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 자신을 쏟아 보여줄 날을 기다리며 팽팽하게 몸을 단련하고 있는 사람들.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둔 국가대표 선수들의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감을 더블유 스튜디오에서 확인했다.
D-68일. 본격적인 겨울에 들어선데다 다양한 뉴스와 매체가 매일 평창동계올림픽 준비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바람에 대회가 당장 시작되어도 이상할 것 없이 느껴지는 12월 초의 일요일. 하지만 최상의 컨디션을 끌어올려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은 한참 더 가야 하는 먼 길일 터였다. 충북 진천의 선수촌에서 합숙 중인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더블유와의 촬영을 위해 꿀 같은 주말 시간을 내 서울로 와서 모이는 길도 짧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훈련하는 빙상장의 얼음 위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이들이나, 삼성동의 대형 스튜디오 세트장에 세운 커다란 얼음 덩어리 앞에서 취하는 포즈는 사뭇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합이 들어간 눈빛에 대한 사진가의 주문만은 바로 통해서, 모니터를 뚫고 나올 듯 날카롭고 강렬했다. 촬영하는 동안 스튜디오 곳곳에서 시선을 빼앗은 건 하키 선수들의 스틱이며 보호 장구, 날을 감싼 쇼트트랙 선수의 스케이트 같은 장비들. 가죽과 나무 같은 소재는 존경받는 노인처럼 근사하게 낡은 주름과 상처로 가득했으며, 꽤나 때를 탄 케이스에는 당연하게도 태극 마크가 달려 있어서 국가대표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선명하게 시각화했다. 나라를 상징하는 저 마크를 달고서 혹은 달기 위해 선수들이 보내왔을, 그리고 보내고 있을 시간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68일 뒤에 17일 동안 열리는 그 대회가 수면에 드러난 일각이라면 그 아래 빙산처럼 거대하게 쌓여왔을 4년, 8년 혹은 일생이라는 시간.
쇼트트랙 선수들 차례가 먼저였다. 절대 기록보다는 상대 선수를 견제하는 능력과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하는 순발력이 중요한, 막판에 쏟아내는 불꽃 같은 스퍼트가 매력인 경기, 그리고 한국이 전통적으로 강한 동계 스포츠 종목이다.
최민정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 현재 여자 쇼트트랙 500m, 1000m, 1500m 세계 랭킹 1위.
“변수가 많기 때문에 결승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쇼트트랙의 매력인 것 같아요.” 여자 세계 랭킹 1위인 최민정 선수는 다른 선수들로부터 1등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발전이 목표이기 때문에 요즘의 훈련이 스스로와의 경쟁에 가깝다고 말한다. 생활할 때와 경기할 때의 모습이 달라서 시합 때는 로봇이나 기계 같다는 말까지 듣는다며 웃는 최민정의 말투는 선선하고 담백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상대 선수와의 기싸움뿐 아니라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다.
심석희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 소치 동계올림픽 여자 1500m 은메달,1000m 동메달, 계주 금메달 획득.
국가대표 팀의 막내였던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계주 역전의 주인공 심석희 선수는 새벽에 스케이팅, 오후에는 체력 훈련으로 하루 8시간 정도를 운동에 쏟고 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4년 전의 경험을 토대로 더 철저하게 평창을 준비하고 있다고. 통제된 생활, 반복되는 루틴 속에 지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런 일상의 규칙이 자신을 지탱해준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시작하는 것처럼, 몸에 익은 습관으로 편안함을 지키는 일 말이다.“하고 싶은 것도 많고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 대한 목표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같아요.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나고부터 계속 견디고, 견뎌지다 보니까 지금은 오히려 이 견뎌내는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된 것 같구요.”
개인 종목인 쇼트트랙 선수들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느낌이었다면 , 단체 경기인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촬영장에서도 같이 장난을 치고 사진 속 모습에 대해 농담을 던지며 자연스럽게 팀워크를 드러내는 분위기였다.
한국은 아이스하키에서 전통적으로 강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최근 대표팀의 기세는 심상치 않다. 아이스하키 국제 대회는 실력에 따라 리그가 나뉘어 운영되는데, 지난해 봄부터 가장 뛰어난 16개국으로 구성된 ‘톱 디비전 ’ 에 속하게 된 것이다. 세계 최강 실력을 가진 팀들과 겨루는 경험을 통해 뭔가 배우겠다는 강한 의지 , 그리고 실력이 상승하고 있는 팀에 속해 있다는 좋은 기운이 선수들에게서도 느껴졌다. 스피드와 득점이 함께 있는 아이스하키는 스포츠의 다면적 재미가 풍부한 경기지만, 선수들은 그야말로 ‘극한 직업 ’이다. 얼굴이 찢어지거나 치아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지는 일, 스케이트 날에 밟히고 베어 혈관이 끊어지고 피투성이가 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다.
박우상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주장. 등번호 6번.
주장인 박우상 선수는 아이스하키가 이런 부상과 필연적으로 함께 가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수술을 열한 차례 거친 그의 얼굴에는 백 바늘이 넘게 꿰맨 자국이 있다. “웬만큼 찢어지거나 하면 마취도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꿰맨 다음 시합에 다시 들어가곤 해요.”대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선수단의 공항 입국 장면에서 왜 그렇게들 멍이 들고 깁스를 한 모습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김원중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공격수, 등번호 8번.
잘생긴 얼굴로 현장 스태프들에게 배우 같다는 평을 많이 받은 김원중 선수는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대해 동료끼리의 끈끈한 우정을 꼽는다. “종목 특성상 보디 체킹이 있잖아요 . 상대 선수가 우리 동료를 체킹해서 넘어뜨리거나 다치게 하면 에너지가 더 올라가서 투지를 발휘하게 돼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0 년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하계올림픽을 취재해 <시드니!> 를 썼다. 책에서 인상적인 점은 도쿄로 돌아온 그가 바로 비디오로 녹화한 올림픽 중계를 봤더니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는 내용이다. “똑같은 경기를 다른 관점에서 봤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애초에 전혀 다른 경기 같아 보였다. 그래서 비디오는 조금 보다가 말았다. 그런 걸 보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될 것 같았다.”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의 핵심도, 어쩌면 하루키와 같았다.
조민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공격수. 등번호 4번.
“TV를 통해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아이스하키는 소리의 경기거든요. 선수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소리, 펜스에 몸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 퍽을 패스하거나 슛을 쏠 때의 소리…. ” 박진감 넘치는 아이스하키 경기의 에너지는 직관을 통해서만 진짜를 볼 수 있다는 포워드 조민호 선수의 얘기다. 어쩌면 하루키가 지구 반대편 남반구까지 날아가서 보고 쓴 바와 같이, 올림픽은 자본과 미디어가 거대하게 투입된 복합적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또 이렇게 쓰기도 했다. “환상의 실재성과 실재의 환상성이 어딘가에서 교차한다.” UN에서 평창올림픽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는 한국만의 슬픈 풍경 속에 있지만, 인천공항에서 강릉까지 바로 KTX를 타고 가서 경기를 볼 수 있는 꿈 같은 일도 벌어진다. 이런 올림픽이 가장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진다. 그러니 2월 9일부터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때다. 선수들은 빙상 위에서 그리고 당신은, 응원하는 관중석에서.
더 많은 화보 컷은 더블유 1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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