대의 디지털 미디어 감각을 어쩌면 가장 전통적 매체라 할 수 있는 회화에 새롭게 동원한다. 최근 그가 게임에서 점수를 얻는 체계인 ‘스코어링’과 모바일 기기의 ‘잠금 해제’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 때문. 그는 원색에 가까운 밝은 색이 서로 부딪쳤을 때 회화의 운동감이 발생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창작 과정에서 추상회화가 색과 형태 등을 통해 암묵적으로 의미를 얻는 것이, 마치 게임 속 시각 요소가 서로 부딪치며 점수화되는 체계인 ‘스코어링’과 유사하다고 바라본다. 그런 한편 모바일 기기를 여는 것(Open)이 아닌 잠금 해제하는(Unlock) 구조는 마치 추상 세계로 진입하는 감각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잠금 해제란 결국 잠겨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를 해제하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거잖아요. 저는 모바일 기기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잠금 해제의 감각이 특히 회화를 감상할 때의 감각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전시를 할 때 조금이라도 다른 현장을 만들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림이 걸려 있는 방식이나 그림끼리의 케미스트리가 결국에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진입한 듯한 느낌을 주니까요. 작품을 육안으로 보고 몰입감을 느낄 때, 내가 작품과 동일한 공간에 병존했을 때 어떤 종류의 ‘잠금 해제’가 일어난다고 봐요. 이렇듯 스코어링이나 잠금 해제처럼 게임이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들이, 다시 회화를 감상하고 회화를 대면할 때 필요한 어떤 에센스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배헤윰은 이번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서 그가 최근 주목하는 두 가지 개념인 스코어링과 잠금 해제에 대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 그가 뜨겁게 쌓아 올리고 있는 회화 세계를 엿볼 귀한 기회다. 언젠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새로운 피부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 작가는 자신에게 그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답한다. “회화는 물질과 화가의 수많은 교류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저의 경우 상으로만 존재하던 어떤 ‘생각’이 표피로 된 ‘보디’를 갖추고 나타난달까요. 그러면서도 평평하게, 팽팽할 때 가치가 유지된다는 물질적 조건이 엄정하고 절박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절대적인 조건 아래 변수를 일으키는 화가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오래 이어져온 것, 제가 여전히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귀하다고 생각해요.”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최영모
헤어&메이크업
박정환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