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r Live의 어떤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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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지난 시간을 게워내고, 휘갈겨 쓴 구깃구깃한 편지는 다시 반듯하게 펼치며, Dpr Live의 첫 정규 앨범 <Is Anybody Out There?>가 세상에 나왔다.

화이트 재킷은 s.e.p, 귀고리는 크롬하츠 제품.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난 33일 첫 정규 앨범 <Is Anybody Out There?>가 발매됐다. 국내 매체와는 극히 드물게 인터뷰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당신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솔직히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 앨범, 자신 있구나?’ 하하. 자신 있는 것을 떠나 굉장히 후련하다. 2017년 두 번째 EP <Her>를 발매한 이후 참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당시 슬럼프를 극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숙제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마냥 주저앉아 우울해하던 때도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슬럼프를 극복해가는 여정을 음악적으로 그려보자고 마음먹게 된 것 같다. 내가 과연 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극복한 슬럼프가 타인에게 좋은 메시지로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있었지. 지금은 여러 억압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기분이다. 한없이 개운하고 후련하다!

지독한 슬럼프였다니 솔직히 의외다. 2017년 ‘Know Me’로 정식 데뷔한 이후 좀처럼 리스너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했다. 두 장의 EP 앨범 <Coming To You Live>와 <Her>에 대한 힙합 신의 평가가 후했고, 당신에게는 언제나 ‘기대주’라는 수식이 따라다니지 않 나? 불현듯 과부하가 찾아온 것 같다. 주변에서 ‘잘한다’고 치켜세워주면 필연적으로 완벽주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는데, 나는 갈수록 불행해지는 거다. 스스로 더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그릇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 날에는 엄마에게 이런 전화가 왔다. ‘다빈아, 네가 <쇼미더머니>에 안 나갈 것쯤은 알고 있지만 신곡이라도 발매해줘. 팬들이 너무 기다리는 것 같아.’ 나를 향한 기대가 있기에 건네는 말이었지만, 이런 기대가 쌓이고 쌓여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음… 그런데 이건 슬럼프가 찾아오기까지 겪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또 무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나? 과거 미처 해결하지 못한 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괌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에서 괌으로 떠난 그날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거다. 왼손에는 비행기에서 나눠준 떡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엄마의 가운뎃손가락을 감싸 쥔 채 낯선 타지에 도착했다.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에 적응해야 했다. 수업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랫배를 부여잡고 발만 동동 굴렀고, 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깔깔 웃으며 놀렸다. 부모님이 주머니를 탈탈 털어 급식을 사 먹으라고 75센트를 쥐여주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벽에 밀쳐지고 어김없이 돈을 빼앗겼다. 그러다 보면 정말 많은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개같이’ 일해서 마련해준 돈인데 너무 허탈하게 빼앗기고 마니까. 유년 시절에는 항상 자존감이 낮았고 동시에 자기 학대가 심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만큼은 오히려 밝은 척, 괜찮은 척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후 성인이 되고, 군대에 가고, 음악을 시작했지만 유년 시절의 기억이 항상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작업 하면서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오랜 짐을 하나씩 풀어가기로 했다. 아주 복합적인 이유로 굳게 다져진 슬럼프를 해결하는 나만의 과정이었다.

콤플렉스가 많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와 같은 것 아닌가? 예전에는 콤플렉스가 많다는 사실이 단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누구보다 많이 아파봤고 깊은 상처를 가져 봤기에 알게 모르게 엄청난 공감 능력이 생긴 것 같다. 굳이 타인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의 슬픔이 느껴지고, 혹은 상대가 미소 지으면 내 마음까지 환해진다. 말로 오롯이 설명하기 어려운 예민함이 생겨버린 거다. 이런 감성이 음악에 잘 녹아들면 세부적인 디테일이 많은, 혹은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순 없지만 가슴을 통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주파수가 녹아든 음악이 탄생하는 거겠지. 아픔에서 빚어지는 절대적인 깊이가 있다고 생각한 다. 진짜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어찌 보면 상처투성이였던 유년 시절이 음악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다.

셔츠는 챈스챈스 제품,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돌이켜보면 한국 래퍼들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늘 화가 난 듯 보였고,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파이터’ 같다는 인상이 있었다. 반면 당신의 음악에서는 넌지시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가 읽히곤 했다. 나도 가끔 파이터로 나설 때가 있다(웃음). 누군가의 편견에 구부러지지 않고 나만의 신념을 드러내고 싶을 때는 단단하고 공격적인 랩을 내뱉었다. 동시에 내 음악에 위로가 담겼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특히 이번 앨범을 여는 두 트랙인 ‘Here Goes Nothing’과 ‘Geronimo!’에서는 시련을 딛고 나아가면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올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상승’의 주파수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음악에 담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음악을 듣고 단지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두 트랙을 작업할 당시에 가장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긴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곧 월드 투어를 돌게 될 거야’, ‘어딜 가든 사람들이 네가 쓴 ‘Martini Blue’를 따라 불러’, ‘다빈아, 엄마가 며칠 전에 회사에 갔는데 사람들이 네 얘기를 하더라’ 등등. 주변 사람들은 나로 인해 행복해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외롭다고 말할 수 없었고, 결국 입을 닫게 되었다. 하필 당시에 한국에 있는 가수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그런 사건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얼마나 외로울까? 겉으로 미소 짓고 있지만 내면에는 얼마나 큰 아픔이 자리할까?’ 누구나 집에 돌아가면 내면 깊숙이 자리한 슬픈 구멍이 고개를 내밀기 마련이니까. 그런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누구도 혼자이지 않다는 느낌을 안겨주고 싶기도 했다.

당신의 음악에는 유독 가족이 자주 소환된다. 이번 앨범의 세 번째 트랙인 ‘To Whoever’에서도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괌으로 이주한 이야기를 경유해,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던 당시를 덤덤하게 그려간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작은 아기를 무슨 수로든 잘 살 수 있게, 죽지 않게 사랑으로 보살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다. 부모님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나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해주려 애쓰셨다. 완전히 ‘아들 바보’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갑작스레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실에 누워 있던 때는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히어로 였으니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의 얼굴에서 읽힌 불확실한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아버지가 수술실로 향하는 순간을 배웅했고, 다행히 아버지는 진짜 히어로처럼 살아 돌아오셨다. 지금 아버지는 단지 배에 커다란 상처가 있는, 아주 건강한 중년 남자다. 아마 내가 이런 것에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크게 넘어져도, 반드시 다시 일어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으며 죽은 후에 어디로 향하는지, 즉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방금 말한 아버지의 투병 시절부터였나? 이번 앨범에서도 이 같은 질문을 하는 트랙이 보였다. 앨범을 닫는 마지막 트랙인 ‘No Rescue Needed’에서 오랜 고민에 대한 나름의 결론에 다다른 듯 보였다. 맞다.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계실 때부터 죽음 이후의 시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만약 아버지가 이대로 생을 마감 한다면 아버지란 존재 자체가 일순 사라져버린다고? 그건 아닐 텐데? 이런 질문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물론 답이 없는 질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고 죽은 후에 어디로 향할지 무슨 수로 알겠나. 단지 ‘No Rescue Needed’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연인이든 친구든 그것도 아니면 자기 자신과 열렬히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전부이지 않을까?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혼자 남겨지는 것,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지난날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사랑 덕분이었다. 개인 적으로 가장 아팠던 순간에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준 연인이 있었고,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연인에게서 무작정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태도도 마냥 건강하지만은 않다. 자기애를 갖고 있지 않는 상대를 만날 수도 있고, 혹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삐뚤 어진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 같다. 자기 학대를 멈추고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비로소 남들과 진정으로 교류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셔츠는 더그레이티스트 제품,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확실히 이번 앨범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슬럼프, 가족, 사랑을 경유해 앨범 후반부의 ‘Legacy’에서는 한국 힙합 신에 제법 깊숙한 ‘훅’을 꽂는 이야기를 전한다. 개인적으로 ‘가사에서 제발 총 빼’라는 가사를 듣곤 속이 다 시원했다. 멋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 한국 힙합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종 묻는데, 우선 나는 너무 좋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스토리를 공유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 다만 일차원적으로 남들이 하니까, 혹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눈멀어서 특정 스타일을 좇고 따라 하는 것은 진짜 멋없는 것 같다. 가끔 중학생 친구들에게서 DM이 온다. ‘형, 너무 사랑하고요, 제 노래 딱 한 번만 들어주면 소원이 없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안 들을 수 있겠나(웃음). 그런데 막상 음악을 재생하면 천편일률적으로 트랩 비트가 흐르다가 대뜸 ‘Look at my gun!’이라고 외친다. 이런 가사를 보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거다. 각자의 삶과 경험이 다른 만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물론 어린 친구만을 탓할 수도 없다. 그 친구는 아마 어릴 때부터 그런 가사를 들어왔고, 그게 멋있는 거라 믿었을 테니까. ‘Legacy’에서는 이런 문제를 꼬집어주고 싶었다. 솔직히 자극 좀 받았으면 좋겠다.

힙합이 어쨌든 이 땅에서 시작된 음악이 아닌 까닭에 한국에서 힙합 음악을 한다는 것에 어떤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 전혀. 나는 한국 힙합에 자부심을 느낀다. 물론 내가 처음 이 신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앞세대가 한국에서도 힙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멋지게 보여줬고, 나 또한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부심이 드는 것 같다. 지역을 떠나 결국 힙합의 본질은 ‘Whats your story?’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런 말 도 있지 않나. 네가 갱스터가 아니라면 갱스터인 척하지 말고, 비즈니스맨이라면 비즈니스를 하라. 동양인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하루하루의 스토리텔링을 펼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자체만으로 힙합스럽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속한 DPR 크루의 행보를 지켜보면, 한국의 음악 산업에서 한발 비켜나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이 있다. 프로듀싱과 뮤직비디오 제작, 의상 스타일링까지 전부 크루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데, 그 결과물이 상당히 감각적이다. 단순한 음악 레이블이라기보다 아티스트 콜렉티브의 형태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글쎄. 비즈니스만 했다면 공장처럼 음반을 찍어냈을 테고, 예술적으로만 접근했다면 아직도 작업실에서 음원 뜯어고치고 있었을 거다. 비즈니스와 예술 사이를 널뛰기 하듯 오간 것 같다. 다만 ‘상상력만큼은 타협하지 말자’ 는 신념만큼은 크루끼리 공유했다. 쉽게 타협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최대한 밀어붙였기에 자연스레 완성도도 높아졌을 거다. 디피알 크루는 음악적 동료이기 전에 정말, 그냥 친구들이다. 영상을 감독하는 이안은 11년 넘게 알고 지낸 의형제나 다름없고,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크림은 과거 인터넷에서 어렵게 비트를 구하던 시절 직접 수소문해 인연을 맺은 사이다. 처음 크림을 만나기로 한 날엔 왠지 빈손으로 찾아가는 것이 성의 없이 비칠까봐 그의 비트를 소스로 노래까지 만들었다(웃음). 그게 ‘갈증’이란 제목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2017년 음원 데뷔곡 ‘Know Me’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난 래퍼이기 전에 예술가야’.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갖고 있나? ‘난 예술가다’라는 거창한 선언이었다기보다 나를 틀에 가두려 들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웠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나만의 주파수에 맞춰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리듬, 플로, 가사 등의 정형화된 틀에 이를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누군가는 나를 두고 예술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표현에 있어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태도로 보인다. 그럼 음악으로 어디까지 가고 싶은가? 우주 끝까지(웃음). 한계를 두지 않는다면, 이왕이면 우주 끝까지 가야지.

데님 아우터는 쿠시코크, 베스트는 챈스챈스 제품, 팬츠와 슈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당신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살려고 한다. 작년 괌에 여행 갔을 때는 처음으로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했다. 마침 이번 앨범에 수록한 ‘Geronimo!’ 라는 곡을 만들던 중이었다. 제로니모는 인디언 최고의 전사였지만 말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서사를 떠나 내가 몸으로 기억하는 제로니모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감정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 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친구들이 늘 다이빙 직전 ‘제로니모!’라고 외치며 바다에 몸을 던지곤 했거든. 아주 오래전 부터 고소공포증을 앓았지만, 왠지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하면 이런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친구와 무작정 스카이다이빙 체험소로 향했고 즉흥적으로 결제해 그날 바로 뛰어내렸다.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오르던 순간만 하더라도 속으로 ‘Fuck It’을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르겠다(웃음). 막상 스카이다이빙을 마친 후에는 너무 후련했다. 새로운 것에 눈이 떠진 기분이 들었는데, 사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스스로 충만해지지 않나. ‘나 이런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네?’라며 자신을 재발견하는 계기도 되고.

지금 당신의 손에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은 두 장의 EP와 한 장의 정규 앨범이 쥐어져 있다. 현재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껴지나? 모르겠다. 마음만은 언제나 신인 같다. 앨범을 발매하고 나면 텅 빈 백지상태가 된다. ‘지금 이걸 했으니 다음엔 이걸 해야 해’라는 마음이라기보다 앞으로 어떤 여정을 그려나갈지를 기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하나의 작업이 끝나면 나는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에고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물론 무대에 설 땐 다르다. 과거엔 200명 앞에서 노래했다면 이제는 2000명 앞에 서는 일도 잦아졌다. 이럴 땐 내가 사람들의 눈에 점차 완성되어가는 아티스트로 비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신인과 완성된 뮤지션 사이를 진자 운동하듯 오가는 중인 것 같다.

지금 당신이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가? 부모님이 더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엄마, 아빠가 원하는 꿈을 좇고 결국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고 싶다. 별것 없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김신애
스타일리스트
조은별
헤어&메이크업
채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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