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샌더가 꿈꾼 질 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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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래 8년 만의 재컴백. ‘질 샌더의 질 샌더 컴백’이라는 아이러니는 그녀가 질 샌더를 떠날 때만큼이나 패션계에 소란스러운 이슈를 낳았다. 하지만 정작 기대와 불안이라는 풍랑의 중심에 선 질 샌더는 고요했다. 디자이너는 옷을 통해 말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처럼. 그 소용돌이 속에서 2013 S/S시즌 질 샌더 남성복 쇼를 통해 베일을 벗은 디자이너 질 샌더를 <W Korea>가 만났다.

06.22

PM 3:15 사전 자료 조사
미스 질 샌더, 2013 S/S시즌 질 샌더 남성복 쇼를 통한 재데뷔. 인터넷에 관련 검색어를 넣으니 <헤럴드 트리뷴>의 수지 멘키스 기사가 먼저 눈에 띈다. 질 샌더를 두고 큰 몸을 갖고도 힘 자랑하기 어려운 좁은 공간에 가둬진 ‘방 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적잖은 골수 팬을 거느린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프 시몬스의 그림자와 최신 스타 셀린의 피비 파일로라는 삼십대 디자이너와의 ‘비교’가 칠순에 이른 질 샌더 여사의 가장 험난한 어려움이 될 듯하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녀의 쇼를 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일.

PM 5:20 홍보 책임자와 통화
평소 안면이 있는 아시안 마켓의 홍보 담당자에게 약간의 소스를 얻을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라스, 질 샌더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컬렉션은 미리 보았겠죠? ”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아직 보지못했어요. 아마도 프레스들과 함께 쇼장에서 처음 보게 될 것 같아요. 그녀의 개인 비서를 통해 전해 받은 프레스 키트도 아주 현학적이고 시적이라서 실제 컬렉션을 봐야만 우리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토록 완벽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니 내일 쇼가 더욱 기대된다.

06.23

AM 9:15 질 샌더 맨 쇼장에 도착하다
서둘러 쇼장에 일찍 도착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프레스에게 그녀의 컴백에 대해 묻고 싶어서다. 이때 우연히도 질 샌더의 고향인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갈라 매거진 에디터 마커스 루프트가 등장했다. “SPA 브랜드가 대세인 시류에 유니클로와의 협업은 정말 성공적인 선택이었다는 얘기가 많은데, 하이패션 하우스로 돌아오는 선택이 옳다고 보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는 명민한 선택으로 늘 앞서갔습니다. 컴백에 대한 그녀의 선택은 나름의 분명한 확신이 있었을 거예요”라는 대답을 건넸다.

AM 9:25 일간지의 서평들
쇼가 가까워지자 쇼장 앞에서 컬렉션을 다룬 일간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질 샌더 컴백’이라는 큼직한 타이틀이 눈에 띈다.

AM 9:45 안나 델로 루소의 응원
차분하고 조용한 쇼장은 역시 질 샌더답다. 갑자기 플래시 세례에 뒤돌아보니 안나 델로 루소가 등장했다. “미스 안나. 오랜만에 남성복 쇼장에서 보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미스 질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예요. 그녀의 컴백을 응원해주고 싶었죠.” 이참에 질문 하나를 더했다. “그녀의 컴백이 하우스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리라 믿나요? ” “물론이죠. 하지만 우린 참을성 있게 두고 봐야 해요. 하루아침에 금송아지를 토해내라는 성급한 부담만 더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를 보여줄 거라고 믿어요.”

AM 9:55 백스테이지에 진입
입구가 오픈되자마자 쇼장인 3층으로 향했다. 혼란한 틈을 타 쇼 직전의 백스테이지 진입에 성공. 선발된 소수의 포토그래퍼와 헬퍼들 외엔 철저히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 및 모델들로 출입을 제한했다. 귀도 팔라우가 한창 헤어를 점검 중이며 이번엔 메이크업 아티스트 ‘팻’까지 합류했다. 와우, 페일한 메이크업과 흩트린 듯하지만 정확히 손질된 헤어를 한 소년 모델들이 런웨이에 선 순간이 기대된다.

AM 10:15 쇼장에 들어서다
10 꼬르소 꼬모의 수장 카를라 소차니가 풀 스커트와 큼직한 메탈 목걸이 차림으로 프런트 로에 앉아 있다. 하우스 입장에서는 그녀의 여동생 프랑카 소차니의 의견보다는 유명 멀티숍 오너인 카를라의 의견에 롤러코스터를 탈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질 여사의 컴백, 즉 라프가 떠난 이유는 상업적인 대차대조표에 별표를 못 채워준 예술 작품 탓이라는 얘기가 있으니 말이다. 바로 옆에 질 샌더 하우스의 한 스태프가 서 있다. “디자인팀의 스태프들과 라프와의 관계가 굉장히 친근했다고 들었어요. 질 여사와는 어떤가요?” “그녀는 오랜 경험이 있는 분이라 무엇을 해야 하고,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모든 지시는 조용하지만 정확했죠.”

AM 10:31 드디어 시작된 쇼
드디어 질 샌더 여사의 첫 룩이 등장했다. 길게 떨어지는 더블 버튼 롱 베스트는 슬림한 팬츠, 넓은 소매의 셔츠 등과 함께 정확한 비율로 제안되었다. 넓은 버뮤다 팬츠와 늘씬한 앵클 팬츠는 길이의 변주를 선보인 재킷과 맞아떨어졌고 말이다. 단순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한마디로 그녀의 장기인 아방가르드 미니멀이다. 특히 어두운 감색과 청아한 파랑을 오가는 다양한 블루 아이템들은 그래픽 프린트의 니트 룩과 멋진 조화를 이뤘다. 그러고 보니 ‘형식과 격식을 중요시하지만, 우발적이고 4차원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진화하는 질 샌더 맨’이라는 프레스 자료의 표현은 좀 간지럽지만, 나름 적절했다.

AM 10:39 질 샌더의 피날레 인사
모든 룩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휘파람과 환호, 박수 소리가 쇼장에 울려 퍼졌다. 잠시 모습을 비치며 피날레 인사를 건넨 그녀. 그렇다면 8년에 이르는 미스 질의 공백은 8분 남짓의 이번 캣워크 쇼로 충분히 메워졌는가. 적어도 쇼장의 분위기는 그랬다.

AM 10:45 질 샌더를 인터뷰하다
백스테이지에 모인 프레스와 바이어들 틈에서 그녀와 악수를 했다. 다음은 질 샌더 여사와의 미니 인터뷰.

더블유 코리아입니다. 컴백을 축하합니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짧은 여행 후 집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에요. 잠깐 떨어져 있었다고 해서 내 집이 더 이상 내 집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가장 눈여겨볼 만한 디자인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철저한 프로포션과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모던함이죠.

이번 남성복을 두고 다가오는 9월의 여성복 쇼를 상상해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특히 더블 버튼 여밈과 한 아이템의 다양한 활용성을 기억하세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안 팬들도 미스 질의 컴백에 관심과 기대가 커요.
유니클로와의 경험으로 여러분에 대해 굉장히 많이 알게 되었어요. 디지털화, 글로벌화된 아시안 마켓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습니다. 다시 한 번 제 쇼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미스 질과 인사를 나눈 뒤, 샴페인이 놓인 케이터링 테이블로 다가가는 카를라 소차니와 대화를 나눴다. “컬렉션은 어땠나요?” “아주 좋았어요. 역시 그녀다웠죠. 거의 없는 것과 딱 필요한 것만 있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정확히 안다고 해야 할까요. 프린트 아이템과 모노 아이템의 조화, 단순한 듯하지만 다양한 아이템들 말이에요. 전 정말 좋았어요.” 최고의 멀티숍 오너가 이런 평가를 했으니 적어도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컬렉션임은 확실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쇼를 치른 질 샌더 스태프들 사이에도 편안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흘렀다.

06.26

PM 4:00 쇼룸 방문
리시(Re-see)를 위해 질 샌더 쇼룸을 방문했다. 각국의 바이어들이 옷을 살피고 있고, 그들을 위한 미니 쇼도 진행 중이다. 그중 마리오스의 바이어와 얘기를 나누었다. “바잉이 만족스러운가요?” “네. 성공적이에요. 바이어 입장인 제겐 미스 질의 컴백이 너무 반가워요. 질 샌더 하우스는 지난 7, 8년간 경제적으로 부진을 겪었어요. 그래서 이번 컴백을 긍정적인 계기로 기대하고 있죠. ”

PM 4:10 질 샌더의 질 샌더
쇼룸을 둘러보았다. 다채로운 소재의 의상들이 펼쳐진다. 코튼 실크, 모헤어, 리넨, 울과 실크 혼방에 가죽까지,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고, 부드럽고, 탄력 있는 텍스쳐는 가까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섬세한 배려니까. 조금 뒤, 라스가 등장하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내부 반응은 어떤가요?” “우리는 불안을 가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내부적으로도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섬세하고 젊은 감성을 갖추고 있죠. 나아가 폭을 넓힌 듯한 느낌이랄까. 언뜻 보면 지난 쇼와 비슷해 보여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바이어들도 ‘룩은 좋은데 바잉하기 어렵다’에서 ‘룩도 좋고 바잉할 아이템이 많다’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PM 4:25 그녀를 다시 만나다
우연히 미스 질과 마주 쳤다. “쇼룸에 긍정적인 활기가 느껴지네요.” “네, 감사하게도 좋은 반응들이네요.” 이윽고 그녀는 옆의 카를라 소차니와 편안하게 담소를 나눈다. 마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에디터
박연경
포토그래퍼
우리
기타
밀란 통신원 | W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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