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4번째 생일을 맞이한 마이클 코어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하며 행복한 디자이너다. 사실 탄생부터 지금까지, 근사한 여성들에 둘러싸여 성장한 까닭일까? 마이클 코어스는 여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간파해내는 능력을 타고났다. 사실 이는 본능에 가깝다. 이것이 앤젤리나 졸리부터 미셸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파워 우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유. 자신만만한 뉴욕 패션의 아이콘, 마이클 코어스의 흥미진진한 패션 스토리.

마이클 코어스가 사랑해 마지 않는 모델 군단. 왼쪽부터 | 샤넬 이만, 리우 웬, 카르멘 카스, 힐러리 로다, 헬레나 크리스탄센, 패티 핸슨, 캐롤리나 쿠르코바. 의상과 액세서리는 모두 마이클 코어스 제품.

마이클 코어스가 사랑해 마지 않는 모델 군단. 왼쪽부터 | 샤넬 이만, 리우 웬, 카르멘 카스, 힐러리 로다, 헬레나 크리스탄센, 패티 핸슨, 캐롤리나 쿠르코바. 의상과 액세서리는 모두 마이클 코어스 제품.

때는 점심 시간. 미드 타운에 자리한 마이클 코어스의 레스토랑에 13명의 눈부신 뉴욕 여성들이 모여 있다.그리고 한 남자가 (마치 최후의 만찬 속 예수님처럼) 테이블 한가운데에 와인잔을 들고 앉아 맨해튼 사교계의 터줏대감, 마조리 구겔만과 비주를 나눈다. 피부를 건강하게 그을린 54세의 마이클 코어스다. 그를 중심으로 여배우, 모델, 사업가, 사교계의 여왕 등이 저마다 마이클 코어스와의 추억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TV쇼<윌&그레이스>의 배우 데브라 메싱은 그와 첫 미팅을 갖기 전의 순간을 회상했다. “정말 겁이 났어요. 초콜릿 브라운의 스웨이드 바지와 60년대 코트를 빌리기 위해 그를 찾아갔죠. 우리는 어떤 호텔의 바에서 만났는데 정작 그와 만나자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롱아일랜드 출신의 유대인 사촌을 만난 기분이 들었죠.” 그녀의 이야기에 코어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록스타의 부인이자 원조 슈퍼모델인 패티 핸슨과 이만에게 시선을 돌리자 이만이 말했다. “마이클은 옆집 여자가 모두가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한 최초의 디자이너였죠. 그는 내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화려한 색깔만을 입히지 않았어요.” 그러자 마이클 코어스는 1984년에 치른 그의 데뷔 쇼에서 이만이 입은 옷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라이딩 부츠와 터틀넥 그리고 회색 팬츠를 입혔죠.”

그러고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다거리인 90년대 말, 셀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리 몽테뉴 애비뉴를 걸어 내려오다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한 여자를 보았죠. 회색 플란넬 팬츠, 피코트, 캐시미어 터틀넥에 에이비에이터까지 쓰고 있었어요(이는 모두 마이클 코어스의 대표 아이템이다). ‘맙소사! 내가 불과 한 시즌 만에 프랑스의 패션를 바꿨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어요.” 동시에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에스티 로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이린 로더를 바라봤다. 그가 파리지엔으로 착각한 여인이 바로 그녀다(에이린 로더는 뉴욕 패션의 아이콘이다). 그러자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달콤한 시절
패션계에 입문한 지 무려 32년. 요즘 마이클 코어스는 더없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전 세계의 여자들이 열망하는 디자이너로서 그가 세운 패션 왕국은 89개국에 걸쳐, 400여 개 이상의 매장에서 판매되며 그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으며, >프로젝트 런웨이<로 인해 셀레브리티 못지않은 인기까지 누리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돈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사나이인 셈. 그의 패션 세계는 럭셔리한 젯셋족의 일상을 담는다. 이는 실제로 그가 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바쁘게 오가며 일을 하고, 때때로 해변에서 태닝을 즐기는 50대의 부호. 더욱이 이 화려한 일상엔 매혹적인 금발의 젊은 남편 랜스 르페르가 함께한다. 그는 이 냉혹한 패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이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쇼가 끝난 후 피날레에 잠시 나타났다가 이내 수줍은 듯 사라지는 것과 달리 그는 특유의 미소를 만명에 띤 채 런웨이를 한 바퀴 돈다. “피날레 워킹은 마치 칵테일 파티와도 같아요. 내 쇼에 온 손님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싶거든요.”

또한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언젠가는 42번가에 위치한 사무실에 열린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한 에디터와 바이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옷은 테니스를 칠 수 없는 테니스 드레스입니다. 또 스커트는 뒷부분에 주름을 만들지 않았어요. 아무도 뚱뚱한 엉덩이를 지닐 수 없게끔 말이죠.” 그의 친구이자 디자이너인 베라 왕은 마이클 코어스를 ‘활력 넘치는 남자’라고 정의한다. “C.F.D.A에서 미팅을 할 때나 친구로 만날 때나 한결같이 즐거운 사람이죠.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이는 요즘 패션계에서 드문 가치예요. 또한 그는 여느 디자이너처럼 신경질적이거나 자기 비하에 빠지지도 않죠.”

옛날 옛적에
그는 50년 전에도 활기로 가득 찬 소년이었다. 스웨덴 혈통의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칼 앤더슨. 그의 어머니인 조안은 마이클 코어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재 회사의 대사 역할을 맡고 있다(조안은 마이클 코어스가 5세 때 빌 코어스와 재혼했고, 이때 그는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었다). 외동아들인 마이클 코어스는 쇼핑광이자 다양한 스타일의 여자 친척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어머니 조안은 스포티한 스타일의 대가였으며, 그의 할머니는 프린트와 컬러 그리고 주얼리 마니아였다. 또 이모 중 한 명은 보헤미안 히피 스타일이었고, 그의 고모 할머니는 마이클 코어스에게 ‘낙타색의 매력’에 대해 가르쳐준 장본인이다. 그는 멋쟁이 군단의 감각을 빠르게 흡수했고 심지어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어머니, 조안이 두 번째 남편 코어스와 재혼을 할 때 입은 웨딩드레스를 보고는 너무 요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숙했다. 이에 대해 조안은 “마이클은 절대 청바지 한 벌에 스웨터를 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보타이와 새들 슈즈를 꼭 챙겼죠”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열 살이 되자 가족이 살던 집 지하실에 아이언 버터플라이라는 이름의 패션숍을 꾸미고 자신이 집에서 직접 만든 양초와 구리 해머로 만든 팔찌, 가죽 가방을 팔았다.

이후 그는 뉴욕 맨해튼의 패션 스쿨 F.I.T에서 패션을 공부했지만 그의 실질적인 패션 교육은 5번가에서 최고급 프렌치 진을 판매하는 로타르에서였다. 이곳에서 그는 판매원으로 일했는데, 한번은 점주에게 마네킹이 글로시한 검은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점주는 새로운 물품을 장만할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자, 마이클 코어스는 블랙 스프레이를 사다가 마네킹을 직접 칠했다. 코어스는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그를 본 점주는 그에게 디자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당시엔 모든 게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과도 같았어요. 소재와 단추를 찾아 가먼트 센터를 하루종일 이 잡듯 뒤졌고 작업실로 돌아가 재봉질에 열중했죠. 그러다 슬립 드레스와 점프수트를 만들었고, 이를 골디 혼이 사갔죠. 그녀가 사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니까요?” 그렇게 조금씩 뉴욕 패션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던 중 그를 눈여겨 보던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의 부사장 돈 멜로가 마이클 코어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선물했다. “정말이지 무지했어요. U.P.S 로 배송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라서 버그도프 굿맨에서 판매할 나의 첫 라인을 이모의 벤츠 뒷좌석에 쌓아서 직접 실어 날랐어요. ‘스타일 넘버’의 개념조차 알지 못했죠. 그저 옷에다가 ‘블랙 새틴 탱크톱, 회색 팬츠’ 이렇게 썼거든요. 그러자 매장에서 스타일 넘버를 알려달라고 했고 그냥 ‘스타일 넘버 원, 넘버 투라고 붙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어스의 첫 번째 컬렉션은 완판되었다.

사실 코어스가 패션계에 입성할 당시의 미국 패션은 태동기를 거쳐 유아기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캘빈 클라인, 앤 클라인, 랄프 로렌 3대 패션 레이블이 패션 신을 장악한 1984년에 데뷔한 그는 뉴욕 8번가에서 구입한 싸구려 신발과 철물점에서 구한 커튼링을 이용해 주얼리를 만들어 쇼에 사용했다. 심지어 그의 데뷔 쇼는 6번가의 한 갤러리에서 열렸는데 그 장소의 유일한 문제점은 어두운 초록색의 벽이었다. 코어스는 쇼 전날 밤 벽을 흰색으로 칠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당시 <WWD>에 실린 리뷰는 ‘새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갤러리에서…’로 시작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의상에 대한 부분은 극찬 일색이었다. 1980년대 미국 패션은 슈퍼모델들이 주도했는데, 그는 슈퍼모델들의 파워를 적극 활용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당시엔 아이작 미즈라히, 마크 제이콥스 등이 뉴욕 패션의 기린아로 떠오르며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도나 카란의 대를 이었는데, 마이클 코어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하며 트로이카를 이뤘다.

왼쪽부터 | 캐롤리나 쿠르코바, 카르멘 페다루, 마이클 코어스. 의상과 액세서리는 모두 마이클 코어스 제품.

왼쪽부터 | 캐롤리나 쿠르코바, 카르멘 페다루, 마이클 코어스. 의상과 액세서리는 모두 마이클 코어스 제품.

그런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중 마이클 코어스는 유럽에서 파트너십을 맺은 라이선스 기업이 금전적 위기에처하면서 미국에서 사업을 철수한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옷이 잘 팔리고 있었다고요! 10년 동안 열심히 일궈놓은 것을 한순간에 잃는 기분이었죠.” 그는 처음으로 브랜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렌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럭셔리한 스포츠웨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올곧게 유지하고 있다. 결국 코어스의 작품은 부유한 여자들이 매일 즐겨 입는 패션의 대명사가 되었고, 결국 LVMH의 러브콜을 받기에 이른다. 1997년 이 거대한 공룡 기업은 그에게 셀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제안했다. “고민에 빠졌어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거든요. ‘정말 내가 프랑스 식으로 옷을 만들어야 하나? 그게 무엇이든?’이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죠.” 그가 기억하기로 LVMH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카콜라를 마시진 마세요. 스니커도 신지 마요. 그건 너무 미국스럽거든요’ 라고 조언했다고. 하지만 그는 그들의 유일한 조언을 듣지 않았고 지난 세월 그가 추구해온 스타일 그대로를 셀린에 담았다. 그리고 파리는 피코트와 터틀넥 그리고 회색 플란넬 팬츠를 입은 프랑스의 에이린 로더들로 넘쳐났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좁다는 것을 느꼈죠. 셀린에서의 경험은 제게 글로벌한 시각을 심어주었어요.”

그리고 6년 후 2003년에 자신의 브랜드에 집중하기 위해 셀린을 떠날 무렵, 세상은 또다시 변화에 물결에 휩싸였다. <섹스 & 더 시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인터넷은 패션을 접하는 방법 자체를 바꿔놓았다. 갑자기 대중이 하이패션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크릴 샌들이건, 커다란 로고 범벅의 백이건 하이패션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라도 소유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마이클 코어스는 그때 그의 라인 중 보다 저렴한 아이템을 선보이는 컨퓨전 라인,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를 론칭했고, 오늘날 이 라인은 회사 매출의 일등공신 역할을 맡고 있다.

꿈의 디자이너
그는 원래 패션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지만 보다 폭넓은 대중이 그를 인지한 건 리얼리티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 출연 이후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호스트인 하이디 클룸과 프로듀서가 코어스를 찾아가 심사위원으로 출연해달라고 부탁했을 때만 해도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젝트 런웨이>가 패션에 대해 진지한 비전과 헌신을 담은 프로그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처음 출연을 할 때만 해도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이 패션에 미친 여자거나 소수의 게이 뿐일 거라 속단했지만, 얼마 후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한 가족으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들은 매주 가족끼리 모여 앉아 쇼를 보며 나의 유머를 즐긴다고 말했어요.” 그는 실제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그의 비평이 대중의 공감을 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불쑥 말을 내뱉어요. 그러다가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진심으로 충고하려고 노력했죠. 만약 그 참가자들이 나중에 자신의 브랜드를 갖게 된다면 나의 비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거에요. 그땐 소비자들이 직접 평가하게 될테니까요.” 코어스는 이 쇼로 인해 얻은 인기가 자신의 비즈니스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자신이 패션 세계를 처음으로 구경하는 어린 세대들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그는 그렇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혹자는 그를 ‘젯셋족만을 위한 패션 디자이너’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만큼 시류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디자이너도 드물다. 그는 이제 나이에 따라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건 고리타분하다고 말한다. “젊은 사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스타일로 연출하고, 그보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어느 때보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모든 사람이 서른 살 정도의 감성을 지닌 것 같아요. 또, 계절에 맞춰 옷을 입는 것도 이젠 진부해요. 여보세요, 말리부에서는 여름에도 털부츠를 신고, LA의 소년들은 스키 모자를 쓰고 폭염을 견뎌요. 우리 직원들은 스팽글 의상을 입고 일하고요.”