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들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결단력 있는 새로운 시도로 거의 혁신에 가까운 변화의 국면을 맞는다. 힙합과 스트리트 문화, 그리고 스포티즘이 녹아든 발렌티노의 2018 리조트 컬렉션은 하우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멋진 한 수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할 겁니다.” 작년 10월 듀오로 쿠튀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발렌티노 하우스를 이끌어온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올 하우스로 떠난 뒤,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 뒤로 홀로 서기를 하게 된 피촐리는 2017 S/S 여성 컬렉션을 시작으로 네 번의 여성 쇼와 한 번의 남성 컬렉션(2017 F/W)을 선보였고, 지난 5월 23일에는 드디어 홀로 준비한 첫 리조트 컬렉션을 공개했다.
뉴욕 맨해튼 본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쇼장에서 베일을 벗은 발렌티노 하우스의 새로운 리조트 컬렉션은 한마디로 ‘센세이셔널’했다. 발렌티노의 사랑스러운 레이디들과 힙합의 만남이라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생경한 두 요소의 조합을 피촐리가 시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작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발렌티노 레이디들을 탄생시켰다. 뉴욕은 피촐리가 지난 프리폴 컬렉션을 선보인 전력이 있는 도시. 당시 “미국은 나에게 여전히 희망의 땅이며,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라고 말한 그가 또 한 번 뉴욕을 선택한 데에 의문을 품은 이들은 뉴욕의 힙합 신과 스트리트 문화가 중심이 된 이번 컬렉션을 마주한 순간, 그의 당연한 선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미국 힙합 신의 신예 트라비스 스콧을 비롯해 거장 반열에 올라선 켄드릭 라마와 드레이크의 음악이 믹싱되어 흐르는 가운데 스포티한 룩을 걸친 모델이 하나둘 등장한 쇼장의 무드는, 뉴욕 스트리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힙합, 그리고 스트리트 문화와 하이패션의 조우는 사실 패션 역사에 있어 오래된 파트너십을 자랑한다. 1980년대 말에 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가 선보인 힙합 무드의 점프 슈트와 칼 라거펠트가 내놓은 체인 장식 드레스가 히트를 기록한 건 유명한 사실. 그 이후로도 이 요소들은 하이패션의 쏠쏠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는데, 꾸준히 이 두 요소를 활용해온 알렉산더 왕부터 최근 엄청난 화제를 일으킨 슈프림과의 협업을 선보인 루이 비통까지, 곳곳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해석한 이 거친 요소들과 발렌티노 레이디의 만남은 어떤 점에서 특별했을까?

먼저, 우리는 피촐리식의 재해석을 거친 트랙 슈트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운동복에서 시작해 1980년대 힙합 뮤지션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은 트랙 슈트는 최근 1~2년 사이 유명 디자이너들에 의해 변주되며 다시금 트렌드 전방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피촐리의 접근이 특별한 건, 그가 트랙 슈트 아이템 자체를 변주하는 데에 치중하기보다 트랙 슈트가 가지고 있는 요소, 예를 들자면 아웃 파이핑이나 밴드 헴라인(흔히 ‘시보리’라고 불리는)과 같은 디테일을 발렌티노의 우아한 피스와 접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아래 27번 사진 속 첫 번째 룩처럼 트랙슈트의 여러 요소를 차용한 레드 드레스의 경우, 운동장 한가운데나 브루클린 어두운 뒷골목보다는 맨해튼의 힙한 레스토랑에 훨씬 잘 어울릴 듯하다. 이에 더해 하우스 특유의 최고급 실크 소재가 사용된 낙낙한 실루엣의 트랙 팬츠는 오피스부터 이브닝 파티까지 어디든 잘 어울릴 법한 실용적인 우아함으로 시선을 끌며, 첫 페이지 5번 사진에서 오른쪽 모델 아냐 시즈가 입은 스웨트셔츠의 장식 요소를 차용한 실키한 드레스엔 로맨틱한 데이트에 잘 어울릴 사랑스러움이 가득하다. 또한 스타디움 점퍼 디테일을 차용한 아우터들의 경우,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도 최근 바즈 루어만의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겟 다운>에 푹 빠져 있다는 피촐리의 취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피스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감도 높은 차용과 재구성을 통해 다른 디자이너들과 다른 발렌티노 하우스만의 스트리트 무드를 완성한 것. 앞서 트랙 팬츠를 이야기하며 언급했 듯, 피촐리가 힙합과 스트리트 문화, 스포티한 요소들을 가지고 ‘발렌티노다운’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으로는 유서 깊은 대형 하우스만이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소재, 그리고 여기에 뒷받침된 장인들의 섬세한 장식 기술을 꼽을 수 있다. 아래의 18번 사진 속 모델 린다 헬레나가 입고 있는 톱처럼 손으로 한땀 한땀 짠 듯한 레이스가 곳곳에 접목되고, 스티칭 디테일이 쿠튀르적으로 더해진 스웨트셔츠 형태의 톱을 쉽사리 구현할 수 있는 브랜드가 흔치는 않으니까. 이에 더해 피촐리가 최근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극도로 절제된 롱앤린 실루엣 역시 이번 컬렉션의 거친 부분을 아름답게 풀어내는 장치가 되었다. 티셔츠를 변형한 좌측 15번 사진 속 드레스의 경우, 우아하게 찰랑이는 실크 소재, 그리고 피촐리의 실루엣이 접목되지 않았다면 이토록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았을 터이다. 한편 지난번에 이어 계속된 아티스트 잔드라 로즈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사랑스러운 프린트는 이전 컬렉션과의 연속성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이번 컬렉션은 슈즈 스타일링도 이전까지와는 좀 다르게 다가왔는데, 퍼가 장식된 플립플롭과 슬리퍼를 활용한 스타일링 역시 쇼의 재미는 물론 퀄리티까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훌륭한 장치로 작용했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디자인만 잘하는 디자이너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문화적인 부분까지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끄는 패션 하우스여야만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룩, 액세서리, 음악, 그리고 장소까지 모든 것이 ‘젊고, 힙한’ 커다란 주제를 감도 높게 그려낸 피촐리의 이번 발렌티노 컬렉션은, 발렌티노 하우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특별한 선언과 같았다. 과연, 쇼장에 자리한 이들 중 이번 쇼를 보기 전에 발렌티노 룩을 걸치고 지하의 힙합 클럽으로 향하고 싶었던 이들이 몇이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