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의 방대한 작품 세계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수수께끼의 사진

2021-12-26T23:17:13+00:002021.12.27|FEATURE, 컬처|

정제된 하이퍼리얼리즘을 통해 패션 사진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진가.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의 방대한 작품 세계가 새로 출간된 책 <당나귀 남자와 다른 이야기들: 에디토리얼 워크 볼륨 1>에 유려하게 펼쳐졌다. 

1998년 매거진에 실린 핑크색 헤어의 모델 케이트 모스.

자신이 모델인 캘빈 클라인 옥외 광고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케이트 모스. 1999년 <Süddeutsche Zeitung> 매거진에 실린 사진.

회색 벽돌로 둘러싸인 런던의 한 스튜디오. 사진가 유르겐 텔러는 긴 목제 테이블에 앉아 그의 새로운 사진집 <당나귀 남자와 다른 이야기들: 에디토리얼 워크 볼륨 1(Donkey Man and Other Stories: Editorial Works Volume 1>을 넘겨보고 있다. 책에 수록된 여러 작업 중에서도 그가 특히나 각별히 생각하는 사진 시리즈가 있다. 바로 2017년 <Pop> 매거진에 등장한 ‘Enjoy Your Life, Junior!’ 작업이다. 이 작업의 출발지는 텔러가 유년 시절을 보낸 독일 바이에른주의 작은 마을, 부벤로이트. 이곳에 사는 예닐곱 살 아이들은 학교 과제를 위해 핑크색 헤어의 케이트 모스 초상, 하얀 벽을 배경으로 촬영한 마크 제이콥스의 광고 캠페인 등 텔러의 아이코닉한 사진들을 모아 마치 콜라주하듯 이어 붙였다. 텔러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아이들은 그의 어머니를 직접 인터뷰하며 과제를 완성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텔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보자는 생각이 번쩍 들었죠.” 텔러는 당시 잡혀 있던 모든 스케줄을 연기시킨 후 독일로 향했다. 아이들을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 텔러는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중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며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텔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싱긋 웃으며 그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는 당시의 영상 인터뷰를 돌려보며 이런 말도 했다. “정말 마법 같았죠. 이 작은 친구들이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영상의 순간순간을 포착한 스크린 샷들에는 텔러를 향한 아이들의 말이 담겨 있기도 했다. 텔러는 그 말들을 노래 부르듯 큰소리로, 또는 마치 침대맡에서 동화를 들려주듯 읽었다. “유르겐 텔러는 아주 특별한 것들을 생각해내요. 다른 사진가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것들이죠.” “저는 그가 우리 집에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유르겐 텔러는 수수께끼 같은 것을 원해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아름다운 것을 원할 뿐이죠.”

정형화된 아름다움의 상투성을 피하는 것, 다시 말해 ‘수수께끼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텔러의 커리어 전체를 아주 잘 설명한다. 젊은 사진작가나 예술가 세대에게 일종의 이정표가 되어준 그의 커리어는 30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 1990년대 텔러는 고예산을 들인 화려한 콘셉트, 과도한 포토샵을 피하고 한층 정제된 하이퍼리얼리즘을 선호하는 등 새로운 종류의 패션 에디토리얼을 개척했다. 동시에 그는 브래드 피트, 킴 카다시안, 카니예 웨스트와 같은 이들을 단순히 셀레브리티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고 일상 속 한 사람으로 포착하곤 했다. 그 결과 텔러는 그만의 독보적인 장르를 구축했고, 패션 매거진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리는 사진가 중 하나가 되었다.

600장이 넘는 사진이 수록된 <당나귀 남자와 다른 이야기들: 에디토리얼 워크 볼륨 1>은 텔러의 출간물 중 가장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에는 매거진 패션 화보는 물론 그의 아버지, 아내이자 창조적 협업자인 도빌레 드리지테(Dovile Drizyte), 그리고 젊은 시절 사진 등 텔러의 내밀한 개인 작업이 소개되기도 한다. 그가 참여한 첫 매거진 에디토리얼 중 하나는 <i-D>를 위해 촬영한 ‘루마니아 1990(Romania 1990)’ 이다. 루마니아 혁명 직후였던 1989년, 텔러는 그의 여자친구였던 스타일리스트이자 사진가 베네시아 스콧(Venetia Scott)과 루마니아를 여행하며 격동의 시간을 지나온 시민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사람들이 정말 놀랍도록 따뜻하고 친절했어요. 우리가 당시 그곳을 여행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고요.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지만 그곳 거리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었어요. 대체 어떻게 소통했던 걸까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일이 성사됐죠.”

1991년 ‘루마니아 1990’의 첫 발행 이후 9년이 지난 시점부터 텔러의 커리어는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브 생 로랑, 마크 제이콥스를 포함한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 캠페인을 여럿 찍던 시기다. 이 시기에 텔러는 캐스팅을 위해 그의 스튜디오에 찾아온 젊은 모델 몇백 명의 사진을 찍어 담은 전설적인 책 <Go-Sees>를 출간했다. 그는 케이트 모스를 포함하여 훗날 그로 인해 유명해진 모델들과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1999년에는 <쥐트도이체 차이퉁> 매거진의 취재를 위해 텔러와 모스는 며칠을 함께하기도 했다. 뉴욕에 있는 모스의 아파트에 방문한 그는 캘빈 클라인 광고가 있는 거리로 가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그때 모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신이 모델인 CK 광고 사진 앞에 당신이 서 있는 장면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사실 거리에서 그 누구도 모스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명성이 가장 드높을 때였는데 말이죠.”

모델 다리아 워보위로, 2020년 매거진에 실린 에디토리얼 ‘I Love Paris’의 사진.

이후 텔러는 2008년 <더블유> 화보 촬영차 틸다 스윈턴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맨해튼의 여러 장소를 떠도는 스윈턴의 모습을 담았다. 바버라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오래된 은행 안에서,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의 네온 조각 앞에서 손과 발을 모두 바닥에 댄 모습 등을 포착했다. “우리는 틸다에게 부유한 아트 컬렉터가 미치광이가 되어가는 역할을 해주길 요청했죠. 당시 화보는 예술과 패션을 융합한 첫 사례로 기억될 것 같아요. 지금은 모든 것이 예술이고 패션이지만요.” 텔러는 조만간 <당나귀 남자와 다른 이야기들: 에디토리얼 워크 볼륨 1>의 후속작이 출간될 것이라 말한다. 후속작에는 패션에 중점을 둔 사진이 더 많이 포함될 예정이다. 종종 아름다운 것들을 무질서하게 모아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책에 대해 텔러에게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내러티브 혹은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모든 것은 결국 호기심이죠. 호기심이 있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거예요. 삶은 소중하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모든 것을 지루하거나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위험을 감수하고 차가운 물에 뛰어들 수도 있어요. 그게 스토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