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대화된 오트 쿠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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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오하라처럼 기둥을 부여잡고 숨을 참아가며 허리를 조이거나, 1번 경추부터 5번 천추까지 스물아홉 개에 이르는 척추를 따라 조르륵 수놓인 콩알만 한 단추를 잠그느라 몇십 분 동안 진땀을 흘린다거나. 이런 불편한 상상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대에 올려진 드레스를 보면 안다. 편하고 예쁘고 폼나는 옷. 그런 건 오트 쿠튀르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오직 극대화된 이미지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그것이 오트 쿠튀르의 통용 가치이자 진면목이다.

Dior

디올의 오트 쿠튀르 쇼는 1년에 두 차례, 패션계 인사라면 모두가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한 달 전부터 날짜를 카운트다운하면서 기다리는 축제에 가깝다. 오트 쿠튀르라는 것이 원래 돈 걱정 없이 예술과 패션을 사랑하는 활짝 열린 마음으로 즐겨야 하는 것이라지만, 대여하는 데만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렀을 법한 대단한 장소에서-예를 들면 베르사유 궁전-, 휘황찬란하게 꾸민 인테리어로 일단 시선을 장악하는 데다가, 족히 1천 명은 넘는 게스트들에게 아낌없이 최고급 샴페인을 대접하는 디올의 오트 쿠튀르 쇼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얼마를 쏟아부었을까 하는 속물적인 궁금함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을 다 합한다 해도 따라가지 못할 가격의 엄청난 드레스가 줄줄이 나오는 그 스펙터클한 장관(!)을 상상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디올의 쿠튀르 쇼는 검소하게도 몽테뉴 애비뉴에 위치한 디올의 본사에서 열렸다. 천재 갈리아노의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선보이던 쿠튀르 작품에 비해 단가가 확실히 낮아보이는 의상이 대부분이었다.

쇼가 열리기 하루 전 찾은 디올의 스튜디오에는 무슈디올의 전성기에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섰던 모델들의 사진이 크게 프린트되어 걸려 있었다.“ 이 사진 속 모델들이 입은 의상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번 쇼에 세우고 싶은 모델들 역시 예전 디올의 쿠튀르에서처럼 지극히 클래식한 면모를 가진 소녀들이죠. 이번에 캐스팅한 모델 중에는 16살짜리도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문제는 아니죠. 결국엔 얼마나‘디 올스러운가’가 캐스팅의 관건이니까요.”갈리아노의 말처럼 이번 쿠튀르 쇼의 주제는 무슈 디올이 사랑한 모델들에 대한 것이었고, 나타샤 폴리나 샤샤 피보바로바를 비롯한 현대의 모델들은 아름다운 컬러와 구조, 장식이 강조된 작품을 입고 마음껏‘디 올 레이디’로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번 디올의 쿠튀르 작품은 공작새 한 마리를 통째로 입은 듯한 드라마틱한 드레스가 마구 튀어나온 전 시즌에 비해 전반적으로‘검소’한 스타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의상이 코르셋을 모티프로 만들어졌기 때문. 갈리아노는 재킷만 입고 아래는 속옷과 가터벨트 정도만 착용했거나, 스커트만 입고 위에는 아예 브라만 착용한 모델들을 내보냈다. 아마 백스테이지에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저, 위에는 뭐 입어요?(모델)”“어휴, 없다니까! 그냥나가!(쇼 디렉터)” “뭐라고욧?(모델)”그렇다고 디올의 이번 쿠튀르 컬렉션이 소심해 보였다는 건 아니다. 잘 만든 언더웨어는 쿠튀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훌륭히 증명해 보였으니까. 핸드메이드 브래지어, 코르셋, 거들, 탭 쇼츠와 스타킹에가터벨트까지. 여기에 하우스를 대표하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바(Bar) 재킷처럼 극적인 요소가 풍부했다.

멋진 자수를 곁들인 코트와 짧은 팬츠, 볼록한 치마, 멋진이브닝드레스 역시 볼륨이 풍부했다. 대부분의 컬렉션이 검정을 기반으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노랑, 보라, 오렌지, 푸크시아 핑크 같은 색상을 통해 희망적인 느낌을배가시켰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디올의 ‘언더웨어 쿠튀르’쇼는 앞으로 패션 크리틱에서 많은 논란을 낳겠지만, 누군가 용감한 셀레브리티가 심플한 브래지어와 휘황찬란한 스커트로 이루어진 디올의 쿠튀르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에 올라온다면 단숨에 ‘패셔니스타’로 격상될 것이 뻔하다. 디올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논쟁에 신경 쓰지 않는 디올의 신념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Chanel

칼 라거펠트는 샤넬 하우스를 위해 그간 불철주야 노력하며 해줄 것은 모두 해준 사람이다. 그러나 패션은 더한 것을 요구하는 법이다.“세 번 잘했으니, 한 번쯤은 쉬어도 돼”라고 인심 좋게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샤넬의 이번 오트쿠튀르는 찬반 논란에 휩싸인 쇼였다.무대에 올려진 작품, 특히 초반부의 수트 위주의 구성만 놓고 보자면 패션 대가 칼 라거펠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같다.“ 쿠튀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한 것만 나오라는 법이 있나? 이번엔 펄럭이는 최고급 옷감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뭔가를 보여줘야겠어.”이런 신념은 초반부의 수트 컬렉션에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갈색과 검정 계통의 트위드 스커트 수트, 말쑥한 크롭트 팬츠, 그리고 모피를 밑단에 풍성히 덧댄 트위드 코트 같은 것들. 여기에 함께 매치하기에 유용한 다양한 드레스가 연이어 쏟아졌다.

대부분 짧은 길이에 동그란 어깨선으로 표현되어 매우 여성스러웠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이 쇼에 참석한관객들은 잘 익은 스테이크 정찬을 기대하고 왔다가 갈비탕 한 그릇 들이켜고 돌아서는 결혼식 하객 같은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웨어의 경계가 희미하게 느껴졌을 테니. 하지만 중반부터 심상치 않은 디자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거펠트는‘훌륭한 소재’의 묘미를 쿠튀르적인 디자인에 접목하는 실험을 감행했는데, 거의 모든 디자인에 부록처럼 깔끔하게 재단된 직사각형의 소재가 덧대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어깨선 뒤에서부터, 어떤 것은 허리나 엉덩이에서, 또 가끔은 대담하게 옷의 앞면에 늘어져 있기도 했다. 은백색의 트위드와 버건디 컬러의 울 소재 수트와 드레스가 특히 돋보였다. 후반부의 이브닝드레스에서는 분위기가 또 한번 반전되었는데, 그제야 라거펠트는 르 사주 공방에서 몇백 시간을 들여 수놓았음에 분명한 멋진 자수가 수놓인 파티 드레스로 화려한 귀부인의 면모를 과시했다. 구조와 흐름에 리드미컬한 변화를 주었던 그 드레스가 쏟아져 나오고서야 비로소 아, 샤넬이구나, 라고 안도했다.

Christian Lacroix

마지막 오트 쿠튀르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크리스찬 라크로와의 쿠튀르 쇼는 역대 최대의 찬사를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1980년대에 문을 연 라크로와 하우스의 재정상태는 심각하다. 요즘의 경제 대란 때문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시작된 상황이긴 하다. 그간 라크로와는 가격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트 쿠튀르를 방불케 하는 레디 투웨어를 만들었고, 오트 쿠튀르는 최고로 호사스러운 장식만을 사용한(그래서 가끔은 시대에 심하게 뒤떨어져 보이는) 작품을 내놨다. 쇼가 아름답고 장대한 것과는 별개로 이 꿈꾸는 남자의 현실감각에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쿠튀르 컬렉션은 라크로와의 시그너처는 확실히 드러나되, 현실을 반영한 듯 이전보다 차분한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재정상 비싼 장식을 달 수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많은 장식이 생략되면서 오히려 그가 선보인 쿠튀르 쇼 중 최고로 인상적이었다. 신데렐라의 왕자님 같았던 알록달록한 바스크 재킷은 주얼 장식의 주머니와 골드 버튼이 달린 밀리터리 스타일의 멋진 모피 재킷으로 변했다. 우아한 칵테일 드레스 밑단에 수놓인 주얼 장식은 차분했고, 드롭 웨이스트 코트는 바로 애비뉴 몽테뉴에서 입고 걷는다 해도 어색하지않을 것 같았다. 컬렉션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이브닝드레스였는데 거의 대부분이 검정으로 이루어져 매우 늘씬해 보였다. 장식을 향한 그의 열정은 고급스러운 숄과 밝은 컬러의 리본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지금의 무드를 몇 시즌 전에만 보여줬다면 그의 현재 위치는 무척 달라졌을 것이기에, 솔직히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

Givenchy

나이로만 따지면 패션계에서 비교적‘애송이’급에 속하는 리카르도 티시의 위치가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개성과 지방시 하우스의 아이덴티티를 요모조모 잘 조합해내는 데 있다. 일례로 지난 시즌 티시가 선보인‘서부 노예’컬렉션이 우아한 헵번의 의상을 만들던 무슈 지방시와 어디가 닮았느냐고 한다면‘어쨌든 각 지고 폼나는’옷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티시는 어렵고 심각한 철학적 접근보다는 쉽게 쉽게 시즌의 주제를 찾아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이번 오트 쿠튀르 쇼에서 보여준 주제는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였다‘. 헛‘!’핫!’하는 생소한 모로코인들의 구 소리 같은 배경 음악으로 시작한 쇼에서 모델들은 베르베르족 여성의 전통 의상에서 모티프를 딴 시폰 후드, 사루에루 스타일의 팬츠 등을 입고 씩씩하게 걸었다. 그렇다고 마냥 전통 의상 일색의 쇼였던 것도 아니다. 어깨에 패드를 넣어 도드라지게 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만든 검정 벨벳, 혹은 가죽 소재의 코트나 재킷도 다수 선보였는데, 이런 강렬한 착장에는 큼지막한 스터드 장식의 순금(정말 지나치게 노래서 깨물면 으스러질 듯
한 순금 색이었다) 반지나 형태감이 잘 잡힌 목걸이, 게다가 자유의 여신상 같은 티아라도 쓰고 있어서 어쩐지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다가 바로 전투하러 나설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어색한 용맹함’은 중간중간의 드라마틱한 드레스가 상쇄시켜주었다. 아이보리 색상의 페이턴트 코르셋에 크림색의 하렘 팬츠를 입고 투명한 시폰 베일을 쓴 칼리 크로스가 무대를 걸을 때에는 어쩐지 공상과학 동화의 공주님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티시의 장점은 이처럼 비현실에 현실을 적절히 버무려서 평범한 우리들도 한번쯤 즐겨도 된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는 거다. 어이쿠, 이 굉장히 상업적인 남자 같으니라고!

Armani Prive

70대의 나이에 20대의 복근을 가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할아버지가 쇼의 피날레 후‘(패션) 의자왕과 삼천궁녀’대형으로 모델들을 끌고 나와 손 키
스를 날리며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마음이 짠하다. 그런 아르마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근자감 쩐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근자감’이라는 단어.‘근거 없는’이 아니라‘근거 있는’으로 읽어줘야 한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뚜렷한 위치도 잡았고, 자신의 스타일에 확고한 신념도 있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서 인생과 패션을 즐길 줄 아는 여자. 그것이 바로 아르마니식의 쿨함이다. 아르마니의 여성상을 두고 그는‘동시대의 인정을 받는 아름다움’이라 설명했는데, 과연 그 표현에 맞는 아르마니 군단들-케이트 블랑쳇, 메간 폭스, 이자벨 위페르-들이 쇼 맨 앞줄에서 눈을 빚내고 있었다(이로써 연말의 레드 카펫에서 아르마니 프리베 최소 한 벌은 따놓은 당상일 터). 아르마니는 이번
쿠튀르 쇼에서 메인 테마로 팬츠 수트를 선보였다. 부드럽게 주름이 잡힌 팬츠 위로 탑처럼 견고한 어깨가 특징인 재킷을 매치하여 실루엣에 대한 자신의 고집을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팬츠 수트라서 다소 밋밋해질 수 있는 부분에는 큰 스터드 장식이나 커다란 둥근 버튼 등으로 리듬을 더했다. 쿠튀르에서는 예상 못한 방식의 스포티한 면도 있었다. 헐렁한 블루종 재킷에 매치한 폴로 셔츠, 한가운데에 지퍼를 넣은 고급스러운 재킷은 이브닝 룩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마니는 쿠튀르가 격식을 한 단계 낮춰야 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광택 있는 고급 원단과 크리스털, 주얼과 스팽글 장식, 메탈 조각을 풍부하게 사용하며 쇼를 빛냈다. 게다가 스팽글이 지나치게 오버한 것으로 느껴질 때는 프린지를 사용하는 중용도 발휘했다. 그 많은 레드 카펫용 드레스는 어디 갔느냐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걱정하지 말라. 아까도 말했지만 케이트 블랑쳇을 비롯한 스타들이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입 벌린 채 쇼를 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Jean Paul Gaultier

이번 시즌 많은 패션 하우스들은 고객들의 구매 여부를 극심하게 의식한 듯, 누구 하나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고객이나 바이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거침없이 꿈꾸는 의상을 선보인 디자이너도 없었다. 그러나 장 폴 고티에마저 이 대열에 동참할 줄은 몰랐다. 보통 쿠튀르에서는 독특한 주제로 극단까지 치고 올라가는 작품을 줄줄이 사탕처럼 꿰고 있던 그였기에, 이런 안전성이 오히려 뜬금없는 드라마로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쇼의 클로징 룩-메탈릭한 3단 캉캉 튜브톱 드레스에 모피로 트리밍한 베일을 뒤덮은 드레스-조차 예전의 전설적인 감각을 잃은 듯했다. 장 폴 고티에가 집중한 것은 디자이너로서의‘컨템퍼러리’한 감각이었던 듯하다. 그간 고티에의 아카이브를한 번씩 거쳐간 것들이 뒤섞여 나왔는데 세일러 셔츠와 벨보텀 팬츠로 구성된 마린 룩도 있었고, 핀 스트라이프 수트와 싸이 하이 부츠를 매치한 섹스어필 룩, 가죽 베스트와 금속성의 엠브로이더리 장식을 한 튜닉으로 70년대 서부 분위기를 낸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고티에의 시그너처 아이템들-트렌치코트, 파자마, 글래머러스한 가운, 호화로운 퍼, 브라 코르셋-이 다양한 변주로 올라왔다. 말하자면 바바렐라를 연기하고 있는 섹스 심벌 매 웨스트의 모습 정도? 의상의 완성도는 높았고, 몇 작품은 클라이언트들이 매우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고티에의 평소 모습을 봤을 때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만한 컬렉션이었다. 경기가 나아지면, 그의 소심함도 함께 나아지겠지.

에디터
패션 디렉터 / 최유경
포토그래퍼
제이슨 로이드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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