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이슈 01 – 하우저앤워스(Hauser&W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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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에서 출발한 하우저앤워스가 현대미술계를 이끄는 톱 갤러리 중 하나가 되기까지, 남달랐던 한 가지를 꼽자면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지역사회’에 눈길을 두었다는 점이다. 프리즈 서울로 한국에 처음 상륙하는 갤러리는 위대한 20세기 예술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을 보여주려 한다. 

피필로티 리스트 ‘Enlightened Granddaughter(black red)’(2022). 72 42 35cm. 옷걸이에 걸린 수영복 내부에 램프가 있다. 불이 켜지고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순간, ‘라디나, 깨달음에 이른 손녀’라는 제목이 동화 제목처럼 다가온다.

PIPILOTTI RIST. ‘라디나, 깨달음에 이른 손녀 (검정빨강) , LADINA, THE ENLIGHTENED GRANDDAUGHTER (BLACK RED), LADINA, DIE ERLEUCHTETE ENKELIN (SCHWARZ ROT) (FAMILIE ELEKTROBRANCHE)’, 2022. SWIMSUIT, ROUND METAL LAMP SHADE SKELETON, FROSTED GLASS SPHERICAL LAMP, FABRIC CABLE AND PLUG, CLOTHES HANGER, RIBBONS, 72 X 42 X 35 CM / 28 3/8 X 16 1/2 X 13 3/4 IN. COURTESY THE ARTIST, HAUSER & WIRTH AND LUHRING AUGUSTINE. © PIPILOTTI RIST.

작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아트 딜러, 컬렉터, 비평가… 미술계를 둘러싼 여러 층위의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지금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를 세 손가락으로 꼽아보자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호명될 이름 중 하나는 하우저앤워스다. 갤러리의 출발점이 된 스위스 취리히를 비롯해 미국, 영국, 스페인, 모나코와 홍콩에 걸친 갤러리 수는 총 13개. 작고한 작가를 포함한 전속 작가 수는 90여 명. 한국에 지점은 없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서울에 첫 상륙한다는 점에서 하우저앤워스는 가고시안과 더불어 프리즈 서울 부스의 온도를 한껏 높일 메가 갤러리다.

불과 얼마 전까지 ‘프리즈 서울’이라는 이름은 호황의 가면을 쓴 유령 같기만 했다. 막연했던 기대감과 흥분이 눈앞의 구체적인 계획들로 하나씩 옮아가는 중인 8월, 하우저앤워스는 유독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꽤 이른 시점부터 프리즈 서울을 앞두고 여러 영역의 프로모션에 관심을 가진 데다, 밀도와 속도가 공존하는 ‘코리안 스타일’ 의 업무 방식에 맞춰 체계적으로 페어를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9월 2일 프리즈 서울 개막을 전후해서는 코엑스 주변과 한남동, 삼청동 일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빨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빨강의 정체는 한국에서 특정한 수식으로도 유명한(‘카니예 웨스트와 GD가 사랑하는 작가’) 조지 콘도의 신작 ‘Red Portrait Composition’ (2022)을 내세운 포스터다. 하우저앤워스는 수많은 도시에서 작품 이미지를 활용한 스트리트 포스터 캠페인을 벌여왔다. 수천만원, 수억원짜리 그림 이미지가 저작권을 우려할 필요 없이 길거리 어딘가에 붙어 있고, 누군가는 그렇게 ‘게릴라적 예술’과 마주치는 흥미로운 순간이 발생한다는 것. 우리가 왜 지금 프리즈 서울 운운하고 있을까? 고가의 작품을 소장하거나 예술에 접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시민’이 잠깐이나마 현대미술을 환기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이벤트는 바로 이런 축제 기간에야 일어난다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다.

하우저앤워스에는 여느 갤러리와 구분되는 특이점이 있다. 갤러리가 하는 일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인데, 이들은 오랫동안 전시를 중심으로 조금씩 다른 가지를 뻗어왔다. 이를테면 지역사회의 고등학교와 파트너십을 맺어 워크숍을 진행하고,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자체로 독특한 디자인의 오브제 같은 책을 제작하는 출판사와 서점도 있다. 전설적인 디스코텍과 스케이트장이 있던 건물이나 옛 양조장 건물을 갤러리로 개조하고, 황폐한 농장 부지에 목가적인 느낌의 대형 갤러리를 짓는 선택 또한 여느 갤러리들이 택하는 길과는 사뭇 다르다. “미술관이 되길 열망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활동을 통해 예술계 관객을 넘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밑받침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 지역에 예술적 에너지를 일으키는 허브가 되죠.” 하우저앤워스의 세 대표 중 하나인 아이반 워스(Iwan Wirth)가 <더블유>에 전했다. “마침 올해는 우리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그만큼 놀라운 작품들을 준비했어요. 프리즈 서울에서 20세기 예술의 위대함을, 또 미술사의 궤적을 추적하는 우리 프로그램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건 20년 전. 백남준에게 큰 프로젝트를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취리히 내 비어 있던 산업지구를 위한 프로젝트였어요. 백남준 작가와 함께 <Jardin Illumination>이라는 전시를 결국 해냈고,전시 카탈로그에 에세이를 쓴 피필로티 리스트(Pipilotti Rist)와도 연을 맺게 되었죠. 그녀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는 존재예요.” 설치 작업과 비디오 아트를 하는 스위스의 피필로티 리스트는 프리즈 서울에서 눈길을 끌 만한 신작 두 점을 공개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Gray Fountain’(1970-1971). 28.5×55.8×116.8cm. 격렬하면서 고조된 작가의 심리 상태가 들쭉날쭉
솟아난 조각으로 반영된 걸까? 원통형의 대리석이 만들어낸 매끈하고도 날카로운 숲.

LOUISE BOURGEOIS. ‘GRAY FOUNTAIN’, 1970-1971. GRAY MARBLE AND STEEL, SCULPTURE: 28.5 X 55.8 X 116.8 CM / 11 1/4 X 22 X 46 IN, WOOD BASE: 29.2 X 58.4 X 121.9 CM / 11 1/2 X 23 X 48 IN. COURTESY THE EASTON FOUNDATION AND HAUSER & WIRTH. © THE EASTON FOUNDATION. PHOTO: CHRISTOPHER BURKE.

아이반 워스가 말한 ‘놀라운 작품들’ 중에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Gray Fountain’(1970-1971)을 빼놓을 수 없겠다. 지난 7월 스위스 아트 바젤에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유명한 ‘거미’가 등장했다는 생각에 좀 아쉽기도 하지만, 이 회색 분수 앞에서도 관객은 오래 머물 것이다. 부르주아는 자연적 형태와 건축에도 오랫동안 관심을 보인 작가로, 오밀조밀하게 돋아난 조각 형태는 울창한 숲과 도시 경관을 암시한다. 언뜻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의 쇳덩어리처럼 보이는 조각의 재료는 대리석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빼어난 대리석 가공술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부르주아는 대리석으로 작업하는 과정에 대해 대리석을 잘라내는 ‘공격적인 행위’ 이후엔 그것을 연마하고 기름칠하고 관리해 30년간 보관해야 한다는 점에서 ‘양육’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가정교사와 아버지의 불륜을 어린 시절 알아챈 충격으로 인한 지독한 ‘증오심’,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시선이기도 한 강인한 ‘모성애’. 부르주아의 세계를 관통하는 이 정서와 그로부터 파생된 격렬한 감정, 긴장감과 역동성, 육체성과 섹슈얼리티 등 작가의 주된 키워드를 떠올리면 작품은 또 다르게 보인다.

제이슨 로즈 ‘NOM Korean Bedroom Idol’(2006). 236.2×61×40.6cm. 작가는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조립하고 집합시키는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였다.

JASON RHOADES. ‘NOM KOREAN BEDROOM IDOL’, 2006. PALETTE-SHAPED LEATHER BLOTTER, L’AIGLON STRETCH BELT, FOUND NEON, GTO CABLE, 6 SILICONE END CAPS, 120V VENTEX TRANSFORMER, 3 CERAMIC DONKEYS, BLUE CUMMBERBUND, PINK BOWTIE, PINK RIBBON, WHITE HALTER TOP, BLACK RIBBON, CAMEL SADDLE STOOL, ORANGE EXTENSION CORD, 236.2 X 61 X 40.6 CM / 93 X 24 X 16 IN. COURTESY THE ESTATE OF JASON RHOADES, HAUSER & WIRTH AND DAVID ZWIRNER. © THE ESTATE OF JASON RHOADES. PHOTO: JEFF MCLANE.

하우저앤워스 부스에는 ‘노래방’이라 쓰인 네온사인이 눈에 띄는 독특한 설치물도 자리할 예정이다. 작가가 ‘한국’ 에 맞춰 작업한 신작이 아니다. 하우저앤워스의 첫 번째 전속 작가이기도 한 제이슨 로즈(Jason Rhoades)는 15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업 방식은 네온사인 텍스트들과 더불어 대중문화의 산물과 수공예품, 개인적 의미가 담긴 물품 등등 갖가지 오브제를 어지럽게 집합해놓은 식이다. 그런 설치작은 어지러운 수준을 넘어 호더의 공간으로 보일 만큼 난잡한 상태일 때도 많았는데, 관객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더듬으며 그 안에서 서사를 파악해가곤 했다. ‘NOM Korean Bedroom Idol’(2006)은 제이슨 로즈의 작업 중 가장 심플한 형태에 속할 것이다. ‘노래방’ 네온사인은 LA 코리아타운 인근에 살았던 작가가 자주 다니던 노래방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마이크 켈리 ‘Memory Ware Flat #14’(2001). 178.1×117.2×8.9cm. 대형 캔버스를 채우는 ‘깨알 같은’ 질서. 작가는 버려진 사물, 지극히 일상적인 그 작은 것들을 작품으로 되살려냈다.

MIKE KELLEY. ‘MEMORY WARE FLAT #14’, 2001. MIXED MEDIA ON WOOD PANEL, 178.1 X 117.2 X 8.9 CM / 70 1/8 X 46 1/8 X 3 1/2 IN. COURTESY THE FOUNDATION AND HAUSER & WIRTH. © MIKE KELLEY FOUNDATION FOR THE ARTS. ALL RIGHTS RESERVED/VAGA AT ARS, NY. 

마이크 켈리(Mike Kelley)의 ‘Memory Ware Flats’ (2001)는 캔버스 안에 어지러운 질서가 있는 경우다. 작품명은 캐나다의 민속 예술 양식에서 따온 것이다. 가정용품인 병, 재떨이, 액자 등에 작은 보석이나 단추, 구슬 등을 붙여 장식하는 풍습을 상상해보자.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하찮게 취급받을 수도 있는 물건에 나름 감성적인 터치를 더해, 물건의 격을 조금이나마 높여주려는 따스한 손길이 떠오른다. 마이크 켈리는 이 연작으로 버려진 사물에 활력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는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조합하는 식의 작업을 자주 했고,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작가다. 한편으로, 작가가 이 시리즈를 ‘회화’라고 언급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갤러리의 역사가 30년쯤 되면, 작가 라인업에서 앞선 세대의 작가와 그를 보며 자란 ‘성덕’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3D 모델링을 기반으로 디지털 작업을 하는 1987년생 에이버리 싱어(Avery Singer)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인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의 열혈 팬이다. 프리즈 서울에는 싱어의 작품 한 점,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 ‘화가들의 화가’인 필립 거스턴의 작품 세 점이 전시된다. 언뜻 익살스럽고 귀엽게만 보이는 거스틴의 드로잉에는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온 이민자 가족의 삶, 백인우월주의자인 KKK가 활보하던 당시 사회 정치상이 서려 있다. 작품 ‘Untitled’(1968)의 한가운데서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는 형상인 ‘후드’가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깨달을 때도 섬뜩하지만, 더 섬뜩한 건 작가의 선언이다. ‘그것은 자화상이다. 나 자신이 후드 뒤에 존재한다고 본다. 후드를 그린 새로운 연작에서 시도한 것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KKK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이라는 개념이 나를 매료시켰다…. 악한 존재로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니콜라스 파티 ‘Clouds’(2022). 99.1×88.9×3.2cm. 피어오르는 구름, 물과 달, 반사작용을 표현한 풍경. 이제 사라지지 않고 캔버스에서 영원히 지속될 시간이다.

필립 거스턴 ‘Untitled’(1968). 65.4×76.2×3.8cm(framed). 작가는 1930년대부터 KKK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드’라는 캐릭터를 이용했다. ‘Untitled’ 연작을 작업할 즈음에는 악의 평범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삼았다.

NICOLAS PARTY. ‘CLOUDS’, 2022. SOFT PASTEL ON LINEN, 99.1 X 88.9 X 3.2 CM / 39 X 35 X 1 1/4 IN.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 NICOLAS PARTY. PHOTO: ADAM REICH. PHILIP GUSTON. ‘UNTITLED’, 1968. CHARCOAL ON PAPER, 45.7 X 56.5 CM / 18 X 22 1/4 IN. COURTESY THE ESTATE AND HAUSER & WIRTH.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아이반 워스는 아라리오, 현대, 국제 등의 갤러리가 1980년대부터 한국 근현대 미술을 국내 컬렉터들에게 꾸준히 소개해왔다는 것, 각각 1995년과 2002년에 출범한 광주비엔날레와 KIAF의 역사, 리움이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같은 기업 컬렉션도 상당하다는 것 등등 한국 미술계를 잘 파악하고 있다. 서울의 가치를 눈여겨본 하우저앤워스는 프리즈 서울에서 동시대 작품과 역사적 작품을 아우르며 총 36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거기엔 조지 콘도의 신작을 비롯해 귄터 푀르크, 로니 혼, 제니 홀저, 마크 브래드퍼드, 현재 홍콩에서 개인전 중인 니콜라스 파티 등이 포함된다. 프리즈 서울 이후 부산비엔날레에서도 두 작가를 소개한다. “한국 미술 시장에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활력이 있어요. 2014년경 단색화에 관한 주목할 만한 출판물과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고요. 프리즈가 런던에서 처음 열렸을 때, 확실히 판도를 바꿔놨던 걸 기억해요. 서울은 이미 역동적이고 고도로 정보화된 도시인 만큼 이제 더 큰 관심과 에너지를 불러모을 겁니다.”

아트 이슈 02 – 타바레스 스트라찬(Tavares Strachan)

피처 에디터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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