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안 하는 사람을 하자 있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세상의 시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솔로는 연애 상비군이 아니다. 프로 연애인구가 있다면 프로 비연애인구도 있는 법. 그런데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연애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굴까?

British actress and comedian Carol Cleveland riding a bike, UK, 24th October 1971. (Photo by D. Morrison/Express/Hulton Archive/Getty Images)

‘다른 건 다 똑 부러지는데, 유독 연애만은 허당인 그녀!’ 이런 문구가 쓰인 연애 지침서나 자기계발서 서가에 있으면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여러 방면에 능력 있는 여자라면 연애 하나 정도는 못해도 괜찮지 않나? 멋지고 당당한 도시 여성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북돋우는 한편, 연애를 못한다는 사실이 ‘헛똑똑이’의 증거인 양 호들갑을 떠는 말은 여성지나 친구들과의 일상적 대화에서도 흔했다. 아니 왜? 사람이 인기 얻으려고 태어났나? 2012년 당시 나는 지구 종말설과 함께 ‘여자가 25세까지 연애를 안 하면 학이 된다’는 도시 전설에 포위되어 있었다. 모태솔로였고, 그래서 헛똑똑이였으며,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 국가에서 ‘그녀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도 좋다는 자격증을 발급한 것처럼 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연애 적합성에 따라 부지런히 저울을 오르내렸다. 이 세상에 끔찍한 애인이나 망한 연애담은 어설픈 길거리 버스킹처럼 흔하건만, 연애 여부로 한 사람의 ‘정상성’이나 가치를 판별하려 하다니!
내 경우 애초부터 별로 연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절박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애에는 언제나 내가 싫어하는 점이 섞여 있었는데, 그런 것을 견딜 만큼 연애가 좋거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어도 ‘연애를 위한 연애’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정신 승리라느니, 못하면서 안 하는 척한다느니, 뭘 좀 어떻게 해보라는(주로 여성스럽게 굴라는) 말이 돌아왔다. 미디어에는 솔로를 비하하거나 희화화하는 개그가, 인터넷에는 연애 못하는 자신을 자조하는 글이, 시장에는 연애를 못하면 화려한 솔로라도 되어 너의 매력을 증명하라는 압박이 넘쳐났다. 1920년대의 지식인이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2010년대의 청춘은 연애 권하는 사회에 산다. 그래서 나는 솔로가 솔로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을 원했다. 그런데 그런 장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직접 만들 수밖에. 2013년 2월 14일, 학으로 변신하지도 않고 지구에 종말도 닥치지 않은 김에 연애 권하며 솔로를 괴롭히는 이 세상에 시원하게 침이나 뱉어보고자 비연애인구 전용 독립 잡지 <계간홀로 :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창간했다. 연인들의 상징인 밸런타인데이를 전복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부제로 ‘밸런타인데이 공습 대작전’을 붙였다. ‘컴맹’인 내가 혼자서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 뭔가일 뿐이지만, 이 잡지가 연애 지상주의에 지친 사람들에게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 같은 존재이길 바랐다. 창간 의도대로 알음알음 독자가 모이고 클라우드 펀딩으로 인쇄비를 모아주는 고정후원자들이 생겨, <계간홀로>는 4년째 절찬 발간 중이다. 2월 14일엔 10호가 나왔다.
솔로를 ‘연애에 목마른,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바로 연애할’ 연애 상비군으로 보는 연애 지상주의는 지긋지긋하다.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는 ‘비연애’ 상태를 탈출해야 하는 감옥으로 보고, 툭하면 묻지도 않는 ‘솔로 탈출 꿀팁’을 건네는 세상의 무례함. 이러한 연애 지상주의는 한편으로는 특정 조건의 연애만을 정상적인 것으로 승인하고 허용한다. 예를 들면 성소수자의 연애는 드러나는 순간 ‘문제적’인 것이 되고, 보이지 않을 때는 철저하게 지워지는 식이다. 이성애 연애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 외의 삶이나 생활, 가치관을 폄하하거나 배제하는 사고 방식은 여러모로 수상하다. <계간홀로>는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연애 담론을 두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잡지다.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자기를 더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는 말이나 여자 나이에 대한 숱한 관용어가 얼마나 차별적인지, 남성이 돈을 더 많이 내는 데이트 관습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유통됐는지, 어째서 기습 키스를 ‘성폭력’이 아니라 ‘로맨틱한 것’으로 포장하는지, 장희빈 묘에 가서 학춤을 추면 장희빈의 기운을 받아서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말이 진짜인지 등등…. 장희빈 묘와 관련한 풍문의 경우,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앞에서 직접 구애의 춤을 춰보기도 했지만 나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학춤’을 추고 수년이 지나서야 생겼으니, 희빈 마마의 기운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잡지를 만들다 보면 많은 오해를 받는다. 비연애주의자라거나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사는 ‘N포 세대’라는 반응이 가장 대표적이다. 나는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연애를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연애라는 단어와 개념이 한국에 수입된 지 100년. 인간의 본능인 척 여겨지는 연애란 사실 근대 사회에 접어들고 결혼이 사적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발명된 새로운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인류는 연애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굴까? 연애가 젠더, 계급, 주체와 타자, 자본주의, 국가 재생산 이데올로기 등 무수히 많은 것들이 교차하고 길항하는 정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연애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삶 면면에 간섭하고 스며든다. 나는 연애에 빠지기보다 이런 구조를 파헤치고 함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게 좋은 사람이다. 애인의 사랑은 없지만,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다정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정오의 햇살에 데워진 돌처럼 따끈따끈하고 둥글게 산다. 연애하라고 무례하게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를 끊은 덕에 서른을 맞이한 내 주변은 쾌적하다.
때때로 외롭지만, 그것은 연애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할당받은 몫이다. 사람마다 연애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연애에서 발휘하는 재능도, 연애에 인생의 지분을 내어주는 비중도 다르다. 혹여 지금 인생에 연애가 부재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연애가 없는 삶이 두려워 자신을 무리하게 몰아붙이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연애는 인생의 생필품이 아니고, 연애 대상으로서가 아니어도 우리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