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테일러링

W

모던하고 현대적인 품새로 봄을 맞이하는 슈트들.

품이 넉넉한 더블브레스트 슈트는 김서룡 옴므, 홀스빗 장식 로퍼는 구찌 제품.

얼마 전 ‘킹덤’이란 버버리 데뷔 쇼를 치른 리카르도 티시는 당시 ‘영국적인 방식’에 대해 사유하고 골몰한 결과를 보여줬다. “우린 한동안 새빌로(Savile Row) 테일러링을 잊고 있었어요.” 새빌로는 런던의 고급 양복점이 늘어선 거리이자, 비스포크 슈트의 발상지로 영국 왕실과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런던 패션 스쿨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고, 수년이 지나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에 보내는 경의’로 컬렉션을 채웠다. 가까이서 만져본 티시의 그레이 슈트는 아주 섬세했다.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소재, 날렵한 재단과 슈즈의 톤까지 맞춘 완벽주의자 면모는 과연 티시다웠다. 그렇다고 티시의 버버리 슈트가 점잖고 말쑥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현대 남성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모던한 실루엣, 독특한 버튼 장치 같은 실험적인 세부까지 숙고해 배려한 옷이었다. 스트리트 웨어가 패션계를 주름잡는 동안 테일러링은 낡고 구식의 것으로 치부됐다(서울에 10년 전쯤부터 유행처럼 생겨난 테일러 숍은 우후죽순한 모양 때문에 그 힘을 잃었다). 그런데 최근 스트리트 패션에 질린 디자이너들이 테일러링으로 눈을 돌리는 모양새다.

회색 줄무늬 슈트, 펑키한 티셔츠, 두툼한 형태의 스니커즈는 베르사체 제품.

이호진이 입은 핀 스트라이프 슈트, 정용수가 입은 그레이색 슈트와 우산, 벨트는 모두 버버리 제품.

디올 맨 데뷔로 이목을 끈 킴 존스는 정갈하면서도 힘 있는 슈트를 선보였고, 감도 넘치는 파스텔 색상, 줄무늬, 약간의 트위스트를 준 버튼 장식으로 근사한 변주를 이끌어냈다. 특히나 윤안과 매튜 윌리엄스와 협업한 CD 이니셜 버클 캡, 벨트, 남성용 새들백 등의 액세서리 라인은 젊은이들의 눈길을 끌 것이 분명했다. 164년 역사를 가진 LVMH 그룹에 최초로 입성한 미국계 흑인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는 루이 비통 런웨이를 ‘오즈의 마법사ʼ를 주제로 한 무지개 길로 바꿔버렸다.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뜻밖의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에 빗대 연출했다고 밝힌 그는 하나의 빛(하얀 색), 빛의 굴절로 생기는 무지개, 폭발적인 타이다이 피스의 순서로 풍부한 리서치와 컬렉션의 톱니바퀴를 맞췄다. 빛 부분에 해당 하는 것은 울 모헤어 소재의 더블 재킷과 더블 플리츠 팬츠를 매치한 첫 번째 슈트로 시작한 16벌의 흰색 룩들. 이 부분은 최근 힙스터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와이드 팬츠부터 슬림한 팬츠까지 다양한 핏으로 구성되었고, 아블로가 ‘입는 액세서리’라고 표현한 슈트 위에 덧입는 가죽 하네스 덕에 룩이 더욱 트렌디해졌다. 이쯤 하면 디자이너가 모두 바뀐 세 럭셔리 하우스 남성복의 키가 ‘액세서리’임을 알 수 있다. 버버리의 클래식한 슈트의 점잖음을 씻어주는 마조히스트적 벨트, 디올의 스트리트풍 액세서리, 루이 비통의 입는 액세서리 ‘액세 사모포시스’와 메탈릭한 키폴 등 스타일링에 힘과 재미를 실어주고 매출을 견인할 아이템말이다. 최고의 남성복 전문가들이 특별한 액세서리를 통해 젊은 이미지를 심고자 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화려한 체크 패턴 재킷과 팬츠는 꼼데가르송 옴므 플러스, 볼드한 반지는 모두 지예 신, 뱅글은 구찌 제품.

다시 컬렉션 얘기로 돌아와서 특별한 세부는 라프 시몬스의 캘빈 클라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한 경의를 모토로 삼은 그는 전통적인 프레피 룩을 다양하게 리바이벌했고, 오버사이즈 재킷에 다 이버복에서 영감 받은 듯한 팬츠, 학사모 같은 특이한 액세서리를 더 하기도 했다. 한편 에르메네질도 제냐, 드리스 반 노튼 같은 테일러들은 낙천적이고 현대적으로 변주한 슈트를 제안했다. 쿠튀르처럼 세심하게 공들인 옷도 눈에 띄었다. 톰 브라운은 사이즈를 거대하게 키운 전위적인 룩을, 알렉산더 매퀸은 숨 막힐 정도로 정교한 핀 스트라이프와 비즈 장식 슈트를, 아방가르드한 쿠튀리에 존 갈리아노와 꼼데 가르송은 셔링이나 페더 같은 여성스러운 장식으로 성별 장벽을 두드리기도 했다.

투버튼 슈트, 모노그램 베스트, 반짝이는 광택의 클리퍼 슈즈는 모두 루이 비통 제품.

고딕풍 검은색 슈트는 발렌시아가, 목걸이는 다미아니 제품.

디자이너들이 이렇게 현대적인 세련됨과 우아함에 대해 고심한다면 이제 후디 대신 슈트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리얼웨이에서 현실적으로 소화 가능한 지점은? 지금 나열하는 스타들의 룩을 찾아본다면 어느 정도 타협 지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킴 존스 의 디올 맨 데뷔 컬렉션을 가장 먼저 입은 이는 ‘가장 옷을 잘 입는ʼ이란 수식어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래퍼 에이셉 라키였다. 크림에 가까운 아주 옅은 회색 슈트 속에 디올 모노그램 메시 톱을 매치한 그는 킴 존스가 묘사하는 디올 맨의 소년들, 그 소년들의 우상처럼 썩 잘 어울 렸고, 딱딱한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은 것도 매우 적절했다. 에이셉 라키는 최근 그래미 시상식에서 로에베의 오버사이즈 핑크색 슈트를 입었는데, 봄에 아주 적절한 연출이 될 것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티모시 샬라메의 가장 인상적인 룩은 골든 글로브에서 입은 루이 비통 커스텀 룩이다. 검은색 셔츠에 테일러링 팬츠, 엠브로이더리 하네스를 입은 모습은 청춘 아이콘이 된 무비 스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또, 할리우드 필름 어워드나 BFI에서 입은 루이 비통과 알렉산더 매퀸의 슈트 차림 또한 우아한 슈트의 교과서로 참고할 만하다.

터틀넥 톱, 러플 장식 셔츠, 울 소재 재킷, 로고 장식 팬츠 모두 프라다 제품.

정용수가 입은 줄무늬 배색 슈트, 스니커즈, 이호진이 입은 핑크색 슈트, 하이톱 스니커즈는 모두 디올 맨 제품

그리고 패션 팬이라면 지금 얘기하는 인물을 기억하길. 바로 LVMH 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자 리모와의 CEO1992년생인 알렉산드르 아르노다. 리모와를 오프화이트, 펜디 등과 협업하고, 로고를 바꿔 아주 힙합 브랜드로 리부트한 알렉산드르는 최근 패션계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 그는 평소 남색 또는 회색의 담백한 슈트를 즐겨 입는데(아마도 디올 맨) 그룹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는 성실하고, 젊고 스마트한 CEO의 이미지에 너무나 부합한달까. 그의 스타일이 심심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평소 니고, 무라카미 다카시, 벨라 하디드 등 동시대 최고의 패션 인텔리들과 교류하며,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그이니 감각적인 오피스룩이 필요하다면 그의 룩을 믿어볼 것.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역시나 방탄소년단이다. 이제 그래미 시상식에 ‘최초로 입성한 한국 가수’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달게 된 그들은 레드카펫에서 김서룡 옴므와 제이백 쿠튀르의 슈트를 입었다. 한국 남성복 신에서 김서룡 옴므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또, 10년이 안 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제이백 쿠튀르는 어떤지. 레드 카펫용 포멀한 슈트 말고도 부티크에서 테일러링에 기반한 우아한 컬렉션을 만날 수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서울에서 섬세한 비스 포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남성복, 특히나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여유롭고 낙낙한 김서룡 옴므의 슈트는 봄여름에 최적의 슈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우아하고 멋있는 남성복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 트렌드의 부상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패션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이준경
모델
정용수, 이호진
헤어
이에녹
메이크업
이나겸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