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빈 모리츠의 아시아 첫 개인전 'Raging Moon'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4의 그림들

2022-03-06T16:58:11+00:002022.03.07|FEATURE, 컬처|

숫자 ‘4’는 고대 서양 철학에서 질서정연한 법칙이자 보편적 조화의 출발점으로 통했다. 독일 회화 작가 사빈 모리츠는 이러한 ‘4’에 주목하며 역동적 에너지가 깃든 추상화를 완성했다. 이를 만나볼 수 있는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Raging Moon>이 갤러리현대에서 3월 11일 개최된다. 

붉고 파란, 노랗고 보랏빛을 띤 색채가 폭발하듯 사각 캔버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끊임없는 붓질로 쌓아간 물감의 축적, 이는 무질서하고 폭동적인 정신의 무아지경을 연상시킨다. 화가 사빈 모리츠의 추상화를 본 첫인상이다. 1969년, 동독 로베다에서 태어난 사빈 모리츠는 독일 추상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부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가다. 1991년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수학한 모리츠는 당시 지도교수였던 리히터가 교직을 떠나기 전 마지막 학생이었다. 쿤스트아카데미 시절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 ‘로베다’에서의 유년 시절을 모티프로 한 드로잉을 시작으로 이후 꽃, 전쟁, 헬리콥터, 도시 광장, 다큐멘터리 사진 등 다방면에 걸친 소재로 구상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2015년은 작가에게 심원한 변화의 시기로 꼽힌다. 이때를 기점으로 모리츠는 마치 ‘색의 폭동’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 색채의 추상화를 통해 자신의 작업 세계를 넓혀갔다. 작업 안에 다양한 소재를 끌어들이고, 구상과 추상을 민첩하게 오가며, 나아가 회화, 판화, 드로잉 및 사진 등과 같은 여러 매체로 실험을 이어가는 작가는 생성, 연장, 소멸, 재구성되는 기억의 속성에 질문을 던진다. 오는 3월 아시아 첫 개인전 <Raging Moon>의 개최를 앞두고, 독일 쾰른에 있는 작가와 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W Korea> 현재 독일 쾰른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 다 들었다. 당신의 아틀리에를 자세히 묘사해줄 수 있나? 또한 그곳에서 당신이 보내는 가장 보통의 하루를 이야기해준다면?
사빈 모리츠 옛 공장을 개조한 스튜디오를 사용하고 있다. 사무실과 쇼룸, 창고 등 여러 개의 작업 공간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다. 이곳에 도착하면 우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차를 끓여 마시며 하루를 연다. 이후 직접 키우는 식물을 찬찬히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3월 갤러리현대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 <Raging Moon>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숫자 ‘4’를 주제로 한 추상화를 중심으로 꾸려진다. 숫자 ‘4’는 고대 서양 철학에서 ‘완벽한 질서’로 은유되곤 했는데, 이에 주목한 이유가 있나?
당신 말처럼 ‘4’는 예부터 나침반의 방위, 사계절, 사원소를 의미했고, 또한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에서는 4가 정의를 뜻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이번 전시장에선 ‘봄’, ‘여름’ ,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을 표현한 네 점의 회화도 선보일 예정이다. 나는 이들을 하나의 연작,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추상 이미지의 특이점은 미성숙하고, 비합리적이며, 무방비적인 것들을 측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거다. 이번 전시에서는 추상화를 경유한 4란 개념에 대해 말해보고 싶었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상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과거 꽃이나 헬리콥터 등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던 구상화와 달리 추상화에선 어떤 직관과 본능, 색의 폭동, 무아지경의 정신적 풍경이 엿보인다. 과거 당신은 “추상화는 한계가 없다”라고 말한 적 있는데, 당신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작업을 확장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당신의 질문 내용에 답이 담겨 있는 것도 같은데?(웃음)

로베다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모티프로 한 드로잉을 시작으로 1991년부터 작품을 통해 꽃, 개, 전쟁, 광장, 군인, 공간의 틈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당신을 캔버스 앞에 서게 만드는 것들 사이엔 어떠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나?
나의 작업은 내가 하거나 했던 모든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신 말처럼 작품을 통해 전쟁, 군인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왔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작품에 소환된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페인팅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라고.

미를 형상화한 ‘Rose’ 연작을 포함해 이번 전시 출품작을 보면 하나의 스케치를 서로 다르게 채색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반복되는 주제에 미묘한 차이를 주며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는 어떠한 의도가 담겼는지 궁금하다.
반복, 변주를 통해 비로소 계속해서 ‘질문’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감정, 감정의 다양함과 복잡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구상과 추상을 끊임없이 오가고 동시에 회화, 판화, 드로잉 및 사진 등과 같은 매체로 다양한 실험을 이어왔지만, 당신 작품의 중심에는 늘 ‘기억’이 자리한 듯하다. 오랜 시간 ‘기억’에 천착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기억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자주 빈 캔버스 앞에 설 때면 나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의도적이지 않고 의식적이지 않은, 오히려 무의식에 가까운 내면에 의존해왔던 것 같다. 물론 그 내면의 일들은 그날그날의 생각이나 사건, 느낌, 장소 같은 것에 의해 다르게 움직이고 발화한다. 심지어 방금 경험한 현재도 잠시 후엔 준비된 과거이자 기억으로만 떠올릴 수 있기도 하고. 이런 의미에서 나의 작업에 다양한 기억의 파편이 존재해온 것 같다.

작가로서 무엇을 회의하나?
세상이 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