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어렵고, 복잡하고, 비싸야만 패션일까? 거창한 디자인적 담론을 담고 있지 않아도, 단편적인 아이디어로 출발해 이합집산하는 재미있는 패션이 쏟아지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물건이 아니기에 더 매력적인, 패션 프로젝트 이야기.
Project, 한글 표기로는 프로젝트.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 혹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의 진행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개념. 즉, 남다른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수행하는 일시적으로 한정된 노력과 그 과정을 말한다.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비운을 겪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통해 영속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션의 논리다. 그런데 최근 패션계에서 이 정석과 대비되는 흥미로운 움직임이 출현하고 있다. 간단하지만 남들이 해본 적 없는 독특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고, 시즌을 거듭해 지속적으로 선보이기보다는 한시적으로, 혹은 영구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모이고 흩어지는 데 비교적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만나서 진행하고, 무엇보다도 계획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한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정적이기에 더 매력적인 프로젝트들이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패션계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패션 프로젝트로 탄생한 제품이 더욱 재미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의 아이디어에 있다. 한국 디자이너 중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적극 적인 스튜디오K의 디자이너 홍혜진은 모든 활동이 자신의 개인적인 ‘버킷 리스트’ 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스튜디오K의 정체성과는 별개로 기능성 아웃도어, 스포츠웨어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어 인터맥스와 패딩과 기능성 점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새로운 패턴에 대한 흥미는 건축 분야의 파사드 디자이너와 함께 인체를 풀 스캔해서 전에 없던 패턴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연결되었다. 이번 시즌에는 서핑을 좋아하는 배우 이기우의 소개로 래시가드 업체인 배럴과 함께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다. 형광색처럼 높은 채도를 쓰는 스포츠웨어의 전형적인 디자인을 배제하고 중간 채도 미만으로 컬러 블록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보통 컬래버레이션이라고 부르는, 패션계에서 이미 익숙해진 마케팅인 협업의 경우도 좀 더 발전된 프로젝트의 양상을 띤다. 디자이너 브랜드 노앙의 서브 레이블인 뉴키즈 노앙(Newkidz Nohant)은 작년에 크게 인기를 얻은 배우 유아인과의 티셔츠 프로젝트에 이에 올해는 배우 이천희와 이세희 형제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하이브로우와 함께 ‘파크’라는 타이틀의 피크닉 용품과 의상을 만들었다. 젊은 세대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 캠핑 문화가 오히려 환경을 해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보다 건강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캠핑을 즐기기 위한 제품들로 라인 업을 짰다. 기본적인 피크닉용 의상 외에도 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피크닉 박스, 휴대용 의자, 담요, 이동식 테이블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컬렉션이다.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문화적 의식 고취라는 코드까지 내장한 프로젝트는 유연한 소규모 디자이너들뿐만 아니라 패션 대기업도 주목하는 분야다. 신세계의 블루핏은 역시 한국의 패션 대기업인 코오롱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와 함께 양쪽 회사의 재고 의류를 활용해 새롭게 디자인한 한정 제품을 만드는 업사이클링 컬렉션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아이템별로 적게는 3점, 많게는 8점 정도의 한정판 의류로 선보이는 이 프로젝트는 제작된 수량이 라벨로 붙어 있어 소장가치도 높다. 협업, 의미, 수익.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최근에는 프로젝트 자체가 브랜드로 자리 잡는 역발상의 예까지 생겨났다. 알파벳 A부터 Z까지 연관된 단어를 주제로, 이에 맞는 오브제를 선보이는 프로젝트 브랜드인 잉크(EENK)가 대표적이다. B의 비니 (Beanie), C의 클러치(Clutch)로 시작해 진주를 니트 비니와 아크릴 클러치에 매치한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아이디어는 이호정, 지현정을 비롯한 SNS에 엄청난 팔로어를 몰고 다니는 모델들을 중심으로 실제 착용 샷이 돌면서 입소문을 탔고, 이어 C의 사이드 프로젝트인 캡(Cap)과 D의 달링(Darling, 반지) 으로 이어지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번 시즌에는 메탈과 인조진주 소재를 디자인에 활용한 E의 귀고리(Earring)와 F의 페도라(Fedora)가 출격을 앞두고 있다. 흔히 ‘찍찍이’라고 불리는 벨크로를 활용한 액세서리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하이데나이(Heidenei) 역시 잉크와 비슷하게 프로젝트 자체로 시작해 브랜드로 각광받고 있는 예다. 독일에서 각각 패션과 주얼리를 전공한 디자이너 배민영과 김재빈이 만나 벨크로를 재해석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여기서 가능성을 본 두 사람은 아예 프로젝트를 브랜드로 키워버렸다. 기본 가방에 카드지갑, 펜, 파우치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벨크로로 붙여 사용자의 필요와 미학에 맞춰 이리저리 바꾸는 ‘벨크로 잇’ 프로젝트는 앞으로 옷에도 적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SNS처럼 짧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에 익숙한 세대들은 시간을 들여야 의미를 체득하게 되는 것보다는 간결하면서도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패션에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곤 한다. 소비 기간은 짧지만 접근이 쉬우며 남다른 패션 프로젝트들이 앞으로 더욱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예상되는 이유다. 진지하고 고상한 패션 미학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토록 휴식 같은 대안 또한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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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